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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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개청(開淸)
 
|휘=개청(開淸)
 
|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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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호=[[오진지탑|오진지탑(悟眞之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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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호=오진(悟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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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김씨(金氏)
 
|성씨=김씨(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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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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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승려.
  
 
=='''내용'''==
 
=='''내용'''==
 
===가계와 탄생===
 
===가계와 탄생===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은 835년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그의 선조는 신라의 명문(名門)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김유차(金有車)는 한때 강군(康郡,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일찍부터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고자 하는 생각에 가득 차 있어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에 은거(隱居)하였다.<ref>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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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은 835년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 그의 선조는 신라의 명문(名門)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김유차(金有車)는 한때 강군(康郡,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일찍부터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에 은거(隱居)했다.<ref>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쪽.</ref>
  
개청에 탄생과 관련해서는 한 신승(神僧)이 개청의 어머니에게 금인(金印)을 주었다는 태몽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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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청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한 신승(神僧)이 개청의 어머니에게 금인(金印)을 주었다는 태몽이 전해진다.
 
{{Blockquote|어머니는 복보씨(復寶氏)로 어느 날 밤 혼교(魂交: 잠을 자던 중)에 홀연히 아름다운 상서를 얻었으니 갑자기 신승(神僧)이 허공으로부터 내려와서 뜰 아래에 서서 품안에서 금(金)과 나무로 만든 도장 2개를 꺼내 보이면서 하는 말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필요한가"하였다. 어머니는 맥맥(脈脈: 끊임없이 계속)히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스님이 곧 금인(金印)만 남겨두고 갔다. 어머니는 꿈을 깬 후 비로소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오신채(五辛菜)<ref>냄새가 강하고 독특한 다섯 가지 채소. 마늘·파·부추·달래·생강. 경론(經論)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 일정하지 않음.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2850&cid=50292&categoryId=50292 오신채]",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와 어육(魚肉)은 모두 끊고, 엄숙하게 인사(仁祠: 사원(寺院))를 시설하고 불사(佛事)를 닦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태교와 공덕을 닦다가 만삭이 되어 대중(大中) 8년<ref>본 비문 중 대사(大師)의 탄생이 대중(大中) 8년(854년)이고, 입적이 동광(同光) 8년(930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입적시 대사의 나이가 96세, 승랍이 72세라 하였으니 이는 2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대중 8년은 오기(誤記)로 보아야 할 것이다.</ref> 4월 15일에 탄생하니, 대사의 얼굴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이 단정하고 입술은 홍련(紅蓮)과 같았다.
 
{{Blockquote|어머니는 복보씨(復寶氏)로 어느 날 밤 혼교(魂交: 잠을 자던 중)에 홀연히 아름다운 상서를 얻었으니 갑자기 신승(神僧)이 허공으로부터 내려와서 뜰 아래에 서서 품안에서 금(金)과 나무로 만든 도장 2개를 꺼내 보이면서 하는 말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필요한가"하였다. 어머니는 맥맥(脈脈: 끊임없이 계속)히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스님이 곧 금인(金印)만 남겨두고 갔다. 어머니는 꿈을 깬 후 비로소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오신채(五辛菜)<ref>냄새가 강하고 독특한 다섯 가지 채소. 마늘·파·부추·달래·생강. 경론(經論)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 일정하지 않음.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2850&cid=50292&categoryId=50292 오신채]",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와 어육(魚肉)은 모두 끊고, 엄숙하게 인사(仁祠: 사원(寺院))를 시설하고 불사(佛事)를 닦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태교와 공덕을 닦다가 만삭이 되어 대중(大中) 8년<ref>본 비문 중 대사(大師)의 탄생이 대중(大中) 8년(854년)이고, 입적이 동광(同光) 8년(930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입적시 대사의 나이가 96세, 승랍이 72세라 하였으니 이는 2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대중 8년은 오기(誤記)로 보아야 할 것이다.</ref> 4월 15일에 탄생하니, 대사의 얼굴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이 단정하고 입술은 홍련(紅蓮)과 같았다.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142쪽.}}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142쪽.}}
  
