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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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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순조 13)에 [[홍주]][[목사]](牧使)를 지내고 사후 [[증직|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서호순(徐灝淳)과 [[판서]] [[이노익]]의 딸 덕수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영조|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친정아버지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후손으로,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서용보]]는 그의 종조부이다. 아버지 서호순은 본래 서응보의 아들이었으나 큰아버지인 [[증직|증]] [[이조]][[참판]] 서구보(徐龜輔)의 양자가 되었다. 외할아버지 [[이노익]]은 [[판서]]였고, 외증조부 문익공 [[이병모]]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냈다. 또한 어머니 덕수이씨의 외할아버지인 정간공(貞簡公) [[심풍오]](沈豊五) 역시 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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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순조 13)에 [[홍주]][[목사]](牧使)를 지내고 사후 [[증직|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서호순(徐灝淳)과 [[판서]] [[이노익]]의 딸 덕수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영조|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친정아버지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후손으로,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서용보]]는 그의 종조부이다. 아버지 [[서호순]]은 본래 [[서응보]]의 아들이었으나 큰아버지인 [[증직|증]] [[이조]][[참판]] [[서구보]](徐龜輔)의 양자가 되었다. 외할아버지 [[이노익]]은 [[판서]]였고, 외증조부 문익공 [[이병모]]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냈다. 또한 어머니 덕수이씨의 외할아버지인 정간공(貞簡公) [[심풍오]](沈豊五) 역시 판서를 지냈다.
  
 
[[1834년]](순조 34년) 증광과 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48년]](헌종 14년) [[응제]]에 합격하여 바로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 해의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852년]](철종 3년) [[홍문관]]응교 등을 삼사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사과 등을 역임하고 [[1859년]](철종 10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862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그는 자신의 사재로 전라도내 낡은 병선을 수리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며, 세금을 경감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유임되었다가, 다시 유임되어 임기가 2번이나 연장되었다. 1870년(고종 7)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그해 겨울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873년]] 형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1874년(고종11)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다시 한성판윤을 중임하고 다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최종 관직은 지경연춘추관사 겸 동지성균관사에 이르렀다.
 
[[1834년]](순조 34년) 증광과 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48년]](헌종 14년) [[응제]]에 합격하여 바로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 해의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852년]](철종 3년) [[홍문관]]응교 등을 삼사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사과 등을 역임하고 [[1859년]](철종 10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862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그는 자신의 사재로 전라도내 낡은 병선을 수리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며, 세금을 경감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유임되었다가, 다시 유임되어 임기가 2번이나 연장되었다. 1870년(고종 7)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그해 겨울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873년]] 형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1874년(고종11)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다시 한성판윤을 중임하고 다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최종 관직은 지경연춘추관사 겸 동지성균관사에 이르렀다.

2022년 8월 10일 (수) 17:45 판

서상정(徐相鼎, 1813년 8월 23일 ~ 1876년 7월 1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의정부영의정 심재 서용보의 종손이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파 서광범의 삼종조부, 서재필의 종증조부뻘 되는 친척이기도 하다. 자(字)는 이응(而凝)이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1848년(헌종 14년) 응제에 합격하여 바로 직부전시의 자격이 부여되고, 그 해의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자헌대부 지경연춘추관사 겸 동지성균관사에 이르렀다. 지방관으로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두 번이나 연임되었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생애

1813년(순조 13)에 홍주목사(牧使)를 지내고 사후 이조판서추증된 서호순(徐灝淳)과 판서 이노익의 딸 덕수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친정아버지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후손으로,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서용보는 그의 종조부이다. 아버지 서호순은 본래 서응보의 아들이었으나 큰아버지인 이조참판 서구보(徐龜輔)의 양자가 되었다. 외할아버지 이노익판서였고, 외증조부 문익공 이병모의정부영의정을 지냈다. 또한 어머니 덕수이씨의 외할아버지인 정간공(貞簡公) 심풍오(沈豊五) 역시 판서를 지냈다.

1834년(순조 34년) 증광과 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48년(헌종 14년) 응제에 합격하여 바로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 해의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852년(철종 3년) 홍문관응교 등을 삼사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사과 등을 역임하고 1859년(철종 10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862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그는 자신의 사재로 전라도내 낡은 병선을 수리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며, 세금을 경감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유임되었다가, 다시 유임되어 임기가 2번이나 연장되었다. 1870년(고종 7)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그해 겨울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873년 형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1874년(고종11)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다시 한성판윤을 중임하고 다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최종 관직은 지경연춘추관사 겸 동지성균관사에 이르렀다.

1876년(고종13) 7월 13일에 사망하였으며, 음죽 현내면 추동(楸洞) 산 계좌에 안장되었다. 사후 갑신정변에 그의 가까운 친척인 서광범, 서재필 등이 가담했으므로, 그의 아들과 손자는 각각 항렬자를 바꾸어 병익(丙翼), 정직(廷稙)으로 이름자를 고쳤다.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