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의 혼례식 - 왕실의 혼례 절차와 복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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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揀擇)과 육례(六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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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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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6월, 창경궁에서 66세의 [[영조|영조]]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정순왕후]]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1759)에 담긴 영조-정순왕후의 혼례 기록은 조선 후기 왕실의 혼례 절차와 왕실의 사람들이 입었던 복식에 대해 알게 한다.  
 
1759년 6월, 창경궁에서 66세의 [[영조|영조]]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정순왕후]]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1759)에 담긴 영조-정순왕후의 혼례 기록은 조선 후기 왕실의 혼례 절차와 왕실의 사람들이 입었던 복식에 대해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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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도감의궤===
 
===가례도감의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는 의궤 전담 기구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23155&cid=50826&categoryId=50826 의궤청(儀軌廳)]에서 편찬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1759)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가례(嘉禮)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8192 오례]의 하나로 왕실의 경사를 이르는 말이다. 가례에 속하는 의식을 주관하는 기관이 [[가례도감]]이고, 의식이 끝난 후 설치된 의궤청에서 편찬한 의례의 시행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례도감의궤』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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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는 의궤 전담 기구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23155&cid=50826&categoryId=50826 의궤청(儀軌廳)]에서 편찬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가례(嘉禮)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8192 오례]의 하나로 왕실의 경사를 이르는 말이다. 가례에 속하는 의식을 주관하는 기관이 [[가례도감]]이고, 의식이 끝난 후 설치된 의궤청에서 편찬한 의례의 시행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례도감의궤』이다.<br />
 
원래 가례는 국혼(國婚)·즉위(卽位)·책봉(册封)·사연(賜宴)·노부(鹵簿) 등의 의식예법을 포함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기록된 『가례도감의궤』는 모두 왕·왕세자의 혼례에 관한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는, 왕의 가례 9건, 왕세자의 가례 9건, 왕세손의 가례 1건, 황태자의 가례 1건이 있으며, 그 지위에 따라 격을 달리하여 행해졌다.
 
원래 가례는 국혼(國婚)·즉위(卽位)·책봉(册封)·사연(賜宴)·노부(鹵簿) 등의 의식예법을 포함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기록된 『가례도감의궤』는 모두 왕·왕세자의 혼례에 관한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는, 왕의 가례 9건, 왕세자의 가례 9건, 왕세손의 가례 1건, 황태자의 가례 1건이 있으며, 그 지위에 따라 격을 달리하여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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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만혼에 대한 의론====
 
====영조의 만혼에 대한 의론====
1757년 2월 15일(음력), [[영조|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정성왕후]]가 승하하였다. 삼년상을 치루고 난 뒤인 1759년 5월 3일, 대신과 예조당상은 오래도록 국모의 자리를 비워놓을 수 없다며 새로운 중전을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영조는 이를 거절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05003_004 대신과 예조 당상이 곤위의 가례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3일 임오 4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러나 동월 6일, 영조는 중전의 자리가 비었음에도 임금이 늙어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부사(領府事)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 관직을 박탈하여 한양 밖으로 쫒아버리고(門外黜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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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2월 15일(음력), [[영조|영조]]의 정비인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84%B1%EC%99%95%ED%9B%84 정성왕후]가 승하하였다. 삼년상을 치루고 난 뒤인 1759년 5월 3일, 대신과 예조당상은 오래도록 국모의 자리를 비워놓을 수 없다며 새로운 중전을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영조는 이를 거절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05003_004 대신과 예조 당상이 곤위의 가례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3일 임오 4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러나 동월 6일, 영조는 중전의 자리가 비었음에도 임금이 늙어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부사(領府事)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 관직을 박탈하여 한양 밖으로 쫒아버리고(門外黜送)  
 