 
===출가수행===
 
===출가수행===
개청은 8세 때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儒學)을 익히다가, 25세 때에 출가하여 [[구례 화엄사|화엄사(華嚴寺)]]의 [[정행|정행(正行)]]에게 가서 수행하였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738 개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강주(康州, 지금의 함양 지역) [[함양 엄천사|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738 개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혼자서 3년 동안 수선(修禪)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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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청은 8세 때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儒學)을 익히다가, 25세 때에 출가하여 [[구례 화엄사|화엄사(華嚴寺)]]의 [[정행|정행(正行)]]에게 수행했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738 개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강주(康州, 지금의 함양 지역) [[함양 엄천사|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738 개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혼자서 삼 년 동안 수선(修禪)하다가 후에 [[사굴산문|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開祖)인 [[범일|범일(梵日)]]의 명성을 듣고 오대산으로 찾아가, [[범일]]에게 심인(心印)<ref>언어를 떠난 깨달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깨달음. 도장이 진실·확실을 나타내듯, 깨달음도 그러하므로 인(印)이라 함.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2071&cid=50292&categoryId=50292 심인]",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을 받았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7994&cid=40942&categoryId=33380 개청]",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후에 [[사굴산문|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開祖)인 [[범일|범일(梵日)]]의 명성을 듣고 오대산으로 찾아가, 범일로부터 심인(心印)<ref>언어를 떠난 깨달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깨달음. 도장이 진실·확실을 나타내듯, 깨달음도 그러하므로 인(印)이라 함.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2071&cid=50292&categoryId=50292 심인]",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을 받았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7994&cid=40942&categoryId=33380 개청]",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Blockquote|이 때에 멀리 봉도(蓬島) 중에 금산(錦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술잔만한 작은 배를 타고 홀연히 오파(鼇波)를 건너 석장(錫杖)을 짚고서는 녹울(鹿菀)을 찾아가서 참선을 하던 중, 우연히 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玉軸)의 일음교(一音敎)를 읽고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성취하였고, 백일 동안 단식하면서 먼저 정각(正覺)의 마음을 닦았으며, 이어 3년간 솔잎만 먹고 보리(菩提)의 과(果)를 증득하려고 하였다. 부지런히 참선하던 중 홀연히 어떤 노인이 나타났다. 쳐다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선객(禪客)으로 변하였는데, 그는 선풍도골(仙風道骨)로서 찬란함이 마치 옥광(玉光)을 발하는 듯, 또한 흰 서리를 드리운 듯 하였다. 대사에게 이르되 “스님은 마땅히 빨리 이 길의 끝까지 가되 먼저 굴령(崛嶺)을 찾아가시오. 거기에는 시대를 탄 대사이며 세속을 벗어난 신인(神人)이 계시니, 능가보월(楞伽寶月)의 마음을 깨달았고, 인도제천(印度諸天)의 종성(宗性)을 모두 통달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그 길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오대산에 이르러 통효(通曉: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시호)대사를 친견하였다. 대사가 말씀하되 “어찌 그리 늦었는가.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다”하면서 뜰 앞으로 다가옴을 보고 곧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Blockquote|이 때에 멀리 봉도(蓬島) 중에 금산(錦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술잔만한 작은 배를 타고 홀연히 오파(鼇波)를 건너 석장(錫杖)을 짚고서는 녹울(鹿菀)을 찾아가서 참선을 하던 중, 우연히 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玉軸)의 일음교(一音敎)를 읽고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성취하였고, 백일 동안 단식하면서 먼저 정각(正覺)의 마음을 닦았으며, 이어 3년간 솔잎만 먹고 보리(菩提)의 과(果)를 증득하려고 하였다. 부지런히 참선하던 중 홀연히 어떤 노인이 나타났다. 쳐다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선객(禪客)으로 변하였는데, 그는 선풍도골(仙風道骨)로서 찬란함이 마치 옥광(玉光)을 발하는 듯, 또한 흰 서리를 드리운 듯 하였다. 대사에게 이르되 “스님은 마땅히 빨리 이 길의 끝까지 가되 먼저 굴령(崛嶺)을 찾아가시오. 거기에는 시대를 탄 대사이며 세속을 벗어난 신인(神人)이 계시니, 능가보월(楞伽寶月)의 마음을 깨달았고, 인도제천(印度諸天)의 종성(宗性)을 모두 통달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그 길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오대산에 이르러 통효(通曉: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시호)대사를 친견하였다. 대사가 말씀하되 “어찌 그리 늦었는가.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다”하면서 뜰 앞으로 다가옴을 보고 곧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5-147쪽.}}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5-147쪽.}}
  
