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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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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원 아들 서계철 항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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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였던 이유, 그 분석과 비판을 주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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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는 당시 진주성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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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진주성 전투의 마지막...진주성이 함락되던 그 날, 힘없는 백성들은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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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참히 살해 당하고, 대항하다가 살해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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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녀자들과 다른 백성들도 일본군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본군 손에 죽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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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죽으려고 남강에 투신해서 죽은 이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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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어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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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희생된 내용에 대해 우리와 일본측에서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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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 기록 회본태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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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측 기록에는 보통 6~7만. 많게는 8만, 작게는 3만 정도의 숫자가 언급되고 있으며, 일본측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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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코기(太閤記) 등의 기록에 따르자면 그들이 언급한 일본군이 살해한 조선인의 수가 1만5천3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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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떨어지거나 강에 빠져 죽은 조선인의 수가 2만 5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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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약 4만이 죽었다고 하고 있어서 우리와 진주성에서 죽은 민관군의 수와 관련해서 엇갈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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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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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님, 그러나..확실한 것은 그 숫자가 얼마냐 이것이 중요한게 아니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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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명백한 보복성격의 전쟁 범죄 행위에 의해 수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무고한 백성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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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을 당했다는 그 사실 자체는 명백하고,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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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측 기록의 6~7만, 많게는 8만이란 숫자는 전투 당시 진주성에 있던 군민 모두를 합친 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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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되는데..성이 함락되며 하루 종일 살육이 벌어졌고, 모조리 죽고 흩어져서 그렇게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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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군민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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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아비규환(阿鼻叫喚)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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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기록이 여럿 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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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시신 더미에 묻혀 숨어서, 강물에 뛰어들어서..그렇게 생지옥을 벗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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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생존자들이 소수지만, 여럿 있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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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에 의해 정확하진 않아도 진주성의 마지막 날을 증언한 내용도 일부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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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에서 등장한 충청도 보령출신 정로위 인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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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님, 일본군은 진주성 함락 후..진주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리며 철저히 파괴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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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넘어 주위 사천, 고성, 산청 등 지리산 등지까지 쳐들어가 흩어져서 살육과 파괴,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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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등 경상우도 지역 곳곳을 휘저으며 초토화(焦土化)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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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님, 그 아비규환 속 진주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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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세상 억울할 사람이 한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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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등에서 무능하고 비겁했다고, 진주성 함락의 원흉처럼 지목된 진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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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원(徐禮元, 1548~1593)장군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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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속의 그 기록들이 과장 또는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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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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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사 서예원 장군과 대척점에 서서 대립했던 분이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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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분은 당파가 다르죠. 당파색을 보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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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진주성에 들어온 의병들의 수장이라고 하나..진주성 본주군을 이끌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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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 임명된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의 상급자라 볼 수 없을 뿐더러, 그가 진주목사를 무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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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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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명백한 월권이고, 권한남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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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사 서예원 장군도 진주성 본주군의 수장으로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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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구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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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에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창의사 김천일 선생과 그 의병대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던 기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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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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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이들의 대립 그 자체도 실상 이상으로 과장되고,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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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의 생존자 충청도군의 군관이었다는 정로위 인발의 발언에 이런 증언은 없었다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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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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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내의 병력에 비해 장수가 너무 많고, 지휘권이 확립되지 않아 혼란이 있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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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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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을 무시하고 대립했다고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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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7년전쟁 개전 초, 김해부사로 있던 서예원 장군이 패하여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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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패전지장(敗戰之將)이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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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쳐도..의병의 수장인 그가 진주성 전투의 주력군인 본주군을 이끄는 서예원 장군을 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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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김시민 장군이었다면..절대 용납치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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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그랬다면 김시민 장군은 정말 칼을 빼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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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서예원 장군은 김해부사로 김해성에서 싸우다 패하고 도주한 것은 맞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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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기도 전에 적전도주한 것이 아니라, 맞서 싸웠고, 두세번 막아내었지만, 일본군이 끝내 성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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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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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초계군수 이유검이 성문을 열고 도주하여 그 성문으로 적이 난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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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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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가 도주한 초계군수 이유검을 잡는다고 했지만, 김해성이 함락되고 완전히 전세가 기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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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성을 이탈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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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패전으로 초계군수 이유검은 참수되고, 김해부사 서예원 장군은 백의종군 처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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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지장이 맞습니다만, 그는 백의종군했고..또 의병장 송암 김면 선생이 이끌던 의병부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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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장이 되어 각지에서 싸웠습니다.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그렇게 앞선 패전의 죄를 씻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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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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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집을 보면..학봉 김성일 선생도 김시민 장군 만큼은 아니겠지만, 서예원 장군의 능력을 어느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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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했습니다. 경상우도 3대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부대의 핵심인 중위장으로 활약했던 경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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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집에서 말하는 평가를 보면 그가 정말 실록에 나오는 그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 같지도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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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장수가 맞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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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서예원 장군이 전임 목사였던 김시민 장군에 비해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백성과 군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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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으로 따르는 그런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게 현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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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따라다니는 패전지장의 꼬리표, 또 전쟁나면 도망하겠지 이런 식의 불신의 눈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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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將帥)된 자로 이는 큰 결점이죠. 그 누구보다 서예원 장군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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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원 장군은 김시민 장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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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있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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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고 아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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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원 장군은 최전방, 가장 위험한 전장인 진주성으로 가족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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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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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원 장군이 그의 꼬리표, 그를 향한 불신의 눈초리를 잘 알기에,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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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각을 불식하고..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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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함락되고..서예원 장군의 최후에도 별별 설(說)이 다 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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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또 비겁하게 숨어 있다가 잡혀서 목이 잘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싸우다가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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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었는지 남강에 뛰어들어 탈출하다가 잡혀 죽었다고도 하고..어떤 이는 적에게 돌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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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다가 죽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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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예원 장군은 진주성에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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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목은 일본에서 기다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습니다.