<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05006_001 인원 왕후의 부묘례를 행하고, 조재호를 부처하고 유척기를 문외 출송토록 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6일 을유 1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바로 다음날인 7일, 혼례(婚禮)의 대사(大事)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05007_002 혼례의 대사에서 주원의 동뢰 연상 이외에는 모든 반상을 제거토록 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7일 병술 2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05006_001 인원 왕후의 부묘례를 행하고, 조재호를 부처하고 유척기를 문외 출송토록 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6일 을유 1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바로 다음날인 7일, 혼례(婚禮)의 대사(大事)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3505007_002 혼례의 대사에서 주원의 동뢰 연상 이외에는 모든 반상을 제거토록 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7일 병술 2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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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재혼 의지 표명 이후 간택에서 혼례식까지 혼례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ref>"[http://blog.naver.com/side8102/150000730086 왕비 및 왕세자빈 간택 절차]", 『네이버 블로그 - 수훈이의 역사 공간』, 작성일: 2017년 03월 08일.</ref>
 
영조의 재혼 의지 표명 이후 간택에서 혼례식까지 혼례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ref>"[http://blog.naver.com/side8102/150000730086 왕비 및 왕세자빈 간택 절차]", 『네이버 블로그 - 수훈이의 역사 공간』, 작성일: 2017년 03월 08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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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절차의 첫 단계는 전국의 사대부가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는 것이다. 금혼령이 내려지자 예조에서 해당하는 사대부가 처녀들의 처녀단자를 모아 간택단자를 만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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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절차의 첫 단계는 전국의 사대부가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는 것이다. 금혼령이 내려지자 예조에서 해당하는 사대부가 처녀들의 처녀단자를 모아 간택단자를 만들어 올렸다. 이후 3차례의 간택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유학 김한구의 딸이 적임자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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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
! width=20%| 1759년 금혼령 및 간택단자 || 1759년 6월 2일 [[초간택]] || 1759년 6월 4일 [[재간택]] || 1759년 6월 9일 [[삼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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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20%| 1759년 금혼령 및 간택단자 || 1759년 6월 2일 [[간택|초간택]] || 1759년 6월 4일 [[간택|재간택]] || 1759년 6월 9일 [[간택|삼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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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학 김한구(金漢耉, 경주김씨)의 딸<br />현감 김노(金魯, 연안김씨)의 딸<br />유학 어석주(魚錫疇, 함종어씨)의 딸<br />유학 윤득행(尹得行, 해평 윤씨)<br/>전 주서 김재록(金載祿, 연안 김씨)의 딸<br />생원 유간(兪墾, 기계 유씨)의 딸 || 유학 김한구의 딸<br />현감 김노의 딸<br />유학 윤득행의 딸 || 유학 김한구의 딸
 
