"서련(徐憐) 판관 사적비(事跡碑) 건립"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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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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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1일 (수) 17:17 판

제주목판관(濟州牧判官) 서련(徐憐)은 중종 8년(1513) 약관(弱冠)의 나이로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부임한 후 김녕사굴(金寧蛇窟)의 뱀에게 해마다 어린 처녀를 제물로 바쳐 오던 미신과 폐습을 퇴치한 선정관(善政官)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서(徐)판관의 행적은 서씨의 자랑일 뿐아니라 제주의 역사적 문헌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김녕사굴에 얽힌 이야기를 남겨 놓은지 460년이 흐른 후 김녕사굴 앞에는 50여년 전 세워진 비(碑)가 초라하게 그 유래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비석은 1942년 구좌면 하도리(下道里) 출신의 유지(有志) 강공칠(康公七)이 서련 판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였다. 그러나 비문(碑文)은 오랜 세월동안 풍수에 씻겨 읽기조차 어렵게 되었으며 외관 또한 초라하게 변해 버렸다. 때문에 이곳을 찾는 뜻 있는 인사나 관광객까지도 새로운 사적비(事跡碑) 건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1971년 연산인(連山人)이며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서용길(徐容吉)이 사적비 건립을 발의하고 제주문중에 협조를 구해 왔다. 재경 연산서씨종친회(在京連山徐氏宗親會)에서 본 사업을 추진하려는데 제주라는 지역적 문제로 당국의 지원을 받고 절충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제주파연친문중회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에 제주연친회는 이 사업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제주도 관계당국에 사적비건립사업 지원비 요청을 하는 등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에서는 서(徐)판관이 이천서씨의 후손으로만 알고 있었고, 연산인(連山人)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구나 한때는 서련 판관을 입도조의 부친인 서홍철(徐弘喆) 판관과 동일 인물로 인식하였던 때마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김녕사굴의 일화(逸話)에 등장하는 서련 판관이 연산徐氏임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서련은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의 5세 손이다. 그러나 연산인도 비조(鼻祖)는 역시 이천서씨의 시조인 아간공(阿干公) 서신일으로 19세가 된다. 오늘날 연산 서씨로 분파(分派)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연성군(連城君)에 봉(封)해진 가문을 빛내기 위한 것으로 서련이 제주에 부임할 당시에는 이천(利川)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보아진다. 제주문중에서는 본관을 초월하여 서련과 같은 선정관(善政官)의 사적비 건립은 제주에 있는 서씨문중이 주관하여 추진함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또한 서울에서 제작하여 내려보낸 사적비는 크기가 너무 작아, 관광지에 새로이 세우는 사적비로서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 관계기관과 현지 주민의 여론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10월 16일에 열린 문중회에서는 본 사업을 제주연친회에서 주관하여 추진키로 결의하여 활발하게 사업추진이 진행되었다. 제주문중에서 사업을 주관하되, 본 사업을 도민적 행사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건립추진위원회의 구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추진위원장에 초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박경훈(朴景勳)을 추대하고 제주도내 주요 기관장과 유지, 북제주군 지방문화재위원, 도내 서씨 문중인사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서련판관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여기에 제주도의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도 사적비 건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제주도에서 문화재 보수비로 30만원, 북제주군에서 10만원을 보조해 주었다.

서울에서 보내온 비석과는 별도로 새롭게 비문을 제작한 제주문중에서는 1972년 1월 10일에 착공하여 2월 28일 사적비는 건립을 완료하였다. 4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전면에는 「제주판관서련공덕비(濟州判官徐憐功德碑)」라고 새겨 있고, 후면에는 1백 단어에 이르는 서판관의 약력과 행적이 적혀있다. 총 공사비는 83만5천원이 소요되었는데, 제주문중에서 부담한 것은 43만5천원이었다.

