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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집(臨齋集). ==
 
==  임재집(臨齋集). ==

2022년 8월 31일 (수) 20:32 판

1825(순조 25)∼1905.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臨齋). 아버지는 서홍렬(徐洪烈)이며, 어머니는 흥해배씨(興海裵氏)로 배응수(裵應綉)의 딸이다.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8대손으로, 임재의 아들은 서진국(徐鎭國)과 며느리는 일직 손씨(一直 孫氏) 손정두(孫廷斗)의 딸이다.

1846년(헌종 12) 생원시에 합격, 도천(道薦)에 다섯 번 오르고 암행어사의 추천도 받았으며, 1883년(고종 20)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서찬규는 수동재(守東齋)를 지어놓고 후진 교육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조병덕(趙秉德)·최익현(崔益鉉)을 종유하면서 경전에 대한 질의와 한말의 사회·정치적 사변으로 인한 문제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잦은 침략에 대한 대비책으로 경상도 일원의 요새지에 성을 수축할 것을 제의하였으며,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이(理)는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氣) 속에 존재하여 기의 주(主)가 된다고 전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임재집(臨齋集)』이 있다.

가족

  • 아버지: 서홍렬(徐洪烈)
    • 본인: 서찬규(徐贊奎 임재. 학자.영남의 거두)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임재집(臨齋集).

『임재집(臨齋集)』은 서찬규(徐贊奎)의 시문집으로서, 1909년 이화상(李華祥)의 편집을 거쳐 1931년 신현구(申鉉求)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두에 전우(田愚)의 서문, 권말에 이화상의 발문이 있다. 17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판본이다. 국립 중앙 도서관·성균관 대학교 도서관·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권1·2에 시 132수, 소(疏) 1편, 서(書) 10편, 권3∼권8에 서(書) 311편, 권9∼권12에 잡저 20편, 서(序) 26편, 권13∼권17에 기(記) 26편, 발(跋) 20편, 고축문 10편, 제문 14편, 애사 1편, 묘갈명 12편, 묘표 8편, 행장 7편, 전(傳) 1편, 부록으로 묘갈명 1편, 가장 1편, 가장후(家狀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書)는 스승 홍직필(洪直弼)과 조병덕(趙秉悳)·임헌회(任憲晦)·최익현(崔益鉉) 등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경전(經典)에 대한 질의와 한말의 정세에 관한 논술이 많다. 잡저 중 「기행(紀行)」은 홍직필이 살고 있던 경기도 노호(鷺湖)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문경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의 달천(達川)과 탄금대(彈琴臺)·화양동(華陽洞)·해인사 등지를 거쳐 달성의 본가에 돌아오는 동안에 보고 느낀 것을 상세히 기록한 기행문이다. 「교성보의(嶠省堡議)」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방어책을 논한 것으로, 경상도 일원의 요새지에 성을 쌓고 해안 경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장하는 글이다. 「만필(漫筆)」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이룬 것으로는 이(理)와 기(氣)임을 전제하고, 이(理)는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氣) 속에 존재하여 이(理)가 기의 주(主)가 된다고 역설함으로써 이기 일원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체의 운행과 음양의 변화 원리를 서술하고 있다. 「잡기(雜記)」는 한말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임재일기(臨齋日記)

조선 후기의 문인인 서찬규(徐贊奎, 1825~1905)가 헌종 11년인 1845년부터 철종 12년인 1861년 5월 20일까지 약 17년간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생활일기.

19세기 경상도 대구 지역에 살았던 서찬규가 1845년 1월 1일부터 1861년 5월 20일까지 약 17년간 기록한 일기로, 하루에 이렇다 할 내용이 없는 날이라도 날씨만은 꼭 기록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의 일기를 꼬박꼬박 기록한 것이다.

저자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 다음해인 1846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암행어사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일기에는 이러한 관직생활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친우관계나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온 일까지 모두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1800년대 중반 대구 지역에서의 생활 모습과 관직 생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011년에 책으로 발간하였다.


낙동정사(洛東精舍).임재 서찬규 기념관

낙동정사(洛東精舍·대구시 달성군 화원유원지 입구 오른편)가 달성군의 화원유원지 정비계획에 포함돼 헐릴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낙동정사는 구한말 대구지역 유림의 역사 및 독립운동의 산실로서 보존 가치가 높다.

낙동정사는 1901년에 건립됐다. 이 정사는 구한말 대구를 대표하는 거유 임재 서찬규(1825~1905) 선생이 말년에 이곳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육성하는 강학소로 이용됐다. 대구지역 25개 문중이 4천576량(兩), 약 3억원을 갹출해 지은 건물이다. 임재의 유고집인 '임재문집'과 '임재일기', '낙동정사 도록', 고문서 등 약 1천 점에 달하는 낙동정사 관련 사료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다. 그 중 임재의 제자들로 구성된 '임연당학계안'에는 영남 기호학파의 연원과 인물, 강학 내용 등이 자세히 나와 있다.

임연당학계안에는 대구지역 파리장서(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낸 유림단의 독립청원 운동)를 주도한 서건수(徐健洙) 지사(임재의 손자)를 비롯해 우성동, 우하교, 우경동, 우승기, 우찬기, 박순호, 이복래, 김용호 등 파리장서 관련 독립운동 수훈자 9명도 포함돼 있다. 또 임재 선생의 고손자는 일제 말기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의거'를 주도한 목민(木民) 서상교(徐尙敎) 독립지사다.

우종경 단양우씨 종중 사무국장은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보존이 잘 됐으나, 현재는 방치돼있어 안타깝다. 이곳에 관광호텔을 짓는다고 낙동정사를 허물면 역사적 명소가 사라지는 것이다. 대구지역 '파리장서 기념관' 또는 '임재 서찬규 기념관'으로 활용하면 역사교육 효과와 화원유원지 관광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