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승려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일요(日遙) |영문명칭= |한자= |생년=1580년 |몰년=1659년 |시호= |호= |휘= |법호= |법명= |탑호= |자= |이...) |
(→지식 관계망) |
||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6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기획기사보기| | ||
+ | |기획기사=[[일본 일요가 조선의 아버지에게]] | ||
+ | }} | ||
{{승려정보 | {{승려정보 | ||
− | |사진= | + | |사진=BHST_Ilyo.jpg |
− | |사진출처= | + | |사진출처=이재형,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9530 31. 일본 일요가 조선의 아버지에게]", 『법보신문』, 작성일: 2015년 11월 2일. |
− | |대표명칭=일요 | + | |대표명칭=일요 |
|영문명칭= | |영문명칭= | ||
− | |한자= | + | |한자=日遙 |
|생년=1580년 | |생년=1580년 | ||
|몰년=1659년 | |몰년=1659년 | ||
17번째 줄: | 20번째 줄: | ||
|성씨=여씨(余氏) | |성씨=여씨(余氏) | ||
|본관= | |본관= | ||
− | |속명=(余大男) | + | |속명=여대남(余大男) |
|출신지=하동 | |출신지=하동 | ||
|승탑= | |승탑= | ||
24번째 줄: | 27번째 줄: | ||
=='''정의'''== | =='''정의'''== | ||
− | 조선 | + | 조선 출신 일본의 승려. |
=='''내용'''== | =='''내용'''== | ||
+ | 일요(日遙)는 [[임진왜란]] 중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으로, 본명은 여대남(余大男)이다. 아버지는 여천갑(余天甲)이다. | ||
+ | |||
+ | 보현암(普賢菴)에서 공부를 하던 중 왜군 다카하시(高橋三九)에게 붙잡혀 왜장 [[가토 기요마사]] 앞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여대남이 써서 올린 당 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보고 범상치 | ||
+ | 않음을 느끼고 자기 곁에 두고 보살폈다.<ref>안영진, "[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080108000001532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중도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8년 1월 9일.</ref> | ||
+ | |||
+ | 그 후 여대남은 일본 히고(肥後) 지방으로 압송되어 승려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측근 중에는 [[일진|일진(日眞)]]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울산(蔚山)에서 평화를 의론한 인물이기도 했다. [[일진]]은 여대남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일본의 주요 불교강원인 교토(京都)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수학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ref>안영진, "[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080108000001532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중도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8년 1월 9일.</ref> | ||
+ | |||
+ | 이후 신연산(身延山) 구원사(久遠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하였다. 이 때 [[일진]]은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구마모토의 [[혼묘지|본묘사(本妙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1608년 일요(日繞)에게 주지직을 물려주고 은퇴를 하였으나, 2대 주지가 된 일요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1609년 일요가 3대 주지직을 계승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조선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고려상인(高麗上人), 고려요사(高麗謠師)라고 하며 존경을 했다고 한다.<ref>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22쪽.</ref> | ||
− | ==''' | + | 일요는 한 때 신변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다다히로(忠廣)에게 석방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편지왕래 조차 막혔다. 1659년 12월 16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혼묘지|본묘사]]에 그의 묘가 있다.<ref>안영진, "[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080108000001532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중도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8년 1월 9일.</ref> |
+ | |||
+ | =='''지식 관계망'''== | ||
+ | *'''사명대사 유정 지식관계망''' | ||
+ | <html> | ||
+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
+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
+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D031/monk_samyeong2.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
+ | </html> | ||
+ | |||
+ | ===관계정보===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 | |- | ||
+ | | [[일요]] || [[가토 기요마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
+ | |- | ||
+ | | [[일요]] || [[일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
+ | |- | ||
+ | | [[일요]] || [[혼묘지]]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
+ | |- | ||
+ | | [[일요]]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
+ | |- | ||
+ | | [[일진]] || [[일요]] || A는 B의 스승이다 || | ||
|} | |} | ||
− | ==''' | + | =='''주석'''== |
<references/> | <references/>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안영진, "[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080108000001532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html><online style="color:purple">『중도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08년 1월 9일. | |
+ | *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15-436쪽. | ||
{{승탑비문 Top icon}} | {{승탑비문 Top icon}} |
2017년 11월 24일 (금) 16:54 기준 최신판
특별기고: 일본 일요가 조선의 아버지에게 |
일요(日遙) | |
대표명칭 | 일요 |
---|---|
한자 | 日遙 |
생몰년 | 1580년-1659년 |
이칭 | 일요상인(日遙上人), 고려일요(高麗日遙), 고려상인(高麗上人) |
성씨 | 여씨(余氏) |
속명 | 여대남(余大男) |
출신지 | 하동 |
정의
조선 출신 일본의 승려.
내용
일요(日遙)는 임진왜란 중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으로, 본명은 여대남(余大男)이다. 아버지는 여천갑(余天甲)이다.
보현암(普賢菴)에서 공부를 하던 중 왜군 다카하시(高橋三九)에게 붙잡혀 왜장 가토 기요마사 앞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여대남이 써서 올린 당 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기 곁에 두고 보살폈다.[1]
그 후 여대남은 일본 히고(肥後) 지방으로 압송되어 승려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측근 중에는 일진(日眞)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울산(蔚山)에서 평화를 의론한 인물이기도 했다. 일진은 여대남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일본의 주요 불교강원인 교토(京都)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수학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
이후 신연산(身延山) 구원사(久遠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하였다. 이 때 일진은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구마모토의 본묘사(本妙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1608년 일요(日繞)에게 주지직을 물려주고 은퇴를 하였으나, 2대 주지가 된 일요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1609년 일요가 3대 주지직을 계승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조선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고려상인(高麗上人), 고려요사(高麗謠師)라고 하며 존경을 했다고 한다.[3]
일요는 한 때 신변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다다히로(忠廣)에게 석방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편지왕래 조차 막혔다. 1659년 12월 16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본묘사에 그의 묘가 있다.[4]
지식 관계망
- 사명대사 유정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일요 | 가토 기요마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일요 | 일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일요 | 혼묘지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일요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일진 | 일요 | A는 B의 스승이다 |
주석
- ↑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 작성일: 2008년 1월 9일. - ↑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 작성일: 2008년 1월 9일. - ↑ 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22쪽.
- ↑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 작성일: 2008년 1월 9일.
참고문헌
-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 작성일: 2008년 1월 9일. - 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15-4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