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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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2016 장서각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에서 [[윤음]]과 관련된 고문헌 5건이 소개되었다.<ref>뒤이어 나오는 '내용'과 '관련 항목'의 전시자료 5건으로서, 유형별로는 모두 고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내용은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는 계주윤음(戒酒綸音)과 백성을 위로하는 위유윤음(慰諭綸音), 마지막으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척사윤음(斥邪綸音) 이러한 3가지 형식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ref> 이같은 유형의 고문서는 당시 조선시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왕이 피지배층인 평민들에게 한글이라는 문자를 이용하여 소통 하려고 하였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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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장서각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에서 [[윤음]]과 관련된 고문헌 5건이 소개되었다.<ref>뒤이어 나오는 '내용'과 '관련 항목'의 전시자료 5건으로서, 유형별로는 모두 고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내용은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는 계주윤음(戒酒綸音)과 백성을 위로하는 위유윤음(慰諭綸音), 마지막으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척사윤음(斥邪綸音) 이러한 3가지 형식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ref> 이 같은 유형의 고문서는 당시 조선시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왕이 피지배층인 평민들과 한글이라는 문자를 이용하여 소통하려고 하였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
  
 
==내용==
 
==내용==
 
===[[윤음]]에 대해서===
 
===[[윤음]]에 대해서===
*[[윤음]]은 조선시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훈유(訓諭)성격의 문서이다. 그 대상은 중외의 관료로부터 민인(民人)에 이르는 온 국민, 또는 일정한 부류, 일정한 지역의 관원이나 민인 등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용 역시 다양한 형태로 쓰여지는데 양로(養老)·권농(勸農)·척사(斥邪)·포충(褒忠)·구휼(救恤)·독역(督役)·군포탕감(軍布蕩減)·계주(戒酒)·과폐이정(科弊釐正 :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음)·수성(守城)·반행(頒行 : 발행해 반포함) 등 여러가지가 있다.<ref>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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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음]]은 조선시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훈유(訓諭) 성격의 문서이다. 그 대상은 중외의 관료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는 온 국민일 때도 있고, 또는 일정한 부류, 일정한 지역의 관원이나 백성 등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용 역시 다양한 형태로 쓰이는데 양로(養老)·권농(勸農)·척사(斥邪)·포충(褒忠)·구휼(救恤)·독역(督役)·군포탕감(軍布蕩減)·계주(戒酒)·과폐이정(科弊釐正 :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음)·수성(守城)·반행(頒行 : 발행해 반포함) 등 여러 가지가 있다.<ref>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윤음]]은 대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는 것이므로 주자(鑄字)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양반관료만이 그 대상인 경우에는 한문으로 간인(刊印)반포하였다. 그리고 일반 민인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앞에 한문으로 된 [[윤음]]을 싣고 뒤에 언해한 것을 붙여 반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언해본만 따로 간행한 것도 있다. 국왕이 발급하는 문서의 대부분은 원문서 1통만을 필서해 주었다. 그러나 녹권(錄券)이나 [[윤음]]과 같이 부수를 많이 필요로 하는 문서는 간인해 펴낸 것이다. [[윤음]]의 서식은 대상과 내용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정한 정식(定式)은 없으나 기두(起頭)는 대개 다음과 같다.<ref>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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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음]]은 대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는 것이므로 주자(鑄字)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양반관료만이 그 대상인 경우에는 한문으로 간인(刊印)하여 반포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앞에 한문으로 된 [[윤음]]을 싣고 뒤에 언해를 붙여 반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언해본만 따로 간행한 것도 있다. 국왕이 발급하는 문서의 대부분은 원문서 한 통만을 필서해 주었다. 그러나 녹권(錄券)이나 [[윤음]]과 같이 부수를 많이 필요로 하는 문서는 간인해 펴낸 것이다. [[윤음]]의 서식은 대상과 내용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정한 정식(定式)은 없으나 기두(起頭)는 대개 다음과 같다.<ref>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御製諭某人等某事綸音(어제유모인등모사륜음)<br/>王若曰云云(왕약왈운운)<ref>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御製諭某人等某事綸音(어제유모인등모사륜음)<br/>王若曰云云(왕약왈운운)<ref>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윤음]]의 내용은 당시의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으므로 그 시대의 정치 및 사회경제 관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윤음]]에는 대개 언해본이 함께 붙어 있으므로 국어학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윤음]]은 많은 부수가 필요한 경우는 간행해 반포하기도 했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이 많다. 그 가운데 1797년(정조 21)에 반행한 『[[어제양로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의식향약조례윤음|어제양로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의식향약조례윤음(御製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儀式鄕約條例綸音)]]』과 1881년(고종 18)에 반행한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등척사윤음|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등척사윤음(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은 수십 책이 남아 있다.<ref>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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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음]]의 내용은 당시의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그 시대의 정치 및 사회경제 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윤음]]에는 대개 언해본이 함께 붙어 있으므로 국어학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윤음]]은 많은 부수가 필요한 경우는 간행해 반포해서 현존하는 것이 많다. 그 가운데 1797년(정조 21)에 반행한 『[[어제양로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의식향약조례윤음|어제양로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의식향약조례윤음(御製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儀式鄕約條例綸音)]]』과 1881년(고종 18)에 반행한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등척사윤음|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등척사윤음(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은 수십 책이 남아 있다.<ref>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2016 장서각 특별전에서 수록된 [[윤음]] 자료들의 특징과 의의===
 
