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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분류: 민족기록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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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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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기록화 사건 거란침입 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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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이용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805 거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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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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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북진정책,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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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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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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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되자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며 이들을 우대한 반면,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다. 942년 거란의 태종(太宗)이 보내온 낙타 50필을 만부교(萬夫橋) 아래에서 굶겨 죽이고, 사신 30인을 유배보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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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 거란정책은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에는 광군 30만을 조직하여 광군사(光軍司)을 설치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고, 압록강 유역의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이자 요(遼)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후 991년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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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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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왔다. 고려는 [[박양유]](朴良柔)·[[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는 등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에 고려는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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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 결과 고려는 조공길 개척을 명목으로 청천강 북쪽에 있는 압록강 동쪽 땅 280리에 대한 점유권을 갖는 대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듬해 새로이 점거하게 된 흥화진(興化鎭)·통주(通州)·구주(龜州)·곽주(郭州)·용주(龍州)·철주(鐵州) 등 [[강동6주]]에 성보(城堡)를 구축하고 행정구역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압록강 연안까지 회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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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칩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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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년 고려 목종의 모후(母后)인 [[천추태후 | 천추태후(964∼1029, 千秋太后)]]와 [[김치양 | 김치양(?∼1009, 金致陽)]]이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강조 | 강조(?~1010, 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한 사선이 일어났다. 요의 성종은 1010년(현종 1) 강조의 정변에 대한 문죄를 명분삼아 직접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서북부에 침입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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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먼저 흥화진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의 방어로 성공하지 못하자, 통주로 진군하여 고려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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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곽산·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밀어닥쳤다.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고려 국왕의 입조를 강화조건으로 제시하고 하공진을 인질로 데리고 돌아갔다. 돌아가던 요는 구주 등에서 양규·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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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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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년 정월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요에 입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1013년에는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다. 그러자 요는 1018년 소배압을 총지휘관으로 10만 병력으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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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상원수 [[강감찬]](姜邯贊)과 부원수 [[강민첨]](姜民瞻)이 이끄는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강감찬은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고 기다렸다. 이윽고 적병이 닥치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1019년 정월에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까지 침입하였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려 하였다. 그러나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하여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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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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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15/C015.htm "안융진 담판을 하는 서희"(이인영)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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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16/C016.htm "귀주대첩"(이용환)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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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 || [[고려]] || A은 B를 공격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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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조]] || [[거란]] ||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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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감찬]] || [[귀주대첩]] || A은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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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 || [[귀주대첩]] || A은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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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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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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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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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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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805 거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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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35364 거란의 칩입]",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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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620&index_id=cp06200082&content_id=cp062000820001&search_left_menu=4 거란의 칩입과 강화]",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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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

2017년 12월 26일 (화) 23:05 기준 최신판

거란 침입(契丹侵入)
이용범, "거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거란 침입
한자표기 契丹侵入
시대 고려
날짜 993년, 1010년, 1018년
관련인물 서희,강조,강감찬
관련장소 강동6주



정의

고려의 북진정책,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사건이다.

내용

개요

고려는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되자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며 이들을 우대한 반면,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다. 942년 거란의 태종(太宗)이 보내온 낙타 50필을 만부교(萬夫橋) 아래에서 굶겨 죽이고, 사신 30인을 유배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 거란정책은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에는 광군 30만을 조직하여 광군사(光軍司)을 설치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고, 압록강 유역의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이자 요(遼)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후 991년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1차 침입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왔다. 고려는 박양유(朴良柔)·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는 등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에 고려는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서희소손녕의 담판이 이루어졌다. 담판 결과 고려는 조공길 개척을 명목으로 청천강 북쪽에 있는 압록강 동쪽 땅 280리에 대한 점유권을 갖는 대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듬해 새로이 점거하게 된 흥화진(興化鎭)·통주(通州)·구주(龜州)·곽주(郭州)·용주(龍州)·철주(鐵州) 등 강동6주에 성보(城堡)를 구축하고 행정구역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압록강 연안까지 회복하게 되었다.

2차 칩입

1009년 고려 목종의 모후(母后)인 천추태후(964∼1029, 千秋太后) 김치양(?∼1009, 金致陽)이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강조(?~1010, 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한 사선이 일어났다. 요의 성종은 1010년(현종 1) 강조의 정변에 대한 문죄를 명분삼아 직접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서북부에 침입해왔다. 요는 먼저 흥화진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의 방어로 성공하지 못하자, 통주로 진군하여 고려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곽산·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밀어닥쳤다.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고려 국왕의 입조를 강화조건으로 제시하고 하공진을 인질로 데리고 돌아갔다. 돌아가던 요는 구주 등에서 양규·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3차 침입

1011년 정월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요에 입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1013년에는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다. 그러자 요는 1018년 소배압을 총지휘관으로 10만 병력으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고려는 상원수 강감찬(姜邯贊)과 부원수 강민첨(姜民瞻)이 이끄는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강감찬은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고 기다렸다. 이윽고 적병이 닥치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1019년 정월에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까지 침입하였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려 하였다. 그러나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하여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거란 고려 A은 B를 공격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서희 소손녕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강조 거란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A edm:isRelatedTo B
강감찬 귀주대첩 A은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거란 귀주대첩 A은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이용범, "거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거란의 칩입",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거란의 칩입과 강화",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