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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김화봉·김세환, 「居昌 黃山마을 전통주거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농촌건축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13, 한국농촌건축학회, 2011. |
+ | ** 정병옥, 「朝鮮前期 士禍와 政治 엘리트의 性格 : 《居昌愼氏世譜》에 나타난 사화 연루자의 사례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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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30일 (목) 11:43 기준 최신판
거창 신씨(居昌 愼氏) | |
대표명칭 | 거창 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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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居昌 愼氏 |
정의
경상남도 거창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내용
유래
시조(始租) 신수(愼修)는 본래 중국(中國) 송(宋)나라 개봉부(開封府) 출신으로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정착(定着)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수사공(守司空)ㆍ좌복야(左僕射) 등을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중서문하성 종 2품 벼슬)에 이르러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남)하였으며 학식(學識)과 의학에 정통하였다. 그후 7세손 집평(執平)이 고려 고종(高宗) 때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몽고군의 침입 때 죽도(竹島)에서 순절했고, 아들 성(成)이 군기감사(軍器監事)를 지낸 후 개경(開京)을 떠나 거창(居昌)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
조선후기 거창 신씨와 대표인물
거창 신씨는 요수 신권(1501-1573)을 중심으로 가문의 위상이 일신되어 거창 일대의 핵심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1728년 조선 영조 대의 무신란(戊申亂)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신수이(愼守彝, 1688-1768)가 도암 이재의 문인으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남인에서 노론으로 정치적 성향에도 변화가 생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18~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사환(仕宦)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지식관계망
- 제례 관련 한글고문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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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신씨 | 기일록(경주김씨 직각종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거창신씨(居昌愼氏)",
『한국족보자료시스템』online ,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존경각. - ↑ "거창 장기 거창신씨", 한국고문서소장처,
『한국학자료센터』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화봉·김세환, 「居昌 黃山마을 전통주거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농촌건축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13, 한국농촌건축학회, 2011.
- 정병옥, 「朝鮮前期 士禍와 政治 엘리트의 性格 : 《居昌愼氏世譜》에 나타난 사화 연루자의 사례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