===2016 장서각 특별전에서 수록된 [[윤음]] 자료들의 특징과 의의===
*[[윤음]]은 조선사회에서 최고통치자인 국왕이 일반 평민들에게 지배 계급의 생각과, 제도를 소통하려고 한 형태의 문서제도라는 것이다. 이런 문서제도는 한반도 역사상 고대나 중세에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제도이며,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 문자가 한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지배계급이 자신의 정책이나 사상을 일반 평민에게 전파시키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선 세종|세종대왕]]이후 한글이 점차 피지배계급까지 점차 스며들어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해 졌기 때문에, [[윤음]]의 효과는 매우 높았으며, [[조선 세종|세종]] 이후 국왕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서제도가 된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윤음]] 제도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또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소통하려고한 모습을 보이니, '한글'이 왜 소통과 배려의 문자인지 알려주게하는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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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음]]은 조선사회에서 최고통치자인 국왕이 일반 평민들에게 지배 계급의 생각과, 제도를 알리기 위한 문서제도이다. 이런 제도는 한반도 역사상 고대나 중세에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 문자는 한자였으므로 사실상 지배계급이 자신의 정책이나 사상을 일반 평민에게 전파시키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선 세종|세종대왕]] 이후 한글이 점차 피지배계급까지 스며들어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윤음]]의 효과는 매우 높았으며, [[조선 세종|세종]] 이후 국왕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서제도가 된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윤음]] 제도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과의 소통에 나설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한글'이 왜 소통과 배려의 문자인지 알려주는 자료인 것이다.
  
 
===[[어제계주윤음]]===
 
===[[어제계주윤음]]===
이 [[윤음]]은 [[조선 영조|영조]]가 1757년 11월에 내린 [[윤음]]에 한글 토를 달고 [[윤음]] 전문을 한글로 번역한 문서이다. 내용은 술을 경계하는 것으로 계주윤음 형식이다. [[조선 영조|영조]]는 관원들이 술을 삼가지 않는 것이나 백성들이 금주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불성실 때문이라고 자책하였으며 금주령의 법률을 고쳐 조사(朝士)가 금주령을 어길 경우에는 10년 금고, 유생이 어길 경우에는 10년 동안 과거 응시 정지, 서민과 천인은 10년 동안 종으로 삼되 술을 빚은 자나 마신 자 모두에게 같은 처벌을 적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윤음]]에서 관료들의 솔선수범을 강조하며, 술을 경계하여 백성의 모범이 되기를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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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윤음]]은 [[조선 영조|영조]]가 1757년 11월에 내린 [[윤음]]에 한글 토를 달고 [[윤음]] 전문을 한글로 번역한 문서로 술을 경계하라는 계주윤음이다. [[조선 영조|영조]]는 관원들이 술을 삼가지 않는 것이나 백성들이 금주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영조 자신의 불성실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금주령의 법률을 고쳐 조사(朝士)가 금주령을 어길 경우에는 10년 금고, 유생이 어길 경우에는 10년 동안 과거 응시 정지, 서민과 천인은 10년 동안 종으로 삼되 술을 빚은 자나 마신 자 모두에게 같은 처벌을 적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윤음]]에서 관료들의 솔선수범을 강조하며, 술을 경계하여 백성의 모범이 되기를 권하였다.
  