 
===활동===
 
===활동===
889년 [[범일|범일국사(梵日國師)]]가 죽자 개청은 [[강릉 보현사|보현사(普賢寺)]]로 가서 주지를 하면서 도로를 개통하고, 법당과 탑을 새로 세웠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738 개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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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년 [[범일|범일국사(梵日國師)]]가 죽자 개청은 [[강릉 보현사|보현사(普賢寺)]]로 가서 주지를 하며 도로를 개통하고, 법당과 탑을 새로 세웠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738 개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Blockquote|그 곳이 선객(禪客)들이 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초목을 베어내고는 둔덕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통로를 개설하였으며, 또 높이 전탑(殿塔)을 수축하는 한편 담장을 치고 대문을 크게 열어 회상(會上)을 차리니, 문법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중은 바다와 같이 많았다. 길상(吉祥)의 도량이므로 크게 기뻐하였고, 지혜의 달이 문 앞을 비추므로 함께 공덕(功德)의 숲을 의지하였으며, 자비의 구름 또한 자욱이 지붕을 덮었다.  
 
{{Blockquote|그 곳이 선객(禪客)들이 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초목을 베어내고는 둔덕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통로를 개설하였으며, 또 높이 전탑(殿塔)을 수축하는 한편 담장을 치고 대문을 크게 열어 회상(會上)을 차리니, 문법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중은 바다와 같이 많았다. 길상(吉祥)의 도량이므로 크게 기뻐하였고, 지혜의 달이 문 앞을 비추므로 함께 공덕(功德)의 숲을 의지하였으며, 자비의 구름 또한 자욱이 지붕을 덮었다.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0쪽.}}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0쪽.}}
  
이에 개청의 덕이 높음을 듣고 학도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신라 경애왕|경애왕]]이 사신을 보내어 [[국사|국사(國師)]]의 예(禮)를 표하였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738 개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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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개청의 덕이 높음을 듣고 사방에서 학도들이 모여들었고, [[신라 경애왕|경애왕]]이 사신을 보내 [[국사|국사(國師)]]의 예(禮)를 표했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738 개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Blockquote|본국의 경애대왕(景哀大王)이 대사의 덕이 천하에 으뜸이고 명망이 해동(海東)에 두텁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아직 궁중으로 영접하여 피석(避席)의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중사(中使)인 최영(崔暎)을 보내어 봉조(鳳詔: 천자(天子)의 조서(詔書))를 전달하고 앙려(鴦廬: 왕실(王室)의 동서익랑(東西翼廊))로 초빙해서 왕도(王道)의 위급함을 부호(扶護: 도와서 보호함)하는 방법을 물었으며, 국사의 예를 표하였다.
 
