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기업의 탄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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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_기획_기업의탄생_포스코2.jpg| ②1970년 4월-영일만에 제철소를 세우다<ref>"[http://blog.posco.com/395 포스코의 45년 히스토리, 들어보실래요?]", 포스코 소식/기업소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hellp,posco』<sup>online</sup></online></html>, 포스코 기업 블로그.</ref>
 
파일:민족기록화_기획_기업의탄생_포스코2.jpg| ②1970년 4월-영일만에 제철소를 세우다<ref>"[http://blog.posco.com/395 포스코의 45년 히스토리, 들어보실래요?]", 포스코 소식/기업소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hellp,posco』<sup>online</sup></online></html>, 포스코 기업 블로그.</ref>
 
파일:오승우-포항종합제철-1973s.jpg| ③ 1973년 6월 9일-첫 쇳물을 토해내다
 
파일:오승우-포항종합제철-1973s.jpg| ③ 1973년 6월 9일-첫 쇳물을 토해내다
파일:민족기록화_기획_기업의탄생_포스코3.jpg| ④1987년 5월 7일-[[광양제철소]]를 세우다<ref>"[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49319526 광양제철 제1기 준공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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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_기획_기업의탄생_포스코3.jpg| ④1987년 5월 7일-[[포스코 광양제철소]]를 세우다<ref>"[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49319526 광양제철 제1기 준공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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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 목표로 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를 내세웠다.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기초산업으로 철강 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사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후 미국, 프랑스,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4개국의 8개사가 참여한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 발족되었다.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고 그해 9월 [[박태준]]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종합제철|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 인력 39명과 함께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 3층에서 창업식을 개최하였다.<ref>황은주,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pohangJecheol.do 포항제철]", 산업·경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1.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 목표로 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를 내세웠다.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기초산업으로 철강 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사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후 미국, 프랑스,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4개국의 8개사가 참여한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 발족되었다.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고 그해 9월 [[박태준]]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종합제철|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 인력 39명과 함께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 3층에서 창업식을 개최하였다.<ref>황은주,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pohangJecheol.do 포항제철]", 산업·경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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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포항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현장사무소의 별칭은 롬멜하우스였다. 황무지에 모래바람을 맞으며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현장사무소의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우리나라 철강인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롬멜하우스는 포스코 자산목록 제1호로 지정돼 지금도 [[포스코 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ref>황은주,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pohangJecheol.do 포항제철]", 산업·경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2.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포항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현장사무소의 별칭은 롬멜하우스였다. 황무지에 모래바람을 맞으며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현장사무소의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우리나라 철강인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롬멜하우스는 포스코 자산목록 제1호로 지정돼 지금도 [[포스코 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ref>황은주,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pohangJecheol.do 포항제철]", 산업·경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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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73년 6월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제1고로는 첫 쇳물을 토해냈다. 이어 같은 해 7월 3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었다.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가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로 전환하였다. 1기를 시작으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1976년 5월 조강연산(가공되지 않고 제조된 그대로의 강철이 한 해 동안 생산된 양) 260만 톤의 2기 제철소, 1978년 12월 조강연산 550만 톤의 3기 제철소, 1981년 2월 조강연산 850만 톤의 4기 [[포스코 포항제철소]]를 준공하였다.<ref>황은주,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pohangJecheol.do 포항제철]", 산업·경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오승우-포항종합제철]]』은 이 시기의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모습을 담아냈다.<br/>
 
3. 1973년 6월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제1고로는 첫 쇳물을 토해냈다. 이어 같은 해 7월 3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었다.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가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로 전환하였다. 1기를 시작으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1976년 5월 조강연산(가공되지 않고 제조된 그대로의 강철이 한 해 동안 생산된 양) 260만 톤의 2기 제철소, 1978년 12월 조강연산 550만 톤의 3기 제철소, 1981년 2월 조강연산 850만 톤의 4기 [[포스코 포항제철소]]를 준공하였다.<ref>황은주,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pohangJecheol.do 포항제철]", 산업·경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ref> 『[[오승우-포항종합제철]]』은 이 시기의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모습을 담아냈다.<br/>
 