| - || 유학 김한구(金漢耉, 경주김씨)의 딸<br />현감 김노(金魯, 연안김씨)의 딸<br />유학 어석주(魚錫疇, 함종어씨)의 딸<br />유학 윤득행(尹得行, 해평 윤씨)<br/>전 주서 김재록(金載祿, 연안 김씨)의 딸<br />생원 유간(兪墾, 기계 유씨)의 딸 || 유학 김한구의 딸<br />현감 김노의 딸<br />유학 윤득행의 딸 || 유학 김한구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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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간택 이후, 육례에 따라 본격적인 의식 절차가 진행되었다. 여섯 가지 예법 즉 육례(六禮)는 국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인 [[납채|납채(納采)]],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징|납징(納徵)]], 책비(冊妃)와 친영(親迎)의 날짜를 잡는 [[고기|고기(告期)]],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책비(冊妃)]], 국왕이 별궁으로 가서 신부를 모셔오는 [[친영|친영(親迎)]], 국왕과 왕비가 함께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는 의식인 [[동뢰|동뢰(同牢)]]로 구성된다. 육례의 혼례 절차에 맞추어 영조와 정순왕후는 그 예법에 따른 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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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간택 이후, 육례에 따라 본격적인 의식 절차가 진행되었다. 여섯 가지 예법 즉 육례(六禮)는 국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인 [[납채|납채(納采)]],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폐|납폐(納幣)]], 책비(冊妃)와 친영(親迎)의 날짜를 잡는 [[고기|고기(告期)]],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책비(冊妃)]], 국왕이 별궁으로 가서 신부를 모셔오는 [[친영|친영(親迎)]], 국왕과 왕비가 함께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는 의식인 [[동뢰|동뢰(同牢)]]로 구성된다. 육례의 혼례 절차에 맞추어 영조와 정순왕후는 그 예법에 따른 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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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
! width=4%| 의례일시 || 1759년 6월 13일 [[납채]] || 1759년 6월 17일 [[납징]] || 1759년 6월 19일 [[고기]] || 1759년 6월 20일 [[책비]] || 1759년 6월 22일 [[친영]] || 1759년 6월 22일 [[동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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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4%| 의례일자 || 1759년 6월 13일 [[납채]] || 1759년 6월 17일 [[납폐]] || 1759년 6월 19일 [[고기]] || 1759년 6월 20일 [[책비]] || 1759년 6월 22일 [[친영]] || 1759년 6월 22일 [[동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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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용복식''' || 영조 : [[왕의 대례복]] || 영조 : [[왕의 조복]] || 영조 : [[왕의 조복]] || 정순왕후 : [[왕비의 대례복]] || 영조 : [[왕의 대례복]]<br />정순왕후 : [[왕비의 소례복]] || 영조 : [[왕의 대례복]]<br />정순왕후 : [[왕비의 대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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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용복식''' || 영조 : [[왕의 대례복]] || 영조 : [[왕의 조복]] || 영조 : [[왕의 조복]] || 영조 : [[왕의 조복]]<br />정순왕후 : [[왕비의 대례복]] || 영조 : [[왕의 대례복]]<br />정순왕후 : [[왕비의 소례복]] || 영조 : [[왕의 대례복]]<br />정순왕후 : [[왕비의 대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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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례장소''' || [[명정전]] || [[명정전]] || [[명정전]] || [[명정전]] || [[어의궁]] || [[통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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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례장소''' || [[창경궁 명정전]] || [[창경궁 명정전]] || [[창경궁 명정전]] || [[창경궁 명정전]] || [[어의궁]] || [[창경궁 통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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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순왕후 혼례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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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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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도감의궤』의 말미에는 의례의 절차를 그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557 반차도]가 수록되어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도 50면에 달하는 반차도가 있다. 이 반차도는 왕실 혼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있는 친영 행렬을 그린 것으로, 의례 전 실수를 줄이기 위해 미리 제작되었다.<br />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인은 재혼이었으므로 전례보다 간소하게 치뤘다고 한다. 그럼에 불구하고 이 때 혼수비용으로 쓰인 예산은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할 경우 7억 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고 한다. (영조 25년(1749년)에 편찬된 '국혼정례'에 따르면 .... ) 예식에 쓰인 혼례 물품과 참례자들의 복식이 가례도감의궤에 그림으로 묘사되어 이 예식의 성대함을 가늠할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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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도는 크게 왕의 행렬과 왕비의 행렬로 나눠진다. 왕비의 행렬 앞에는 책봉과 관련된 [[교명|교명(敎命)]], [[옥책|옥책(玉冊)]], [[금보|금보(金寶)]], 명복(明服)을 실은 가마가 있으며 안의 물품은 의궤 내 도설로 그려져 있다.
 
