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실집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7번째 줄: 7번째 줄:
  
  
귀실집사가 죽은 연대는 귀실신사에 발견된 그의 묘지로 추정컨데 688년으로 여겨진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귀실이라는 성은 귀신감화지의(鬼神感化之義)란 말에서 생겨났다고 하였다. 귀실은 복성으로 백제에는 사택씨나 흑치씨 등 복성이 많았다. 백제부흥군을 이끈 귀실복신(鬼室福信)과 의약에 통달했다고 알려진 귀실집신(鬼室集信) 등이 있다.
+
귀실집사가 죽은 연대는 귀실신사에 발견된 그의 묘지로 추정컨데 688년으로 여겨진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귀실이라는 성은 귀신감화지의(鬼神感化之義)란 말에서 생겨났다고 하였다. 귀실은 복성으로 백제에는 사택씨나 흑치씨 등 복성이 많았다. 백제부흥군을 이끈 귀실복신([[부여복신]])(鬼室福信)과 의약에 통달했다고 알려진 귀실집신(鬼室集信) 등이 있다.
  
일본은 665년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에게 왜국의 관위를 주기 위해 백제국 관위의 계급을 검토하였는데, 귀실집사는 665년 일본으로부터 좌평 복신[귀실복신]의 공적에 의하여 소금하란 직위를 받았다. 그 전의 직위는 달솔이었다. 귀실복신의 공적으로 소금하를 받은 것을 볼 때 귀실집사가 귀실복신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귀실복신은 백제부흥운동기간에 실질적으로 백제를 대표하여 왜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귀실복신은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인 풍장에 의해 죽었는데 아마 귀실집사도 그때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 같다. 669년에는 좌평이란 직임을 띠고 있다. 일본은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 귀실집사 등 남녀 700여명을 근강군(近江國) 포생군(蒲生郡)에 옮겨 살게 하였다.
+
일본은 665년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에게 왜국의 관위를 주기 위해 백제국 관위의 계급을 검토하였는데, 귀실집사는 665년 일본으로부터 좌평 복신[[부여복신]]의 공적에 의하여 소금하란 직위를 받았다. 그 전의 직위는 달솔이었다. 귀실복신의 공적으로 소금하를 받은 것을 볼 때 귀실집사가 귀실복신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귀실복신은 백제부흥운동기간에 실질적으로 백제를 대표하여 왜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귀실복신은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인 풍장에 의해 죽었는데 아마 귀실집사도 그때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 같다. 669년에는 좌평이란 직임을 띠고 있다. 일본은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 [[귀실집사]] 등 남녀 700여명을 근강군(近江國) 포생군(蒲生郡)에 옮겨 살게 하였다.
  
 
포생군에는 백제인들이 세운 석탑사와 백제사가 남아 있다. 665년에도 백제 남녀 4백여인을 근강군 신전군(神前郡)에 살게하였는데 망명한 백제인을 이용하여 새로운 도읍지 근강국을 개발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포생군은 신전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667년에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강국 대진경으로 천도하였다. 669년 귀실집사는 학직두를 맡고 다시 소금하의 관위를 받았다. 학직두는 율령제의 대학료(大學寮)의 장관에 해당하고, 현재의 국립대학 총장격이다. 율령제에서는 종5위상 혹은 종5위하의 사람이 임명되었다.
 
포생군에는 백제인들이 세운 석탑사와 백제사가 남아 있다. 665년에도 백제 남녀 4백여인을 근강군 신전군(神前郡)에 살게하였는데 망명한 백제인을 이용하여 새로운 도읍지 근강국을 개발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포생군은 신전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667년에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강국 대진경으로 천도하였다. 669년 귀실집사는 학직두를 맡고 다시 소금하의 관위를 받았다. 학직두는 율령제의 대학료(大學寮)의 장관에 해당하고, 현재의 국립대학 총장격이다. 율령제에서는 종5위상 혹은 종5위하의 사람이 임명되었다.
  
