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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창(徐慶昌)
 
서경창(徐慶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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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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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종저방(種藷方)』을 저술하였고 그의 시문(詩文)과 실학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학포헌집(學圃軒集)』을 저술하였다. 천수경(千壽慶)이 쓴 『학포헌집』의 서문을 보면, 서경창은 지위도 없고 고구마를 심을 반무(半畝)의 땅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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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아 그는 빈한한 유생으로 실학을 연구한 학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학포헌집』에 편입되어 있는 송엽구황설(松葉救荒說)의 내용으로 보아 어떤 연유로든 중국을 한번 다녀온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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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저방』이나 『학포헌집』에 편입된 그의 저종생건변혹설(藷種生乾辨惑說)·저농해혹설(藷農解惑說)·북도종저설(北道種藷說)·송엽구황설·구황설(救荒說) 등으로 미루어 그는 실학을 연구하되 주로 식량문제 해결에 중점을 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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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실학자로서의 탁월한 업적은 무엇보다도 구황작물인 고구마재배에 관한 『종저방』을 저술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감저경장설(甘藷耕藏說)』도 1813년 그가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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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책의 내용 중 신종민(申鍾敏)이 1830년 북저(北藷: 감자)를 도입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감저경장설』을 그의 저술로 믿기에는 연대상으로 맞지 않는다. 다만, 『감저경장설』의 내용이 『종저방』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감저경장설』은 『종저방』을 모본으로 후일 누군가 증보가필한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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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저방』은 순한문 필사본으로 고구마의 명칭과 외형, 성상·성미(性味)·경지(耕地)·종식(種植)·옹절(壅節)·전경(剪莖)·단별근묘(斷別根苗)·수만(收蔓)·장종(藏種)·구장종(久藏種)·제승(諸勝)·총론 등의 순으로 풀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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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풀이된 내용은 종래의 고구마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을 체계적으로 종합정리하였다. 파종시기와 종저소요량, 파종시기와 수량, 종저의 선택과 시기 및 착생부위 등에 걸치고 있는데, 참으로 놀라운 과학적 풀이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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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선조에서 광해군 때에 걸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1633년(인조 11) 비변사에서 고구마 보급에 노력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 종래 고구마 도입은 1763년 조엄(趙曮)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오는 길에 대마도(對馬島)에서 가져온 것이 최초의 도입이라는 설도 반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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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종저방』을 저술하면서 『가장소록(家藏所錄)』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자기 선대에 이미 고구마연구에 관련이 있었던 가문인 것 같다. 1814년 정부에서 이 책을 인간하여 전국 열읍에 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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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록 현직(顯職)에 오른 사대부는 아닐지라도 과학자다운 안목을 가지고 고구마재배의 체계적인 종합정리, 그리고 재배기술의 전국적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2022년 8월 19일 (금) 20:35 판

서경창(徐慶昌)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실학자.


1813년『종저방(種藷方)』을 저술하였고 그의 시문(詩文)과 실학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학포헌집(學圃軒集)』을 저술하였다. 천수경(千壽慶)이 쓴 『학포헌집』의 서문을 보면, 서경창은 지위도 없고 고구마를 심을 반무(半畝)의 땅도 없었다고 한다.


이를 보아 그는 빈한한 유생으로 실학을 연구한 학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학포헌집』에 편입되어 있는 송엽구황설(松葉救荒說)의 내용으로 보아 어떤 연유로든 중국을 한번 다녀온 것으로 추정된다.

『종저방』이나 『학포헌집』에 편입된 그의 저종생건변혹설(藷種生乾辨惑說)·저농해혹설(藷農解惑說)·북도종저설(北道種藷說)·송엽구황설·구황설(救荒說) 등으로 미루어 그는 실학을 연구하되 주로 식량문제 해결에 중점을 둔 것 같다.

그의 실학자로서의 탁월한 업적은 무엇보다도 구황작물인 고구마재배에 관한 『종저방』을 저술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감저경장설(甘藷耕藏說)』도 1813년 그가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 중 신종민(申鍾敏)이 1830년 북저(北藷: 감자)를 도입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감저경장설』을 그의 저술로 믿기에는 연대상으로 맞지 않는다. 다만, 『감저경장설』의 내용이 『종저방』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감저경장설』은 『종저방』을 모본으로 후일 누군가 증보가필한 것으로 믿어진다.

『종저방』은 순한문 필사본으로 고구마의 명칭과 외형, 성상·성미(性味)·경지(耕地)·종식(種植)·옹절(壅節)·전경(剪莖)·단별근묘(斷別根苗)·수만(收蔓)·장종(藏種)·구장종(久藏種)·제승(諸勝)·총론 등의 순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와 같이 풀이된 내용은 종래의 고구마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을 체계적으로 종합정리하였다. 파종시기와 종저소요량, 파종시기와 수량, 종저의 선택과 시기 및 착생부위 등에 걸치고 있는데, 참으로 놀라운 과학적 풀이로 평가된다.

또,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선조에서 광해군 때에 걸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1633년(인조 11) 비변사에서 고구마 보급에 노력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 종래 고구마 도입은 1763년 조엄(趙曮)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오는 길에 대마도(對馬島)에서 가져온 것이 최초의 도입이라는 설도 반증하고 있다.

그가 『종저방』을 저술하면서 『가장소록(家藏所錄)』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자기 선대에 이미 고구마연구에 관련이 있었던 가문인 것 같다. 1814년 정부에서 이 책을 인간하여 전국 열읍에 반포하였다.

그는 비록 현직(顯職)에 오른 사대부는 아닐지라도 과학자다운 안목을 가지고 고구마재배의 체계적인 종합정리, 그리고 재배기술의 전국적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