4. 1985년 12월 5일 [[포스코 광양제출소]] 건설에 착공하여 1987년 5월 7일 [[포스코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되었다. 1992년 10월 2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및 [[포스코 광양제출소]] 조강 연산 2,080만 톤 규모의 종합 준공으로 대역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철강산업이 우리나라의 기반산업으로 본격 발달하기 시작하였다.<ref>이창운,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1646&pageFlag= 포항종합제철 준공]", 산업/중소기업,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가기록원』<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6년 12월 1일.</ref>
 
4. 1985년 12월 5일 [[포스코 광양제출소]] 건설에 착공하여 1987년 5월 7일 [[포스코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되었다. 1992년 10월 2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및 [[포스코 광양제출소]] 조강 연산 2,080만 톤 규모의 종합 준공으로 대역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철강산업이 우리나라의 기반산업으로 본격 발달하기 시작하였다.<ref>이창운,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1646&pageFlag= 포항종합제철 준공]", 산업/중소기업,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가기록원』<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6년 12월 1일.</ref>
 
  
 
===「[[박창돈-금성사]]」로 살펴보는 [[LG그룹]]의 탄생, [[금성사]]===
 
===「[[박창돈-금성사]]」로 살펴보는 [[LG그룹]]의 탄생, [[금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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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_기획_기업의탄생_05.jpg| ⑦ 1966년 6월-[[아세테이트]] 원사 생산, 1968년 3월-[[폴리에스터]] 원사 생산<ref>SK에너지, "[http://blog.skenergy.com/822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html><online style="color:purple">『SK에너지』<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ref>
 
파일:민족기록화_기획_기업의탄생_05.jpg| ⑦ 1966년 6월-[[아세테이트]] 원사 생산, 1968년 3월-[[폴리에스터]] 원사 생산<ref>SK에너지, "[http://blog.skenergy.com/822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html><online style="color:purple">『SK에너지』<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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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경직물]]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SK그룹]]은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되었던 [[선경직물]] 공장부지를 매입한 1953년 4월 8일을 창립일로 정하여 기념해오고 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수원시 평동에 위치했던 공장부지에 돌과 자갈을 직접 나르고, 공장 내 고철을 팔아 첫 생산을 시작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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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경직물]]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SK그룹]]은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되었던 [[선경직물]] 공장부지를 매입한 1953년 4월 8일을 창립일로 정하여 기념해오고 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수원시 평동에 위치했던 공장부지에서 돌과 자갈을 직접 나르고, 공장 내 고철을 팔아 첫 생산을 시작하였다.<br/>
 
# 1955년에 들어서면서 국내 직물업계는 극심한 침체국면을 맞았으나 [[선경직물]]만은 제품이 창고에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선경직물]]의 인조견 '루스터'(Rooster; 장닭, 닭표)가 지누시(地主; 직물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물에 담갔다가 말리는 공정)를 하지 않고도 재단이 가능한 유일한 안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10월 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창경원에서 개최된 '해방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닭표' 인조견은 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그때까지 일부 수요자들 사이에서만 인기를 누려오던 닭표 안감은 부통령상 수상으로 전국적인 브랜드가 되었다.<ref>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0-31쪽.</ref><br/>
 
# 1955년에 들어서면서 국내 직물업계는 극심한 침체국면을 맞았으나 [[선경직물]]만은 제품이 창고에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선경직물]]의 인조견 '루스터'(Rooster; 장닭, 닭표)가 지누시(地主; 직물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물에 담갔다가 말리는 공정)를 하지 않고도 재단이 가능한 유일한 안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10월 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창경원에서 개최된 '해방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닭표' 인조견은 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그때까지 일부 수요자들 사이에서만 인기를 누려오던 닭표 안감은 부통령상 수상으로 전국적인 브랜드가 되었다.<ref>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0-31쪽.</ref><br/>
 