 
===[[어제경민음]]===
 
===[[어제경민음]]===
[[조선 영조|영조]]가 1762년 9월 12일 구술하여 쓰게 한 한글본 [[윤음]]이다. [[조선 영조|영조]]는 금주를 위하여 국가 제사에서조차 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1762년에는 금주(禁酒)를 강화했으나 역관들이 모여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이에 권극(權極)은 술을 마시는 것을 철저하게 막기 위해 금주령을 어긴 사람을 적발하는 대로 효시하자고 주장하였다. [[조선 영조|영조]]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금주령을 어긴 경우 효시한다는 내용을 담아서 이 [[윤음]]을 내리게 되었다. 이 [[윤음]]은 한자본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한글로 작성해 반포되었다. 이는 국가의 정책을 모든 백성이 쉽게 이해함으로써 법을 어기지 않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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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영조]]가 1762년 9월 12일 구술하여 쓰게 한 한글본 [[윤음]]이다. [[조선 영조|영조]]는 금주를 위하여 국가 제사에서조차 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1762년에는 금주(禁酒)를 강화했음에도 역관들이 모여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이에 권극(權極)은 술을 마시는 것을 철저하게 막기 위해 금주령을 어긴 사람을 적발하는 대로 효시하자고 주장하였다. [[조선 영조|영조]]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금주령을 어긴 경우 효시한다는 내용을 담아서 이 [[윤음]]을 내리게 되었다. 이 [[윤음]]은 한자본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글로 작성해 반포되었다. 이는 국가의 정책을 모든 백성이 쉽게 이해함으로써 법을 어기지 않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조선 정조|정조]]가 흉년으로 고통 받는 함경도 백성에게 내린 [[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함께 실려 있다. [[조선 정조|정조]]는 흉년으로 양곡이 부족한 상황을 보고한 함경도 관찰사와 도사의 장계를 받고, 대신·비변사 당상·한성부 판윤·경기관찰사·[[위유어사]]를 불러서 북도 백성을 위유하는 위유윤음(慰諭綸音)을 내렸다 이 [[윤음]]에서 [[조선 정조|정조]]는 왕이 백성을 걱정하는 감성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되며 애민정신(愛民精神) 사상이 강한 군주였다. 이런 영향은 [[조선 정조|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손이었을 때 [[조선 영조|영조]]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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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정조]]가 1784년에 흉년으로 고통 받는 함경도 백성에게 내린 [[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함께 실려 있다. [[조선 정조|정조]]는 흉년으로 양곡이 부족한 상황을 보고한 함경도 관찰사와 도사의 장계를 받고, 대신·비변사 당상·한성부 판윤·경기관찰사·[[위유어사]]를 불러서 북도 백성을 위로하는 위유윤음(慰諭綸音)을 내렸다. 이 [[윤음]]에서 왕이 백성을 걱정하는 정조의 감성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되며 애민정신(愛民精神) 사상이 강한 군주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영향은 [[조선 정조|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손이었을 때 [[조선 영조|영조]]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
[[조선 헌종|헌종]]이 1839년 10월 18일 천주교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 서울과 지방의 백성에게 내린 [[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글을 지은 사람은 [[조인영]]이라고 알려져 있다. 먼저 한문본(7장)이 있고, 이어 언해본(9장)이 수록되었다. 이는 당시 [[천주교]]가 하류 부서층(婦庶層)에까지 널리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까지 고루 읽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크게 3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부분은 윤음 반포의 배경과 취지를 밝히고 있다. 두번째 내용은 [[이승훈|이승훈(李承薰)]]의 [[천주학 도입|천주학 도입(天主學導入, 1784)]], [[신유사옥]], [[황사영 백서사건|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 1810)]] 등을 들어 조선에서의 [[천주학]]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은 천주교 전파가 40년이 가까워지면서 금망(禁網)은 해이해지고 사교는 더욱 성하므로, 이를 효유하게 하기 위해 [[윤음]]을 내린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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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헌종]]이 1839년 10월 18일 천주교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 서울과 지방의 백성에게 내린 [[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글을 지은 사람은 [[조인영]]이라고 알려져 있다. 먼저 한문본(7장)이 있고, 이어 언해본(9장)이 수록되었다. 이는 당시 [[천주교]]가 하류 부서층(婦庶層)에까지 널리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까지 고루 읽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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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은 크게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은 윤음 반포의 배경과 취지를 밝히고 있다. 두번째 내용은 [[이승훈|이승훈(李承薰)]]의 [[천주학 도입|천주학 도입(天主學導入, 1784)]], [[신유사옥]], [[황사영 백서사건|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 1810)]] 등을 들어 조선에서의 [[천주학]]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은 천주교가 전파된 지 40년이 가까워지면서 금망(禁網)은 해이해지고 사교는 더욱 성하므로, 이를 효유하게 하기 위해 [[윤음]]을 내린다고 밝히고 있다.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조선 고종|고종]]이 대소 관료와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내린 [[척사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실려 있다. 1881년 [[조선 고종|고종]]이 내린 이 [[윤음]]은 사실상 마지막 [[척사윤음]]이었다. 이 [[윤음]]의 내용은 [[천주교 교리]]를 반박하고, 백성들에게 [[천주교]]에 현혹되지 말라는 취지의 다른 [[윤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조선 고종|고종]]은 [[조선 정조|정조]] 이후로 [[천주교인]]을 여러 번 징계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고 전제하였다. 이어 [[천주교인]]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하고, 유학 사상을 실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순박한 풍속을 회복하고 사당(私黨)인 [[천주교인]]들을 소멸시키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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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고종]]이 대소 관료와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내린 [[척사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실려 있다. 1881년 [[조선 고종|고종]]이 내린 이 [[윤음]]은 사실상 마지막 [[척사윤음]]이었다. 이 [[윤음]]의 내용은 [[천주교 교리]]를 반박하거나 [[천주교]]에 현혹되지 말라는 취지의 다른 [[윤음]]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조선 고종|고종]]은 [[조선 정조|정조]] 이후로 [[천주교인]]을 여러 번 징계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고 전제하였다. 이어 [[천주교인]]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하고, 유학 사상을 실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순박한 풍속을 회복하고 사당(私黨)인 [[천주교인]]들을 소멸시키자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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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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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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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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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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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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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더 읽을 거리===
 