 
====반차도====
 
왕이 왕비의 임시 거처인 별궁으로 나아가 궁으로 모시고 돌아오는 친영의 행렬 장면은 가례도감의궤 말미에 친영 반차도로 기록되어 있다. 친영 행렬의 구성은 크게 선도 행렬, 어가 행렬, 왕비 행렬, 수행 행렬의 순으로 나눌 수 있다. 친영의 앞부분을 구성하는 선도행렬에는 왕을 상징하는 장엄하고 화려한 의장물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 호위무사들이 수행하는 어가 행렬이 이어진다. 뒤이어 왕비 책봉에 관련된 [[교명|교명문]], [[금보|금보]], [[옥책|옥책]], 명복 등을 실은 가마가 따르고, 이어 왕비의 가마와 이를 따르는 수행인물들이 이어진다. 후반부는 행차를 마무리하는 부분으로, 후미에서 행렬을 경호하는 인물들이 따른다. 친영을 왕실 가례의 핵심 장면으로 중히 여겼기에 가례도감의궤 반차도는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맡아 그렸고, 귀한 천연 물감을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특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감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혼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복식'''과 가마ㆍ의장기ㆍ각종 '''기물'''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며 '''반차도 VR'''을 통해 보여줄 예정...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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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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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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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정순왕후 친영 반차도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가상 현실|『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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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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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관련 항목'''==
  
 
===중심 기사===
 
===중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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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crimson"><small>'''의궤'''</small></font>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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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steelblue"><small>'''복장'''</small></font> [[왕의 대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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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steelblue"><small>'''복장'''</small></font> [[왕의 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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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steelblue"><small>'''복장'''</small></font> [[왕비의 대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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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steelblue"><small>'''복장'''</small></font> [[왕비의 소례복]]
  
 
===문맥 기사===
 
===문맥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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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green"><small>'''인물'''</small></font>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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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green"><small>'''인물'''</small></font>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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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orange"><small>'''개념'''</small></font> [[납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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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orange"><small>'''개념'''</small></font> [[납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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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orange"><small>'''개념'''</small></font>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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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orange"><small>'''개념'''</small></font> [[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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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orange"><small>'''개념'''</small></font> [[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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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orange"><small>'''개념'''</small></font> [[동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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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violet"><small>'''물품'''</small></font> [[겹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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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violet"><small>'''물품'''</small></font> [[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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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violet"><small>'''물품'''</small></font> [[은봉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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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violet"><small>'''물품'''</small></font> [[쌍이단엽황금잔]]
 +
* <font color="violet"><small>'''물품'''</small></font> [[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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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gray"><small>'''장소'''</small></font> [[창경궁 명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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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gray"><small>'''장소'''</small></font> [[어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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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gray"><small>'''장소'''</small></font> [[창경궁 통명전]]
  
 
===관련 내용===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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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text-align:center; width:100%; background:white;"  
<font color="red">노드와 링크를 담은 표</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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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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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 [[영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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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 [[정순왕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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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 [[왕의 조복]] || A는 B를 착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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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조복]]  || [[납폐]] || A는 B에서 착용된다 || 1759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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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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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가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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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정보===
 
===공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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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7.5238506 || 126.9804702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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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7.4621075 || 126.9502654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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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7.5787711 || 126.9948701 || 영조-정순왕후의 [[납채]], [[납폐]], [[고기]], [[책비]]는 [[창경궁 명정전]]에서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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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79686 || 126.993676 || 영조-정순왕후의 [[동뢰]]는 [[창경궁 통명전]]에서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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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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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전거===
 
===출처/전거===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온라인 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온라인 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한국학술정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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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온라인 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의궤 종합정보』<sup>online</sup></online></html>,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더 읽을거리===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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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한국학술정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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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효형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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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신병주, 박례경, 송지원, 이은주, 『왕실의 혼례식 풍경』(돌베개, 2013).
 
*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임민혁, 『조선국왕 장가 보내기』(글항아리, 2017).
 
*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임민혁, 『조선국왕 장가 보내기』(글항아리, 2017).
  
 
===유용한 정보===
 
===유용한 정보===
 
* 역대 왕비 왕세자빈의 간택의 시간적 경과 정리 ☞ "[http://blog.naver.com/side8102/150000730086 왕비 및 왕세자빈 간택 절차]", '수훈이의 역사 공간', 『네이버 블로그』(게재일: 2017년 03월 08일).
 