# 1958년 5월, 봉황새를 수놓은 이불감인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하자마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철야작업을 하며 시장의 수요를 맞추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 3개월 만에 웃돈이 붙어 거래됐다. 선경직물의 독점상품이었던 봉황새 이불감은 한동안 예비 신부가 꼭 준비해야 할 필수 혼수감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ref>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2-33쪽.</ref><br/>
 
# 1958년 5월, 봉황새를 수놓은 이불감인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하자마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철야작업을 하며 시장의 수요를 맞추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 3개월 만에 웃돈이 붙어 거래됐다. 선경직물의 독점상품이었던 봉황새 이불감은 한동안 예비 신부가 꼭 준비해야 할 필수 혼수감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ref>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2-33쪽.</ref><br/>
# 1958년 11월 외제 나일론 직물과 품질이 비슷한 나일론 직물 태피터(Taffeta; 실크나 인조 섬유의 필라멘트사로 짠 가느다란 가로 골이 있는 직물)의 생산에 성공했다. 그러나 한・일 간 외교 분쟁으로 1959년 6월 대일통상이 중단 되었고,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모든 경제활동이 일시에 위축되었다.<ref>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3쪽.</ref> 부채 증가라는 위기 속에서 [[선경직물]]은 정전기 발생이 문제를 해결한 폴리에스터 직물을 출시하여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ref>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4-3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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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11월 외제 나일론 직물과 품질이 비슷한 나일론 직물 태피터(Taffeta; 실크나 인조 섬유의 필라멘트사로 짠 가느다란 가로 골이 있는 직물)의 생산에 성공했다. 그러나 한・일 간 외교 분쟁으로 1959년 6월 대일통상이 중단되었고,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모든 경제활동이 일시에 위축되었다.<ref>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3쪽.</ref> 부채 증가라는 위기 속에서 [[선경직물]]은 정전기 발생 문제를 해결한 폴리에스터 직물을 출시하여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ref>김창근, 『[http://sk.co.kr/pdf/20130403_60_01.pdf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4-35쪽.</ref>
 
# 1962년 4월 국내 직물업계 최초로 홍콩에 [[레이온]] 10만 마를 수출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선경직물]]은 1962년 일년 동안 46,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박창돈-선경직물]]」 하단 오른쪽에 뉴욕으로 수출하기 위해 포장된 박스를 확인할 수 있어 작품 제작을 1962년 4월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 1962년 4월 국내 직물업계 최초로 홍콩에 [[레이온]] 10만 마를 수출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선경직물]]은 1962년 일년 동안 46,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박창돈-선경직물]]」 하단 오른쪽에 뉴욕으로 수출하기 위해 포장된 박스를 확인할 수 있어 작품 제작을 1962년 4월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 [[선경직물]]은 1964년에는 크레퐁(구불구불한 주름이 있는 직물) 생산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1965년에 통풍이 잘되는 '깔깔이'를 개발하였다.   
 
# [[선경직물]]은 1964년에는 크레퐁(구불구불한 주름이 있는 직물) 생산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1965년에 통풍이 잘되는 '깔깔이'를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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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오승우-포항종합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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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4일 (목) 14:16 기준 최신판

개요

민족기록화 경제편은 1970년대 초 기간산업에 의한 경제발전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경제편 제작에 참여한 작가들은 전국의 대표적인 산업시설을 답사하여 300호 크기의 대형작품을 그렸는데, 해당 작품들을 통해 지금은 국내의 유수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모체가 되어 준 산업현장을 살펴볼 수 있다.

