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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에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왕의 특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된 사신을 [[어사|어사(御史)]]라 하며, 그 중에서 고난을 당한 백성들을 위무하는 역할을 맡은 [[어사]]를 [[위유어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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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특명으로 고난을 당한 백성들을 위무하는 역할을 맡은 임시 관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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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어사]]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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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을 감독하는 관찰사===
[[어사]]는 고려시대부터 운영되었으나 본격적인 활용은 조선시대 부터이다. 조선은 8도제와 군현제를 통해 전국을 일원적인 행정 단위로 편성하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특히 고려시대에 사신을 파견해서 시행하던 많은 업무를 수령에게 이관했다. 그러나 이처럼 수령의 권한이 높아지자 수령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수령에 대한 관리 감독 체제의 필요도 높아졌다. 도에서 하는 모든 행정과 도내 수령의 감찰은 원칙적으로 [[관찰사]]의 임무였다. [[관찰사]]는 도내를 순행하며 모든 업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찰사]]는 임무가 많아 1년 내내 관하를 순행할 수가 없었다. 재임 중에 한 번도 들리지 못하는 군현도 있을 정도였다. 이에 정부는 따로 [[감찰관]]을 보내거나 전세(田稅) 수납, 양전(量田), 구휼 사업, 사신 접대와 같이 특별히 부정이 발생할 여지가 큰 사업,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 있을 때는 별도로 그것을 담당하는 사신을 파견해서 사업을 총괄하게 했다. 그런 사신으로 [[어사]], [[경차관|경차관(敬差官)]], [[대간|대간(臺諫)]]을 파견하는 [[행대|행대(行臺)]]·[[분대어사|분대(分臺)]] 등이 있었다. [[분대어사|분대]]는 [[분대어사]]라고도 불렀다. 16세기 이후로는 [[경차관]] 파견을 자제하고 [[어사]]를 많이 활용하였다. <ref>임용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4454 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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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8도제와 군현제를 통해 전국을 일원적인 행정 단위로 편성하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사신을 파견해서 시행하던 많은 업무를 수령에게 이관했다. 그러나 이처럼 수령의 권한이 높아지자 수령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수령에 대한 관리 감독 체제의 필요도 높아졌다. 도에서 하는 모든 행정과 도내 수령의 감찰은 원칙적으로 [[관찰사]]의 임무였다. [[관찰사]]는 도내를 순행하며 모든 업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찰사]]는 임무가 많아 1년 내내 관하를 순행할 수가 없었다. 재임 중에 한 번도 들리지 못하는 군현도 있을 정도였다.
  
===17-18세기 조선의 재해(災害)행정 처리와 [[위유어사]]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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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파견 사신, 어사===
17세기 이래 재해행정의 운영과 관련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대표적인 [[어사]]의 호칭은 [[감진어사|감진어사(監賑御史)]]였다. [[감진어사]]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조선 숙종|숙종 ]]대 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구황어사|구황어사(救荒御史)]], [[진구어사|진구어사(賑救御史)]]로 불리기도 했으나 [[진휼어사(賑恤御史)]]라는 이름이 가장 일반적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조선 영조|영조]] 연간부터는 그 이름에 '위유(慰諭)'(또는 안집(安集))가 붙는 경우가 많아졌고 [[안집겸감진어사|안집겸감진어사(安集兼監賑御史)]], [[안집겸위유어사|안집겸위유어사(安集兼慰諭御史)]], [[위유감진어사|위유감진어사(慰諭監賑御史)]],[[위유어사|위유어사(慰諭御史)]], [[위유사|위유사(慰諭使)]] 등의 다양한 명호가 등장한다. 또한 [[조선 정조|정조]] 연간에는 [[감진어사]]와 [[위유어사]] 명칭이 동시에 등장하였으나 [[위유어사]] 명칭이 더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다. 이들의 주요 역할은 재해지역을 순행(巡行)하며 기민을 위무(慰撫)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ref>원재영, 「17~18세기 재해행정과 御史의 역할」,『韓國文化』, Vol75, 2016, 237-24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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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부는 따로 [[감찰관]]을 보내거나 전세(田稅) 수납, 양전(量田), 구휼 사업, 사신 접대와 같이 특별히 부정이 발생할 여지가 큰 사업,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 있을 때는 별도로 그것을 담당하는 사신을 파견해서 사업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런 사신으로 [[어사]], [[경차관|경차관(敬差官)]], [[대간|대간(臺諫)]]을 파견하는 [[행대|행대(行臺)]]·[[분대어사|분대(分臺)]] 등이 있었다. [[분대어사|분대]]는 [[분대어사]]라고도 불렀다. 16세기 이후로는 [[경차관]] 파견을 자제하고 [[어사]]를 많이 활용하였다. <ref>임용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4454 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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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유어사]] 명칭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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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래 재해행정의 운영과 관련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대표적인 [[어사]]의 호칭은 [[감진어사|감진어사(監賑御史)]]였다.감진어사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숙종 대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구황어사|구황어사(救荒御史)]], [[진구어사|진구어사(賑救御史)]]로 불리기도 했으나 [[진휼어사(賑恤御史)]]라는 이름이 가장 일반적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조선 영조|영조]] 연간부터는 그 이름에 '위유(慰諭)'(또는 안집(安集))가 붙는 경우가 많아졌고 [[안집겸감진어사|안집겸감진어사(安集兼監賑御史)]], [[안집겸위유어사|안집겸위유어사(安集兼慰諭御史)]], [[위유감진어사|위유감진어사(慰諭監賑御史)]],[[위유어사|위유어사(慰諭御史)]], [[위유사|위유사(慰諭使)]] 등의 다양한 명호가 등장한다. [[조선 정조|정조]] 연간에는 [[위유어사]] 명칭이 더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다. 이들의 주요 역할은 재해지역을 순행(巡行)하며 기민을 위무(慰撫)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ref>원재영, 「17~18세기 재해행정과 御史의 역할」,『韓國文化』7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6, 237-24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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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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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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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영, 「17~18세기 재해행정과 御史의 역할」, 『韓國文化』7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6, 233-267쪽.  
**원재영, 「17~18세기 재해행정과 御史의 역할」, 『韓國文化』, Vol75, 2016, 233-267쪽.  
 