  
귀실집사의 후손들이 평안(平安)시대 후기부터 겸창(鎌倉)시대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묘비가 현재 자하현 포생군 일야정시 소야(濨賀縣 蒲生郡 日野町市 小野)의 귀실신사[서궁신사(西宮神社)]에 남아 있다. 묘비는 윗부분이 삼각형 모양이고, 몸통은 8각형이다. 윗부분과 몸통과의 사이에 2㎝ 가량의 홈이 파여 있다. 전체 높이 48㎝, 한 면의 폭이 10㎝ 정도 된다. 비문의 내용은 정면에 '귀실집사묘', 오른쪽에 '주조 3년(688) 11월 8일□', 왼쪽에 '서손 미성이 만들다'이다.
+
[[귀실집사]]의 후손들이 평안(平安)시대 후기부터 겸창(鎌倉)시대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묘비가 현재 자하현 포생군 일야정시 소야(濨賀縣 蒲生郡 日野町市 小野)의 귀실신사[서궁신사(西宮神社)]에 남아 있다. 묘비는 윗부분이 삼각형 모양이고, 몸통은 8각형이다. 윗부분과 몸통과의 사이에 2㎝ 가량의 홈이 파여 있다. 전체 높이 48㎝, 한 면의 폭이 10㎝ 정도 된다. 비문의 내용은 정면에 '귀실집사묘', 오른쪽에 '주조 3년(688) 11월 8일□', 왼쪽에 '서손 미성이 만들다'이다.
 +
 
 +
 
 +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
 
 +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2022년 9월 12일 (월) 10:09 판

귀실집사(鬼室集斯)

? ~ 688. 일본에 망명한 백제의 유민.


귀실집사는 백제 출신으로 백제 멸망 후 일본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킨 귀실복신과 인척관계로 여겨진다. 달솔과 좌평을 지냈고 일본에서 소금하란 지위를 받고 학직두(學職頭)를 역임하기도 했다.


귀실집사가 죽은 연대는 귀실신사에 발견된 그의 묘지로 추정컨데 688년으로 여겨진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귀실이라는 성은 귀신감화지의(鬼神感化之義)란 말에서 생겨났다고 하였다. 귀실은 복성으로 백제에는 사택씨나 흑치씨 등 복성이 많았다. 백제부흥군을 이끈 귀실복신(부여복신)(鬼室福信)과 의약에 통달했다고 알려진 귀실집신(鬼室集信) 등이 있다.

일본은 665년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에게 왜국의 관위를 주기 위해 백제국 관위의 계급을 검토하였는데, 귀실집사는 665년 일본으로부터 좌평 복신부여복신의 공적에 의하여 소금하란 직위를 받았다. 그 전의 직위는 달솔이었다. 귀실복신의 공적으로 소금하를 받은 것을 볼 때 귀실집사가 귀실복신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귀실복신은 백제부흥운동기간에 실질적으로 백제를 대표하여 왜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귀실복신은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인 풍장에 의해 죽었는데 아마 귀실집사도 그때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 같다. 669년에는 좌평이란 직임을 띠고 있다. 일본은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 귀실집사 등 남녀 700여명을 근강군(近江國) 포생군(蒲生郡)에 옮겨 살게 하였다.

포생군에는 백제인들이 세운 석탑사와 백제사가 남아 있다. 665년에도 백제 남녀 4백여인을 근강군 신전군(神前郡)에 살게하였는데 망명한 백제인을 이용하여 새로운 도읍지 근강국을 개발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포생군은 신전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667년에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강국 대진경으로 천도하였다. 669년 귀실집사는 학직두를 맡고 다시 소금하의 관위를 받았다. 학직두는 율령제의 대학료(大學寮)의 장관에 해당하고, 현재의 국립대학 총장격이다. 율령제에서는 종5위상 혹은 종5위하의 사람이 임명되었다.


귀실집사의 후손들이 평안(平安)시대 후기부터 겸창(鎌倉)시대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묘비가 현재 자하현 포생군 일야정시 소야(濨賀縣 蒲生郡 日野町市 小野)의 귀실신사[서궁신사(西宮神社)]에 남아 있다. 묘비는 윗부분이 삼각형 모양이고, 몸통은 8각형이다. 윗부분과 몸통과의 사이에 2㎝ 가량의 홈이 파여 있다. 전체 높이 48㎝, 한 면의 폭이 10㎝ 정도 된다. 비문의 내용은 정면에 '귀실집사묘', 오른쪽에 '주조 3년(688) 11월 8일□', 왼쪽에 '서손 미성이 만들다'이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