내용

오승우-포항종합제철」로 살펴보는 포스코의 탄생, 포항종합제철

1.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 목표로 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를 내세웠다.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기초산업으로 철강 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사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후 미국, 프랑스,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4개국의 8개사가 참여한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 발족되었다.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고 그해 9월 박태준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 인력 39명과 함께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 3층에서 창업식을 개최하였다.[4]

포스코 역사관 가상 현실 보기 2. 1968년 제철소 건설 부지인 포항만에 자금 100만 원으로 지어졌던 현장사무소의 별칭은 롬멜하우스였다. 황무지에 모래바람을 맞으며 중장비들과 함께 들어선 현장사무소의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우리나라 철강인들의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롬멜하우스는 포스코 자산목록 제1호로 지정돼 지금도 포스코 역사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5]

3. 1973년 6월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제1고로는 첫 쇳물을 토해냈다. 이어 같은 해 7월 3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었다.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가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로 전환하였다. 1기를 시작으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1976년 5월 조강연산(가공되지 않고 제조된 그대로의 강철이 한 해 동안 생산된 양) 260만 톤의 2기 제철소, 1978년 12월 조강연산 550만 톤의 3기 제철소, 1981년 2월 조강연산 850만 톤의 4기 포스코 포항제철소를 준공하였다.[6]오승우-포항종합제철』은 이 시기의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모습을 담아냈다.
4. 1985년 12월 5일 포스코 광양제출소 건설에 착공하여 1987년 5월 7일 포스코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되었다. 1992년 10월 2일 포스코 포항제철소포스코 광양제출소 조강 연산 2,080만 톤 규모의 종합 준공으로 대역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철강산업이 우리나라의 기반산업으로 본격 발달하기 시작하였다.[7]

박창돈-금성사」로 살펴보는 LG그룹의 탄생, 금성사

  1. LG그룹의 역사는 1947년 LG그룹의 직접적인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와 1958년에 금성사(현 LG전자)의 설립에서 시작되었다. 금성사(金星社, Goldstar)는 1958년 10월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 공업 회사로 부산시 부산진구 연지동 341번지에 설립되었다.
  2. 1959년 국내 최초로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을 생산하였으며, 이듬해 196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선풍기를 생산하였을 뿐 아니라, 자동 전화기, 전화 교환기 등도 생산하였다.
  3. 1963년 9월 금성사 본사와 연지동 공장을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의 새 공장으로 이전하였고, 1964년 3월 온천동 종합 전자 기기 공장이 완공되어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박창돈-금성사」는 이 시기 금성사의 상품 생산 장면을 담고 있다.
  4. 196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냉장고인 금성 냉장고 GR-120을, 1966년 8월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흑백 TV 금성 텔레비전 VD-191를 생산하였다. 1968년에는 또한 에어컨을 대한민국 최초로 생산하였다. 국내 최초의 전산 전력계, EMD식 자동 전화 교환기, FM/AM 라디오, 펌프, 믹서, 세탁기, 전산기, 카세트 녹음기, 금전 등록기 등이 개발된 곳도 온천동 종합 전기 기기 공장이었다. 전자산업이 전무하던 시절에 설립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생산하는 제품이 많았다.