===유용한 정보===
 
 
*임용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4454 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임용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4454 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11월 22일 (수) 23:36 기준 최신판

위유어사
(慰諭御史)
대표명칭 위유어사
한자표기 慰諭御史
이칭 선유어사(宣諭御使)
유형 직역



정의

왕의 특명으로 고난을 당한 백성들을 위무하는 역할을 맡은 임시 관리이다.

내용

수령을 감독하는 관찰사

조선은 8도제와 군현제를 통해 전국을 일원적인 행정 단위로 편성하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사신을 파견해서 시행하던 많은 업무를 수령에게 이관했다. 그러나 이처럼 수령의 권한이 높아지자 수령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수령에 대한 관리 감독 체제의 필요도 높아졌다. 도에서 하는 모든 행정과 도내 수령의 감찰은 원칙적으로 관찰사의 임무였다. 관찰사는 도내를 순행하며 모든 업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찰사는 임무가 많아 1년 내내 관하를 순행할 수가 없었다. 재임 중에 한 번도 들리지 못하는 군현도 있을 정도였다.

특별 파견 사신, 어사

이에 정부는 따로 감찰관을 보내거나 전세(田稅) 수납, 양전(量田), 구휼 사업, 사신 접대와 같이 특별히 부정이 발생할 여지가 큰 사업,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 있을 때는 별도로 그것을 담당하는 사신을 파견해서 사업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런 사신으로 어사, 경차관(敬差官), 대간(臺諫)을 파견하는 행대(行臺)·분대(分臺) 등이 있었다. 분대분대어사라고도 불렀다. 16세기 이후로는 경차관 파견을 자제하고 어사를 많이 활용하였다. [1]

위유어사 명칭 변화

17세기 이래 재해행정의 운영과 관련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대표적인 어사의 호칭은 감진어사(監賑御史)였다.감진어사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숙종 대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구황어사(救荒御史), 진구어사(賑救御史)로 불리기도 했으나 진휼어사(賑恤御史)라는 이름이 가장 일반적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영조 연간부터는 그 이름에 '위유(慰諭)'(또는 안집(安集))가 붙는 경우가 많아졌고 안집겸감진어사(安集兼監賑御史), 안집겸위유어사(安集兼慰諭御史), 위유감진어사(慰諭監賑御史),위유어사(慰諭御史), 위유사(慰諭使) 등의 다양한 명호가 등장한다. 정조 연간에는 위유어사 명칭이 더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다. 이들의 주요 역할은 재해지역을 순행(巡行)하며 기민을 위무(慰撫)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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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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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어사 위유어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어사 분대어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어사 감진어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어사 구황어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어사 진구어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어사 진휼어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어사 안집겸감진어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어사 안집겸위유어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어사 관찰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어사 감찰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어사 경차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어사 행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세기 위유어사란 명칭이 등장했다

주석

  1. 임용한, "어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원재영, 「17~18세기 재해행정과 御史의 역할」,『韓國文化』7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6, 237-240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원재영, 「17~18세기 재해행정과 御史의 역할」, 『韓國文化』7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6, 233-267쪽.
  • 임용한, "어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