1972년 4월 10일에는 서(徐)판관의 살신구민(殺身求民)의 덕(德)을 기리기 위한 사적비 제막식이 김녕사굴 앞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승택(李昇澤) 제주도지사 등 도내 각급 기관장과 서씨 문중인, 주민 등 3백여명이 참석하였다. 제막식 행사는 개식사 · 제막 · 행제(行祭) · 분향 · 서련판관 약력보고 · 경과보고 · 비문낭독 · 치사 · 송덕사 · 감사패 증정 · 기념식수 · 제막기념 무용공연 순으로 거행되었다. 감사패는 김녕사굴 관리인으로서 유적지 관리와 본 사업을 추진하는데 적극 협조해 준 김군천(金君天)에게 증정되었다.

이 사업이 종료된 후 재경연산서씨종친회에서는 서판관의 본관이 연산(連山)임을 들어 건립비용의 내용에 이천서씨의 후손인 양 기재됐음에 유감의 뜻을 서신으로 보내왔다. 이에 제주문중회에서는 서씨의 뿌리는 이천이므로 분파적(分派的)이고 협의적(狹義的)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나, 넓은 의미로 보면 이천(利川)의 후손임이 분명하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처음부터 편협한 생각으로 이 사업에 임했다면 다른 본관(本貫)을 가진 종친회에서 발의한 사업을 제주문중에서 시종일관 성의를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이며, 비문에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비를 세운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지, 이천서씨 문중에서 세운다고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오로지 서(徐)판관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제주문중회에서 정성을 바친 사업을 협의(狹義)로 평가함은 오히려 유감임을 회신하였다.

어떤 일이든 마치고 보면 다소의 부작용이든 아쉬움이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서련판관 사적비 건립사업은 그 발의가 연산 서씨종친회(連山徐氏宗親會)에서 되었으나, 제주의 이천서씨문중회에서 주관하여 사업을 추진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본관(本貫)을 초월하여 자랑스런 선현(先賢)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문화재적인 가치를 높이고자 하여 스스로 짊어진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당시 회장이었던 서상진(徐相眞) · 부회장 서상경(徐相京) · 총무 서용주(徐鎔洲) · 재무 서상흠(徐相欽) 등 임원들이 1년에 걸쳐 애쓴 노력의 공로는 이러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관계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
          • 고조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
            • 증조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
              • 큰할아버지: 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 큰할아버지: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
              • 큰할아버지: 서박(徐樸 봉례공)
              • 큰할아버지: 서적(徐迪남양군)
              • 할아버지: 서직(徐稷 연성군)
                • 아버지: 서준영(徐俊英 연성군)
                  • 본인: 서보(徐寶 정3품 생원)
  • 작은고고고고고조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서씨일가연합회 [[1]] [[2]] ]]

미신을 타파한 서련(徐憐) 판관​

서련(徐憐) 판관은 김녕사굴(金寧蛇窟) 일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제주도와 연관된 서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입도조 서희례(徐希禮)보다 4대를 앞서는 인물이다.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19세 손이며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으로부터는 5세 손이 된다. 그는 성종 25년(1494)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천성이 총명하였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

부모 없이 자람을 가엽게 여긴 외조부 양경공(良敬公) 정문형(鄭文炯)은 그의 이름을 련(憐 : 불쌍히 여길 련)이라 짓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쳤다. 외조부 슬하에서 학문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낸 서련은 중종 6년(1511)에 1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중종 8년에 제주 목판관(牧判官)으로 임명되어 도임(到任)했는데 그는 역대 판관 중 가장 연소자로 알려진다.