{{Blockquote|본국의 경애대왕(景哀大王)이 대사의 덕이 천하에 으뜸이고 명망이 해동(海東)에 두텁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아직 궁중으로 영접하여 피석(避席)의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중사(中使)인 최영(崔暎)을 보내어 봉조(鳳詔: 천자(天子)의 조서(詔書))를 전달하고 앙려(鴦廬: 왕실(王室)의 동서익랑(東西翼廊))로 초빙해서 왕도(王道)의 위급함을 부호(扶護: 도와서 보호함)하는 방법을 물었으며, 국사의 예를 표하였다.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0쪽.}}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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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2-153쪽.}}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2-153쪽.}}
  
개청이 입적하고 10년 뒤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평정한 뒤에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허락하면서 [[최언위|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다. 글씨는 명서예가인 [[구족달|구족달(仇足達)]]이 썼다.<ref>김흥삼,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0301755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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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청이 입적하고 십 년 ,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평정한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허락하면서 [[최언위|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했다. 글씨는 명서예가인 [[구족달|구족달(仇足達)]]이 썼다.<ref>김흥삼,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0301755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940년에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개청을 위해 세운 탑비]]는 현재 [[강릉 보현사]]에 있으며, 1963년 보물 제192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12,01920000,32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Blockquote| 임금님의 성문(聖文)은 세상에 뛰어난 신무(神武)이시고, 선천적으로 삼구(三駈)의 전략적 묘책을 타고나서 능히 삼한(三韓)을 평정하여 일거(一擧)에 가지런히 일통(一統)을 이룩하였다. 이젠 금경(金鏡)을 높이 매어 달고 널리 청구(靑丘)를 비추어 항상 백성을 휼민(恤愍)히 여기며 중흥의 운을 이루었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왕으로부터 외호(外護)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호를 낭원대사(朗圓大師), 탑명(塔名)을 오진지탑(悟眞之塔)이라 추증하고는,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훌륭한 비문을 지어 스님의 고매한 행적을 선양(宣揚)하라 하셨으나, 언위(彦撝)는 사림(詞林)의 말학(末學)이며, 금완(禁莞)의 미신(微臣)으로서 외람되게 왕명을 받들어 선사의 도덕을 찬양하였다.
 
{{Blockquote| 임금님의 성문(聖文)은 세상에 뛰어난 신무(神武)이시고, 선천적으로 삼구(三駈)의 전략적 묘책을 타고나서 능히 삼한(三韓)을 평정하여 일거(一擧)에 가지런히 일통(一統)을 이룩하였다. 이젠 금경(金鏡)을 높이 매어 달고 널리 청구(靑丘)를 비추어 항상 백성을 휼민(恤愍)히 여기며 중흥의 운을 이루었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왕으로부터 외호(外護)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호를 낭원대사(朗圓大師), 탑명(塔名)을 오진지탑(悟眞之塔)이라 추증하고는,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훌륭한 비문을 지어 스님의 고매한 행적을 선양(宣揚)하라 하셨으나, 언위(彦撝)는 사림(詞林)의 말학(末學)이며, 금완(禁莞)의 미신(微臣)으로서 외람되게 왕명을 받들어 선사의 도덕을 찬양하였다.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4쪽.}}
 
|출처=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4쪽.}}
  
940년에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개청을 위해 세워진 탑비]]는 현재 [[강릉 보현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3년에 보물 제192호로 지정되었다."[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12,01920000,32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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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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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원대사 개청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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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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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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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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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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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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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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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1일 (목) 23:37 기준 최신판

개청(開淸)
BHST Monk1.png
대표명칭 개청
영문명칭 Gaecheong
한자 開淸
생몰년 835(흥덕왕 10)-930(경순왕 4)
시호 낭원(朗圓)
개청(開淸)
탑호 오진(悟眞)
성씨 김씨(金氏)
출신지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
승탑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
승탑비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정의

신라시대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은 835년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 그의 선조는 신라의 명문(名門)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김유차(金有車)는 한때 강군(康郡,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일찍부터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에 은거(隱居)했다.[1]

개청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한 신승(神僧)이 개청의 어머니에게 금인(金印)을 주었다는 태몽이 전해진다.

