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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扶餘善光''' (?~693년) [목차] == 개요 == 백제의 왕족으로 의자왕의 아들. 혹은 부여풍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구당서》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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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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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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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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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생애 ==
 
== 생애 ==

2022년 8월 29일 (월) 17:42 판

扶餘善光 (?~693년)

[목차]

개요

백제의 왕족으로 의자왕의 아들. 혹은 부여풍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구당서》에 기록된 부여용(扶餘勇)과는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생애

《속일본기》에 따르면 631년 부여풍이 질자로 보내질 때 함께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여풍이 귀실복신 등의 추대로 백제로 돌아간 것과는 달리 부여선광은 그대로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부여풍과 함께 백제로 간 부여충승 · 부여충지 형제는 백촌강 전투 패배 후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다만 백제 부흥 운동에 아예 참여를 안한 것은 아니고, 유인원이 664년 10월 당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 의하면 부여풍과 함께 각각 고구려와 일본에서 위험인물로 간주된 듯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4년 3월 천황의 배려로 나니와(현 오사카) 지역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앞서 663년 백강 전투 패배로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한 직후이므로 더 이상 돌아갈 백제가 없으니 이 때부터 사실상 일본에 영구 정착하도록 배려한 듯 하다.

676년 일본 조정에 진귀한 물품을 바쳤으며, 686년 덴무 천황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후 지토 천황으로부터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를 하사받았다. '코니키시'는 바로 건길지로, 일본어가 아니고 백제어를 음차한 것이다. 따라서 쿠다라노코니키시씨는 '백제건길지'씨를 일본어로 읽은 것이 된다. 일본이 지원하고 백제인이 세운 백제왕 부여풍은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고구려로 망명했으므로[* 부여풍은 668년 고구려 멸망 후 결국 당나라에 잡혀서 중국 내륙으로 유배된다.] 일본 쪽에서는 일본에 남은 왕족 부여선광을 백제 구왕실의 후계자로 간주한 듯 하다. 생전 관직은 종3위 정광사에 이르렀다. 693년에 사망하고 사후 정3위 관위와 조위품이 내려졌다. 다만, 691년 '여선광(餘禪廣)'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쿠다라노코니키시씨 하사는 죽기 얼마 전에 이뤄진 걸로 보이며, 그 이전까진 부여씨를 계속 사용했던 듯하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 하사 전에도 백제왕 선광으로도 기록되어 있거나 아예 선광왕(善光王)이라 불린 걸 볼 때 도일한 백제 유민들의 대표로 내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후손

아들 창성(昌成), 손자 낭우(郎虞), 증손자 경복(敬福) 등 여러 후손들이 기록에 남아있다. 창성의 경우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도일했으나, 675년 아버지보다도 일찍 죽었다. 반면 손자 양우는 737년까지 살았고, 증손자 경복도 69세로(698~766) 상당히 장수했다. 이후 경복의 자손들은 천황가와 혼인하면서 관계를 맺었는데, 특히 경복의 현손녀 경명(慶命)은 사가 덴노와 혼인하여 815년 아들 미나모토노 사다무(源定)를 낳았고, 그의 증손녀 치카코(源周子)가 다이고 덴노와 혼인하여 914년 아들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源高明)를 낳았으며, 그의 딸 아키코(源明子)의 외손자 아키후사(源顕房)가 현 천황의 직계 조상인 호리카와 덴노의 외조부이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가 거처했던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는 그의 신주를 모신 쿠다라노코니키시신사(百濟王神社)가 창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