그 무렵 제주의 구좌(舊左) 지방에는 미신에 얽매인 해괴한 폐습이 있었다.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김녕사굴(蛇窟)에는 속칭 「대맹」이라는 큰 뱀이 숨어 살아,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15~16세 되는 청순한 처녀를 제물(祭物)로 바쳐오고 있었다. 만약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뱀이 조화를 일으켜 큰 바람을 불게하여 모처럼의 농사가 폐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윤번제로 집집마다 사굴(蛇窟)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에 딸을 가진 집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 같은 폐습은 관아(官衙)에서도 알게되어 전임 관원(官員)인 이필희(李必希)가 인명을 희생시키는 일을 삼가도록 극구 만류했으나 뿌리 박힌 미신 탓인지 주민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부임 후 이런 사정을 듣게 된 서련은 "아무리 무지(無知)한 백성이라 하나 귀중한 인명(人命)을 뱀에게 바친다니 될 말이냐."고 통탄하명서 잔인무도한 악습(惡習)을 뿌리뽑겠다고 나섰다.

중종 10년(1515), 그는 주민들에게 전과 같이 제(祭)를 올리도록 한 후 병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창칼을 지니고 숯과 염초(焰硝 : 충격으로 열을 발생시켜 폭발시키는 물질)를 준비하여 굴 입구에 대기시켰다. 북을 치자 과연 큰 구렁이가 굴 밖으로 나와 소녀를 삼키려 하였다. 이 때를 기다려 서련이 들고 있던 창으로 뱀을 향해 내리 찌르자, 병졸들과 역사(力士)들도 일거에 도끼와 창으로 사정없이 난자(亂刺)하였다. 이와 동시에 독약과 기름을 꿈틀대는 뱀의 몸뚱이에 퍼붓고 불을 당기자 오랫동안 주민을 괴롭혀 온 뱀은 드디어 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청년 판관 서련(徐憐)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소리가 전도에 날로 높았다. 그러나 인걸(人傑)은 단명(短命)하는 것인지 중종 10년(1515) 4월 10일, 겨우 22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순직하니 그를 애도하는 도민의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다. 일설(一說)에 는 서련이 뱀을 죽인 뒤 말을 타서 성안(城內)으로 달려오는데 등뒤에서 한줄기 붉은 요괴가 구름을 타고 따랐으며, 그가 관아(官衙)에 도달하자마자 쓰러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더니 10여일 후에 기어이 관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서련 판관은 충남 홍성군 보개산(寶蓋山) 덕은(德隱) 땅에 안장되었다. 그의 관구(棺柩)가 제주를 떠날 때에 도민들은 이를 붙들며 애절한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한다. 미신이 만연했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서련 판관의 대담무쌍한 행동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폐습을 퇴치하려는 살신구민(殺身救民)의 지성(至誠)과 선정(善政)을 베풀려는 호연한 용기와 의지가 있음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김석익(金錫翼)은 「탐라기년(耽羅紀年)」에서 서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련(徐憐)이 연소(年少)했기 때문에 기질과 태도가 거칠고 경솔하여 비록 당나라의 한유(閒遊)가 종용(慫慂)의 악어를 길들인 고사(故事)에는 비길 수 없으나, 그 굳세고 올바른 기질과 백성들의 재해(災害)를 제거해 준 공(功)을 우러러 볼 때 중국 광동(廣東)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제주 사람은 마땅히 한시라도 서련의 공적을 잊어서는 아니될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오늘날 그의 공을 알아주는 이가 드므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서련이 재임시 제주 목사(牧使)는 성수재(成秀才)였는데 그는 청렴정대(淸廉正大)하고 과묵엄숙(寡默嚴肅)하였으므로 아전(衙前)들이 감히 부정을 저지르지 못했던 선정관(善政官)이었으며 그 또한 재임 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녕사굴에 얽힌 서련 판관의 유덕(遺德)을 기리고자 1942년에는 구좌읍 하도리의 유지 동은(東隱) 강공칠(康共七) 선생이 앞장서 김녕사굴 앞에 서련을 추모하는 조그만 공덕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련 판관의 행적은 조금씩 잊혀져 전설처럼 되어가고 공덕비마저 노후되었다. 그러자 이천 서씨 제주문중회가 중심이 되어 1972년 4월 10일에 다시금 그의 용기와 슬기를 기리는 사적비(事跡碑)를 세웠으니 그의 치적은 천세(千歲) 만대(萬代)에 영원히 기억되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