* 역대 왕비 왕세자빈의 간택의 시간적 경과 정리 ☞ "[http://blog.naver.com/side8102/150000730086 왕비 및 왕세자빈 간택 절차]", '수훈이의 역사 공간', 『네이버 블로그』(게재일: 2017년 03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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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궁중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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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기획기사]]

2017년 9월 19일 (화) 17:0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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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759년 6월, 창경궁에서 66세의 영조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1759)에 담긴 영조-정순왕후의 혼례 기록은 조선 후기 왕실의 혼례 절차와 왕실의 사람들이 입었던 복식에 대해 알게 한다.

내용

가례도감의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는 의궤 전담 기구인 의궤청(儀軌廳)에서 편찬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가례(嘉禮)는 오례의 하나로 왕실의 경사를 이르는 말이다. 가례에 속하는 의식을 주관하는 기관이 가례도감이고, 의식이 끝난 후 설치된 의궤청에서 편찬한 의례의 시행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례도감의궤』이다.
원래 가례는 국혼(國婚)·즉위(卽位)·책봉(册封)·사연(賜宴)·노부(鹵簿) 등의 의식예법을 포함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기록된 『가례도감의궤』는 모두 왕·왕세자의 혼례에 관한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는, 왕의 가례 9건, 왕세자의 가례 9건, 왕세손의 가례 1건, 황태자의 가례 1건이 있으며, 그 지위에 따라 격을 달리하여 행해졌다.

영조-정순왕후 혼례 절차

영조의 만혼에 대한 의론

1757년 2월 15일(음력),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였다. 삼년상을 치루고 난 뒤인 1759년 5월 3일, 대신과 예조당상은 오래도록 국모의 자리를 비워놓을 수 없다며 새로운 중전을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영조는 이를 거절하였다.[1] 그러나 동월 6일, 영조는 중전의 자리가 비었음에도 임금이 늙어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부사(領府事)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 관직을 박탈하여 한양 밖으로 쫒아버리고(門外黜送) [2] 바로 다음날인 7일, 혼례(婚禮)의 대사(大事)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있다.[3]

간택(揀擇)과 육례(六禮)

영조의 재혼 의지 표명 이후 간택에서 혼례식까지 혼례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4]
혼례 절차의 첫 단계는 전국의 사대부가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는 것이다. 금혼령이 내려지자 예조에서 해당하는 사대부가 처녀들의 처녀단자를 모아 간택단자를 만들어 올렸다. 이후 3차례의 간택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유학 김한구의 딸이 적임자로 결정되었다.

1759년 금혼령 및 간택단자 1759년 6월 2일 초간택 1759년 6월 4일 재간택 1759년 6월 9일 삼간택
- 유학 김한구(金漢耉, 경주김씨)의 딸
현감 김노(金魯, 연안김씨)의 딸
유학 어석주(魚錫疇, 함종어씨)의 딸
유학 윤득행(尹得行, 해평 윤씨)
전 주서 김재록(金載祿, 연안 김씨)의 딸
생원 유간(兪墾, 기계 유씨)의 딸
유학 김한구의 딸
현감 김노의 딸
유학 윤득행의 딸
유학 김한구의 딸

왕비의 간택 이후, 육례에 따라 본격적인 의식 절차가 진행되었다. 여섯 가지 예법 즉 육례(六禮)는 국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인 납채(納采),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 책비(冊妃)와 친영(親迎)의 날짜를 잡는 고기(告期),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冊妃), 국왕이 별궁으로 가서 신부를 모셔오는 친영(親迎), 국왕과 왕비가 함께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는 의식인 동뢰(同牢)로 구성된다. 육례의 혼례 절차에 맞추어 영조와 정순왕후는 그 예법에 따른 옷을 입었다.