박창돈-선경직물」으로 살펴보는 SK그룹의 탄생, 선경직물

  1. 선경직물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SK그룹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되었던 선경직물 공장부지를 매입한 1953년 4월 8일을 창립일로 정하여 기념해오고 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수원시 평동에 위치했던 공장부지에서 돌과 자갈을 직접 나르고, 공장 내 고철을 팔아 첫 생산을 시작하였다.
  2. 1955년에 들어서면서 국내 직물업계는 극심한 침체국면을 맞았으나 선경직물만은 제품이 창고에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선경직물의 인조견 '루스터'(Rooster; 장닭, 닭표)가 지누시(地主; 직물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물에 담갔다가 말리는 공정)를 하지 않고도 재단이 가능한 유일한 안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10월 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창경원에서 개최된 '해방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닭표' 인조견은 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그때까지 일부 수요자들 사이에서만 인기를 누려오던 닭표 안감은 부통령상 수상으로 전국적인 브랜드가 되었다.[17]
  3. 1958년 5월, 봉황새를 수놓은 이불감인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하자마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철야작업을 하며 시장의 수요를 맞추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봉황새 이불감은 출시 3개월 만에 웃돈이 붙어 거래됐다. 선경직물의 독점상품이었던 봉황새 이불감은 한동안 예비 신부가 꼭 준비해야 할 필수 혼수감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18]
  4. 1958년 11월 외제 나일론 직물과 품질이 비슷한 나일론 직물 태피터(Taffeta; 실크나 인조 섬유의 필라멘트사로 짠 가느다란 가로 골이 있는 직물)의 생산에 성공했다. 그러나 한・일 간 외교 분쟁으로 1959년 6월 대일통상이 중단되었고,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모든 경제활동이 일시에 위축되었다.[19] 부채 증가라는 위기 속에서 선경직물은 정전기 발생 문제를 해결한 폴리에스터 직물을 출시하여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20]
  5. 1962년 4월 국내 직물업계 최초로 홍콩에 레이온 10만 마를 수출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선경직물은 1962년 일년 동안 46,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박창돈-선경직물」 하단 오른쪽에 뉴욕으로 수출하기 위해 포장된 박스를 확인할 수 있어 작품 제작을 1962년 4월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6. 선경직물은 1964년에는 크레퐁(구불구불한 주름이 있는 직물) 생산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1965년에 통풍이 잘되는 '깔깔이'를 개발하였다.
  7. 1968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준공, 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으로 대한민국 원사생산 48톤 중 26%를 담당하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문맥요소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기업의 탄생 오승우-포항종합제철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A dcterms:hasPart B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기업의 탄생 박창돈-금성사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A dcterms:hasPart B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기업의 탄생 박창돈-선경직물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A dcterms:hasPart B

주석

  1. "포스코의 45년 히스토리, 들어보실래요?", 포스코 소식/기업소식, 『hellp,posco』online, 포스코 기업 블로그.
  2. "포스코의 45년 히스토리, 들어보실래요?", 포스코 소식/기업소식, 『hellp,posco』online, 포스코 기업 블로그.
  3. "광양제철 제1기 준공식",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4. 황은주, "포항제철", 산업·경제,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online, 국가기록원.
  5. 황은주, "포항제철", 산업·경제,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online, 국가기록원.
  6. 황은주, "포항제철", 산업·경제,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online, 국가기록원.
  7. 이창운, "포항종합제철 준공", 산업/중소기업, 『국가기록원』online, 작성일: 2006년 12월 1일.
  8. 김현석, "금성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라디오로 수신하는 근대 (2)", 『파워라이터 ON』online, 네이버 지식백과.
  10. "부산 금성사 TV조립 광경", 『e영상역사관』online, 한국정책방송원.
  11.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SK네트웍스.
  12.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13.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14.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SK네트웍스.
  15. "SK네트웍스의 발자취", 『사이버역사관』online, SK네트웍스.
  16. SK에너지, "선경직물의 탄생과 성장", 『SK에너지』online, 작성일 : 2013년 08월 22일.
  17. 김창근,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0-31쪽.
  18. 김창근,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2-33쪽.
  19. 김창근,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3쪽.
  20. 김창근, 『SK 60년사 1953~2013』, SK, 2013, 34-35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유용한 정보

  1. 조익순, "에스케이그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조경식, "포스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포스코", 『doopedia』online, 두산백과.
  4. 이광수, "LG전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현석, "금성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LG전자", 기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더 읽을거리

  1. 단행본
    • 북모닝CEO편집팀, 『리더의 힘 거인의 탄생, 불멸의 한국리더: 최종건 회장편』, 북모닝CEO, 2016.
    • 서갑경, 『철강왕 박태준 - 경영이야기』, 한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