Quote-left.png 어머니는 복보씨(復寶氏)로 어느 날 밤 혼교(魂交: 잠을 자던 중)에 홀연히 아름다운 상서를 얻었으니 갑자기 신승(神僧)이 허공으로부터 내려와서 뜰 아래에 서서 품안에서 금(金)과 나무로 만든 도장 2개를 꺼내 보이면서 하는 말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필요한가"하였다. 어머니는 맥맥(脈脈: 끊임없이 계속)히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스님이 곧 금인(金印)만 남겨두고 갔다. 어머니는 꿈을 깬 후 비로소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오신채(五辛菜)[2]와 어육(魚肉)은 모두 끊고, 엄숙하게 인사(仁祠: 사원(寺院))를 시설하고 불사(佛事)를 닦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태교와 공덕을 닦다가 만삭이 되어 대중(大中) 8년[3] 4월 15일에 탄생하니, 대사의 얼굴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이 단정하고 입술은 홍련(紅蓮)과 같았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142쪽.


출가수행

개청은 8세 때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儒學)을 익히다가, 25세 때에 출가하여 화엄사(華嚴寺)정행(正行)에게 수행했다.[4] 강주(康州, 지금의 함양 지역)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5]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혼자서 삼 년 동안 수선(修禪)하다가 후에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開祖)인 범일(梵日)의 명성을 듣고 오대산으로 찾아가, 범일에게 심인(心印)[6]을 받았다.[7]

Quote-left.png 이 때에 멀리 봉도(蓬島) 중에 금산(錦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술잔만한 작은 배를 타고 홀연히 오파(鼇波)를 건너 석장(錫杖)을 짚고서는 녹울(鹿菀)을 찾아가서 참선을 하던 중, 우연히 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玉軸)의 일음교(一音敎)를 읽고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성취하였고, 백일 동안 단식하면서 먼저 정각(正覺)의 마음을 닦았으며, 이어 3년간 솔잎만 먹고 보리(菩提)의 과(果)를 증득하려고 하였다. 부지런히 참선하던 중 홀연히 어떤 노인이 나타났다. 쳐다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선객(禪客)으로 변하였는데, 그는 선풍도골(仙風道骨)로서 찬란함이 마치 옥광(玉光)을 발하는 듯, 또한 흰 서리를 드리운 듯 하였다. 대사에게 이르되 “스님은 마땅히 빨리 이 길의 끝까지 가되 먼저 굴령(崛嶺)을 찾아가시오. 거기에는 시대를 탄 대사이며 세속을 벗어난 신인(神人)이 계시니, 능가보월(楞伽寶月)의 마음을 깨달았고, 인도제천(印度諸天)의 종성(宗性)을 모두 통달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그 길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오대산에 이르러 통효(通曉: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시호)대사를 친견하였다. 대사가 말씀하되 “어찌 그리 늦었는가.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다”하면서 뜰 앞으로 다가옴을 보고 곧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5-147쪽.


활동

889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죽자 개청은 보현사(普賢寺)로 가서 주지를 하며 도로를 개통하고, 법당과 탑을 새로 세웠다.[8]

Quote-left.png 그 곳이 선객(禪客)들이 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초목을 베어내고는 둔덕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통로를 개설하였으며, 또 높이 전탑(殿塔)을 수축하는 한편 담장을 치고 대문을 크게 열어 회상(會上)을 차리니, 문법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중은 바다와 같이 많았다. 길상(吉祥)의 도량이므로 크게 기뻐하였고, 지혜의 달이 문 앞을 비추므로 함께 공덕(功德)의 숲을 의지하였으며, 자비의 구름 또한 자욱이 지붕을 덮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0쪽.