*단행본
 
*단행본
 
**홍윤표, 『윤음언해해제』, 전북대학교, 1978.
 
**홍윤표, 『윤음언해해제』, 전북대학교,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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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백두현, 「훈민정음을 활용한 조선시대의 인민 통치」, 『진단학보』 제108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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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현, 「훈민정음을 활용한 조선시대의 인민 통치」, 『진단학보』 제108호, 진단학회, 2009.
 
**조성린, 「정조대 사회복지시책 연구」, 상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9.
 
**조성린, 「정조대 사회복지시책 연구」, 상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9.
**朴正圭, 「朝鮮時代 敎書 綸音에 관한 硏究」, 『한국언론학회 연구보고서 및 기타간행물』, Vol-1993, 1993, 46~57.
+
**朴正圭, 「朝鮮時代 敎書 綸音에 관한 硏究」, 『한국언론학회 연구보고서 및 기타간행물』1993, 한국언론학회, 1993.
**박종천, 「《척사윤음》 연구」, 『宗敎學硏究』, Vol 18, 1999, 125~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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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천, 「《척사윤음》 연구」, 『宗敎學硏究』18,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999, 125~150쪽.
**배요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 관한 연구 :  헌종대 《척사윤음》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장신논단』, Vol 46, 2014, 211~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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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요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 관한 연구 :  헌종대 《척사윤음》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장신논단』46,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사상과 문화연구원, 2014, 211~239쪽.
**박종천, 「《척사윤음》 연구」, 『宗敎學硏究』, Vol 18, 1999, 125~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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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천, 「《척사윤음》 연구」, 『宗敎學硏究』18,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999, 125~150쪽.
  
===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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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승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504 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kyujanggak.snu.ac.kr/home/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sm^lclass=AL^ntype=sj^cn=GK03972_00 어제계주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sup>online</sup></online></html>.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kyujanggak.snu.ac.kr/home/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sm^lclass=AL^ntype=sj^cn=GK03972_00 어제계주윤음]", <html><online style="color:purple">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sup>online</sup></online></html>.