의례일자 1759년 6월 13일 납채 1759년 6월 17일 납폐 1759년 6월 19일 고기 1759년 6월 20일 책비 1759년 6월 22일 친영 1759년 6월 22일 동뢰
착용복식 영조 : 왕의 대례복 영조 : 왕의 조복 영조 : 왕의 조복 영조 : 왕의 조복
정순왕후 : 왕비의 대례복
영조 : 왕의 대례복
정순왕후 : 왕비의 소례복
영조 : 왕의 대례복
정순왕후 : 왕비의 대례복
의례장소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 명정전 어의궁 창경궁 통명전

반차도

『가례도감의궤』의 말미에는 의례의 절차를 그린 반차도가 수록되어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도 50면에 달하는 반차도가 있다. 이 반차도는 왕실 혼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친영 행렬을 그린 것으로, 의례 전 실수를 줄이기 위해 미리 제작되었다.
반차도는 크게 왕의 행렬과 왕비의 행렬로 나눠진다. 왕비의 행렬 앞에는 책봉과 관련된 교명(敎命), 옥책(玉冊), 금보(金寶), 명복(明服)을 실은 가마가 있으며 안의 물품은 의궤 내 도설로 그려져 있다.

지식 관계망

시각자료

가상 현실

갤러리

관련 항목

중심 기사

문맥 기사

관련 내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영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정순왕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혼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영조 왕의 대례복 A는 B를 착용한다
왕의 대례복 납채 A는 B에서 착용된다 1759년 6월 13일
왕의 대례복 친영 A는 B에서 착용된다 1759년 6월 22일
왕의 대례복 동뢰 A는 B에서 착용된다 1759년 6월 22일
영조 왕의 조복 A는 B를 착용한다
왕의 조복 납폐 A는 B에서 착용된다 1759년 6월 17일
왕의 대례복 고기 A는 B에서 착용된다 1759년 6월 19일
정순왕후 왕비의 대례복 A는 B를 착용한다
왕비의 대례복 책비 A는 B에서 착용된다 1759년 6월 20일
왕비의 대례복 동뢰 A는 B에서 착용된다 1759년 6월 22일
정순왕후 왕비의 소례복 A는 B를 착용한다
왕비의 소례복 친영 A는 B에서 착용된다 1759년 6월 22일

시간 정보

시간 내용
1759년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가 작성되었다.

공간 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238506 126.9804702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7.4621075 126.9502654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37.5787711 126.9948701 영조-정순왕후의 납채, 납폐, 고기, 책비창경궁 명정전에서 행해졌다.
37.579686 126.993676 영조-정순왕후의 동뢰창경궁 통명전에서 행해졌다.

주석

  1. "대신과 예조 당상이 곤위의 가례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3일 임오 4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인원 왕후의 부묘례를 행하고, 조재호를 부처하고 유척기를 문외 출송토록 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6일 을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혼례의 대사에서 주원의 동뢰 연상 이외에는 모든 반상을 제거토록 하다",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7일 병술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왕비 및 왕세자빈 간택 절차", 『네이버 블로그 - 수훈이의 역사 공간』, 작성일: 2017년 03월 08일.

참고 자료

출처/전거

  • 『영조실록』 93권, 영조 35년 5월. 온라인 참조: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온라인 참조: 『의궤 종합정보』online,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더 읽을거리

  • 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한국학술정보, 2006).
  • 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효형출판, 2001).
  • 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신병주, 박례경, 송지원, 이은주, 『왕실의 혼례식 풍경』(돌베개, 2013).
  • 영조-정순왕후의 혼례에 관한 자세한 지식 ☞ 임민혁, 『조선국왕 장가 보내기』(글항아리, 2017).

유용한 정보

  • 역대 왕비 왕세자빈의 간택의 시간적 경과 정리 ☞ "왕비 및 왕세자빈 간택 절차", '수훈이의 역사 공간', 『네이버 블로그』(게재일: 2017년 03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