이에 개청의 덕이 높음을 듣고 사방에서 학도들이 모여들었고, 경애왕이 사신을 보내 국사(國師)의 예(禮)를 표했다.[9]

Quote-left.png 본국의 경애대왕(景哀大王)이 대사의 덕이 천하에 으뜸이고 명망이 해동(海東)에 두텁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아직 궁중으로 영접하여 피석(避席)의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중사(中使)인 최영(崔暎)을 보내어 봉조(鳳詔: 천자(天子)의 조서(詔書))를 전달하고 앙려(鴦廬: 왕실(王室)의 동서익랑(東西翼廊))로 초빙해서 왕도(王道)의 위급함을 부호(扶護: 도와서 보호함)하는 방법을 물었으며, 국사의 예를 표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0쪽.


입적

개청은 930년 보현사(普賢寺) 법당에서 나이 96세, 승랍 72세로 입적하였다.

Quote-left.png 동광(同光) 8년 9월 24일 보현산사 법당에서 입멸(入滅)하시니, 속년(俗年)은 96세요, 승랍은 72세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은 말랐으며, 땅은 갈라지고 시냇물도 고갈되었다. 도속(道俗)이 모두 슬퍼하고, 인천(人天)이 함께 애통해 하였다. 문인(門人)들도 추모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고, 국사(國士)들도 모두 통한에 잠겼다. 그 달 28일에 통곡하며 색신(色身)을 받들어 지장선원 서봉(西峰) 석실(石室)에 임시로 장사지냈으니, 절과의 거리는 약 300보쯤 되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2-153쪽.


개청이 입적하고 십 년 뒤,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평정한 후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허락하면서 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했다. 글씨는 명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썼다.[10] 940년에 개청을 위해 세운 탑비는 현재 강릉 보현사에 있으며, 1963년 보물 제192호로 지정되었다.[11]

Quote-left.png 임금님의 성문(聖文)은 세상에 뛰어난 신무(神武)이시고, 선천적으로 삼구(三駈)의 전략적 묘책을 타고나서 능히 삼한(三韓)을 평정하여 일거(一擧)에 가지런히 일통(一統)을 이룩하였다. 이젠 금경(金鏡)을 높이 매어 달고 널리 청구(靑丘)를 비추어 항상 백성을 휼민(恤愍)히 여기며 중흥의 운을 이루었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왕으로부터 외호(外護)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호를 낭원대사(朗圓大師), 탑명(塔名)을 오진지탑(悟眞之塔)이라 추증하고는,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훌륭한 비문을 지어 스님의 고매한 행적을 선양(宣揚)하라 하셨으나, 언위(彦撝)는 사림(詞林)의 말학(末學)이며, 금완(禁莞)의 미신(微臣)으로서 외람되게 왕명을 받들어 선사의 도덕을 찬양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54쪽.


지식 관계망

  • 낭원대사 개청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개청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 개청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강릉 보현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 강릉 보현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 고려 태조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범일 개청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사굴산문 범일 A는 B가 개창하였다 A ekc:founder B
개청 구례 화엄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개청 함양 엄천사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A edm:isRelatedTo B
개청 강릉 굴산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개청 강릉 보현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개청 강릉 보현사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개청 신라 경애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구족달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35년 개청이 태어남.
859년 개청구례 화엄사로 출가함.
930년 개청강릉 보현사에서 입적함.
940년 최언위개청을 위한 탑비의 비문을 완성함.
940년 개청의 탑비인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강릉 보현사에 건립됨.

주석

  1.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쪽.
  2. 냄새가 강하고 독특한 다섯 가지 채소. 마늘·파·부추·달래·생강. 경론(經論)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 일정하지 않음.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오신채",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본 비문 중 대사(大師)의 탄생이 대중(大中) 8년(854년)이고, 입적이 동광(同光) 8년(930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입적시 대사의 나이가 96세, 승랍이 72세라 하였으니 이는 2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대중 8년은 오기(誤記)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언어를 떠난 깨달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깨달음. 도장이 진실·확실을 나타내듯, 깨달음도 그러하므로 인(印)이라 함.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심인",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개청",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8.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김흥삼,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탑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

  •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32-157쪽.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개청",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