2017년 11월 22일 (수) 22:01 기준 최신판

개요

2016 장서각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에서 윤음과 관련된 고문헌 5건이 소개되었다.[1] 이 같은 유형의 고문서는 당시 조선시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왕이 피지배층인 평민들과 한글이라는 문자를 이용하여 소통하려고 하였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

내용

윤음에 대해서

  • 윤음은 조선시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훈유(訓諭) 성격의 문서이다. 그 대상은 중외의 관료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는 온 국민일 때도 있고, 또는 일정한 부류, 일정한 지역의 관원이나 백성 등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용 역시 다양한 형태로 쓰이는데 양로(養老)·권농(勸農)·척사(斥邪)·포충(褒忠)·구휼(救恤)·독역(督役)·군포탕감(軍布蕩減)·계주(戒酒)·과폐이정(科弊釐正 :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음)·수성(守城)·반행(頒行 : 발행해 반포함) 등 여러 가지가 있다.[2]
  • 윤음은 대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는 것이므로 주자(鑄字)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양반관료만이 그 대상인 경우에는 한문으로 간인(刊印)하여 반포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앞에 한문으로 된 윤음을 싣고 뒤에 언해를 붙여 반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언해본만 따로 간행한 것도 있다. 국왕이 발급하는 문서의 대부분은 원문서 한 통만을 필서해 주었다. 그러나 녹권(錄券)이나 윤음과 같이 부수를 많이 필요로 하는 문서는 간인해 펴낸 것이다. 윤음의 서식은 대상과 내용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정한 정식(定式)은 없으나 기두(起頭)는 대개 다음과 같다.[3]
御製諭某人等某事綸音(어제유모인등모사륜음)
王若曰云云(왕약왈운운)[4]

2016 장서각 특별전에서 수록된 윤음 자료들의 특징과 의의

  • 윤음은 조선사회에서 최고통치자인 국왕이 일반 평민들에게 지배 계급의 생각과, 제도를 알리기 위한 문서제도이다. 이런 제도는 한반도 역사상 고대나 중세에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 문자는 한자였으므로 사실상 지배계급이 자신의 정책이나 사상을 일반 평민에게 전파시키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세종대왕 이후 한글이 점차 피지배계급까지 스며들어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윤음의 효과는 매우 높았으며, 세종 이후 국왕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서제도가 된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윤음 제도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과의 소통에 나설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한글'이 왜 소통과 배려의 문자인지 알려주는 자료인 것이다.

어제계주윤음

윤음영조가 1757년 11월에 내린 윤음에 한글 토를 달고 윤음 전문을 한글로 번역한 문서로 술을 경계하라는 계주윤음이다. 영조는 관원들이 술을 삼가지 않는 것이나 백성들이 금주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영조 자신의 불성실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금주령의 법률을 고쳐 조사(朝士)가 금주령을 어길 경우에는 10년 금고, 유생이 어길 경우에는 10년 동안 과거 응시 정지, 서민과 천인은 10년 동안 종으로 삼되 술을 빚은 자나 마신 자 모두에게 같은 처벌을 적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윤음에서 관료들의 솔선수범을 강조하며, 술을 경계하여 백성의 모범이 되기를 권하였다.

어제경민음

영조가 1762년 9월 12일 구술하여 쓰게 한 한글본 윤음이다. 영조는 금주를 위하여 국가 제사에서조차 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1762년에는 금주(禁酒)를 강화했음에도 역관들이 모여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이에 권극(權極)은 술을 마시는 것을 철저하게 막기 위해 금주령을 어긴 사람을 적발하는 대로 효시하자고 주장하였다. 영조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금주령을 어긴 경우 효시한다는 내용을 담아서 이 윤음을 내리게 되었다. 이 윤음은 한자본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글로 작성해 반포되었다. 이는 국가의 정책을 모든 백성이 쉽게 이해함으로써 법을 어기지 않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정조가 1784년에 흉년으로 고통 받는 함경도 백성에게 내린 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함께 실려 있다. 정조는 흉년으로 양곡이 부족한 상황을 보고한 함경도 관찰사와 도사의 장계를 받고, 대신·비변사 당상·한성부 판윤·경기관찰사·위유어사를 불러서 북도 백성을 위로하는 위유윤음(慰諭綸音)을 내렸다. 이 윤음에서 왕이 백성을 걱정하는 정조의 감성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되며 애민정신(愛民精神) 사상이 강한 군주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영향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손이었을 때 영조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