2022년 8월 19일 (금) 20:58 판

의병장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서예원 아들 서계철 항전

우리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였던 이유, 그 분석과 비판을 주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당시 진주성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마지막...진주성이 함락되던 그 날, 힘없는 백성들은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무참히 살해 당하고, 대항하다가 살해 당했습니다.

또 아녀자들과 다른 백성들도 일본군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본군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으려고 남강에 투신해서 죽은 이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광기어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고,

그렇게 희생된 내용에 대해 우리와 일본측에서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측 기록 회본태합기

우리측 기록에는 보통 6~7만. 많게는 8만, 작게는 3만 정도의 숫자가 언급되고 있으며, 일본측 기록

다이코기(太閤記) 등의 기록에 따르자면 그들이 언급한 일본군이 살해한 조선인의 수가 1만5천3백.

절벽에 떨어지거나 강에 빠져 죽은 조선인의 수가 2만 5천 정도..

그러니까 약 4만이 죽었다고 하고 있어서 우리와 진주성에서 죽은 민관군의 수와 관련해서 엇갈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웃님, 그러나..확실한 것은 그 숫자가 얼마냐 이것이 중요한게 아니란 겁니다.

일본군의 명백한 보복성격의 전쟁 범죄 행위에 의해 수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무고한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사실 자체는 명백하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측 기록의 6~7만, 많게는 8만이란 숫자는 전투 당시 진주성에 있던 군민 모두를 합친 수라고

생각되는데..성이 함락되며 하루 종일 살육이 벌어졌고, 모조리 죽고 흩어져서 그렇게 언급되었다

보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군민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그 아비규환(阿鼻叫喚)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여럿 보이거든요.

성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시신 더미에 묻혀 숨어서, 강물에 뛰어들어서..그렇게 생지옥을 벗어난

기적의 생존자들이 소수지만, 여럿 있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정확하진 않아도 진주성의 마지막 날을 증언한 내용도 일부 남았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등장한 충청도 보령출신 정로위 인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웃님, 일본군은 진주성 함락 후..진주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리며 철저히 파괴했으며..

진주를 넘어 주위 사천, 고성, 산청 등 지리산 등지까지 쳐들어가 흩어져서 살육과 파괴, 그리고

납치 등 경상우도 지역 곳곳을 휘저으며 초토화(焦土化)시켰습니다.

이웃님, 그 아비규환 속 진주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먼저..세상 억울할 사람이 한분 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등에서 무능하고 비겁했다고, 진주성 함락의 원흉처럼 지목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1548~1593)장군이 되겠죠.

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속의 그 기록들이 과장 또는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봅니다.

왜냐고요?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과 대척점에 서서 대립했던 분이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었습니다.

이 두분은 당파가 다르죠. 당파색을 보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입니다.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진주성에 들어온 의병들의 수장이라고 하나..진주성 본주군을 이끌고 있고,

조정에서 임명된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의 상급자라 볼 수 없을 뿐더러, 그가 진주목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명백한 월권이고, 권한남용이죠.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도 진주성 본주군의 수장으로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매번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구도가 됩니다.

징비록에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창의사 김천일 선생과 그 의병대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던 기록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이들의 대립 그 자체도 실상 이상으로 과장되고,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진주성 전투의 생존자 충청도군의 군관이었다는 정로위 인발의 발언에 이런 증언은 없었다는 것으로

봐서는요.

하지만, 성내의 병력에 비해 장수가 너무 많고, 지휘권이 확립되지 않아 혼란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을 무시하고 대립했다고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동아시아 7년전쟁 개전 초, 김해부사로 있던 서예원 장군이 패하여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패전지장(敗戰之將)이란 말이죠.

그렇다쳐도..의병의 수장인 그가 진주성 전투의 주력군인 본주군을 이끄는 서예원 장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김시민 장군이었다면..절대 용납치 않았을 겁니다.

그에게 그랬다면 김시민 장군은 정말 칼을 빼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예원 장군은 김해부사로 김해성에서 싸우다 패하고 도주한 것은 맞는데..

싸우기도 전에 적전도주한 것이 아니라, 맞서 싸웠고, 두세번 막아내었지만, 일본군이 끝내 성벽을

타고 넘어 왔습니다.

그러자 초계군수 이유검이 성문을 열고 도주하여 그 성문으로 적이 난입했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핑계가 도주한 초계군수 이유검을 잡는다고 했지만, 김해성이 함락되고 완전히 전세가 기울어

돌이킬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성을 이탈한 겁니다.

이 패전으로 초계군수 이유검은 참수되고, 김해부사 서예원 장군은 백의종군 처분됩니다.

패전지장이 맞습니다만, 그는 백의종군했고..또 의병장 송암 김면 선생이 이끌던 의병부대의

중위장이 되어 각지에서 싸웠습니다.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그렇게 앞선 패전의 죄를 씻었지요.

그리고 진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고요.

학봉집을 보면..학봉 김성일 선생도 김시민 장군 만큼은 아니겠지만, 서예원 장군의 능력을 어느정도

인정했습니다. 경상우도 3대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부대의 핵심인 중위장으로 활약했던 경력과

학봉집에서 말하는 평가를 보면 그가 정말 실록에 나오는 그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 같지도 않은..

그런 장수가 맞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네요.

물론..서예원 장군이 전임 목사였던 김시민 장군에 비해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백성과 군사들이

절대적으로 따르는 그런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게 현실이고요.

그를 따라다니는 패전지장의 꼬리표, 또 전쟁나면 도망하겠지 이런 식의 불신의 눈초리..

장수(將帥)된 자로 이는 큰 결점이죠. 그 누구보다 서예원 장군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서예원 장군은 김시민 장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그렇게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있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고 아냐고요?

서예원 장군은 최전방, 가장 위험한 전장인 진주성으로 가족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왜 일까요.

서예원 장군이 그의 꼬리표, 그를 향한 불신의 눈초리를 잘 알기에,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서

그런 시각을 불식하고..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이 함락되고..서예원 장군의 최후에도 별별 설(說)이 다 돌았습니다.

어떤 이는 또 비겁하게 숨어 있다가 잡혀서 목이 잘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싸우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남강에 뛰어들어 탈출하다가 잡혀 죽었다고도 하고..어떤 이는 적에게 돌진해서

싸우다가 죽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예원 장군은 진주성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은 일본에서 기다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