헌종이 1839년 10월 18일 천주교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 서울과 지방의 백성에게 내린 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글을 지은 사람은 조인영이라고 알려져 있다. 먼저 한문본(7장)이 있고, 이어 언해본(9장)이 수록되었다. 이는 당시 천주교가 하류 부서층(婦庶層)에까지 널리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까지 고루 읽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은 윤음 반포의 배경과 취지를 밝히고 있다. 두번째 내용은 이승훈(李承薰)천주학 도입(天主學導入, 1784), 신유사옥,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 1810) 등을 들어 조선에서의 천주학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은 천주교가 전파된 지 40년이 가까워지면서 금망(禁網)은 해이해지고 사교는 더욱 성하므로, 이를 효유하게 하기 위해 윤음을 내린다고 밝히고 있다.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고종이 대소 관료와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내린 척사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실려 있다. 1881년 고종이 내린 이 윤음은 사실상 마지막 척사윤음이었다. 이 윤음의 내용은 천주교 교리를 반박하거나 천주교에 현혹되지 말라는 취지의 다른 윤음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고종정조 이후로 천주교인을 여러 번 징계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고 전제하였다. 이어 천주교인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하고, 유학 사상을 실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순박한 풍속을 회복하고 사당(私黨)인 천주교인들을 소멸시키자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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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어제경민음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
어제계주윤음


지식 관계망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지식관계망

중심요소

문맥요소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어제계주윤음 A는 B를 포함한다  dcterms:hasPart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어제경민음 A는 B를 포함한다  dcterms:hasPart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A는 B를 포함한다  dcterms:hasPart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 A는 B를 포함한다  dcterms:hasPart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A는 B를 포함한다  dcterms:hasPart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57년 어제계주윤음이 반포되었다
1762년 어제경민음이 반포되었다
1783년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이 반포되었다
1839년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이 반포되었다
1881년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이 반포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4 127.054351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에 관련된 윤음 문서는 모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뒤이어 나오는 '내용'과 '관련 항목'의 전시자료 5건으로서, 유형별로는 모두 고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내용은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는 계주윤음(戒酒綸音)과 백성을 위로하는 위유윤음(慰諭綸音), 마지막으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척사윤음(斥邪綸音) 이러한 3가지 형식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 최승희, "윤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최승희, "윤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최승희, "윤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최승희, "윤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홍윤표, 『윤음언해해제』, 전북대학교, 1978.
    • 이성우, 『한국식경대전(韓國食經大典)』, 향문사, 1981.
    • 홍문각, 『御製 訓書諺解 ; 御製 百行源 ; 御製 警民音』, 1984.
    • 김목한·김성규·남윤진·박부자·박진호·이래호·이현주·정승혜·정윤자·정재영·황문환·황선엽·홍은진, 『장서각한글자료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 韓國振興硏究事業推進委員會, 『장서각한글자료해제』, 韓國精神文化硏究院, 2000.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년 06월.
  • 논문
    • 백두현, 「훈민정음을 활용한 조선시대의 인민 통치」, 『진단학보』 제108호, 진단학회, 2009.
    • 조성린, 「정조대 사회복지시책 연구」, 상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9.
    • 朴正圭, 「朝鮮時代 敎書 綸音에 관한 硏究」, 『한국언론학회 연구보고서 및 기타간행물』1993, 한국언론학회, 1993.
    • 박종천, 「《척사윤음》 연구」, 『宗敎學硏究』18,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999, 125~150쪽.
    • 배요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 관한 연구 : 헌종대 《척사윤음》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장신논단』46,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사상과 문화연구원, 2014, 211~239쪽.
    • 박종천, 「《척사윤음》 연구」, 『宗敎學硏究』18,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999, 125~150쪽.
  • 웹자원
  • 최승희, "윤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어제계주윤음",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online.
  • 홍윤표, "어제경민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정민, "어제경민음",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online,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헌종실록』 6권, 헌종5년(1839), 10월 18일(경진), 척사 윤음을 경외에 내리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