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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곡 서필원에 대해 경기문화재단이 엮은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인물』은 “서인 중 한당 계열 관료로서 민본과 변통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경세가”라고 평가했다. 효종 때 김육과 함께 대동법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이다. 붕당에 기댄 활동보다 신념과 사상에 의한 활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필원은 58세가 되는 1671년에 사망했다. 당시 병조판서였지만 기록적인 재난으로 백만에 가까운 이들이 죽은 경신대기근을 피해갈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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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필원은 역사학계에서 그 연구가 미진하지만 17세기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조선왕조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한 ‘실무관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필원은 지방관일 때는 지방에 누적된 폐단을 개선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중앙에 올라와서는 소신의 정치를 추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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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곡 서필원에 대해 경기문화재단이 엮은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인물』은 “서인 중 한당 계열 관료로서 민본과 변통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경세가”라고 평가했다. 효종 때 김육과 함께 대동법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이다. 붕당에 기댄 활동보다 신념과 사상에 의한 활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필원은 58세가 되는 1671년에 사망했다. 당시 병조판서였지만 기록적인 재난으로 백만에 가까운 이들이 죽은 경신대기근을 피해갈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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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필원은 역사학계에서 그 연구가 미진하지만 17세기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조선왕조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한 ‘실무관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필원은 지방관일 때는 지방에 누적된 폐단을 개선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중앙에 올라와서는 소신의 정치를 추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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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서인계열은 낙당, 원당, 산당, 한당이라는 4개의 분파로 구분돼 있었다. 낙당과 원당은 상낙부원군 김자정과 원평부원군 원두표를 각기 영수로 뒀다. 이른바 공신세력에서 나온 분파라고 할 수 있다. 산당은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영수로 둔 분파다. 모두 충천도 연산, 회덕의 산속 사람들이라 산당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한당은 김육과 신면을 중심으로 대개 서울과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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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종 때 김육이 정승이 되면서 한당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이 때 김육은 대동법 시행과 화폐사용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김자점의 역모에 한당 영수인 신면이 연루됐다는 의혹에 장살되기도 하지만 김육은 대동법을 추진해 나갔다. 서필원도 김육과 함께 대동법 시행을 이끌었고 김육이 부국강병을 노리는 효종과의 갈등으로 물러났을 때도 대동법의 실무를 이어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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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필원이 대동법 시행의 맡은 것은 1656년 총청감사에 제수되면서다. 당시 이조가 충청감사 적임자를 찾지 못하자 효종이 직접 이조정랑이던 서필원을 지목했다. 이조정랑(5품)에서 충청감사(종2품 가선대부)으로의 승진은 당시로서도 파격이었다. 그만큼의 서필원의 대한 효종의 신망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기간 동안 호서대동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서원의 남설금지, 충청병영의 산성이전, 충청 수군의 폐단 개혁 등을 추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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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어 1658년 서필원은 전라감사에 임명됐다. 호서대동법이 긍정적 효과를 보자 전라도의 대동법 시행을 위한 조치였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서필원은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백성을 구휼을 위해 노력했다. 1659년 전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봉록을 내어 백성을 구휼하고, 소 전염병으로 경작이 어려울 때는 다른 지방에서 소를 얻어 나눠주기도 했다. 이를 공덕을 기려 주민들이 논산군 황화정에 인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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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에 있다. 이곳은 효종이 자신의 동생인 인평대군에게 정해준 자리인데, 숙종이 서필원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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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서준호(고려)|서준호]](徐俊豪 창신교위충무위부사직) | *********** 손자: [[서준호(고려)|서준호]](徐俊豪 창신교위충무위부사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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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서준영(고려1)|서준영]]:(徐俊英 충순위공파) | *********** 손자: [[서준영(고려1)|서준영]]:(徐俊英 충순위공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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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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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사항 == | == 생애 및 활동사항 == |
2024년 7월 7일 (일) 22:38 기준 최신판
서필원(徐必遠 병조판서):정의공파
목차
정의
조선후기 형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부여 서씨(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만죽헌(萬竹軒) 서익(徐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룡갑(徐龍甲)이고, 아버지는 서운기(徐雲驥)이다. 어머니는 이택민(李澤民)의 딸이다.
서필원 묘위치는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산26
현재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있는 서필원 인정비.
직언하는 소신의 경세 관료, 서필원
“민본과 변통을 중시하는 실천적 경세가”
육곡 서필원에 대해 경기문화재단이 엮은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인물』은 “서인 중 한당 계열 관료로서 민본과 변통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경세가”라고 평가했다. 효종 때 김육과 함께 대동법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이다. 붕당에 기댄 활동보다 신념과 사상에 의한 활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필원은 58세가 되는 1671년에 사망했다. 당시 병조판서였지만 기록적인 재난으로 백만에 가까운 이들이 죽은 경신대기근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서필원은 역사학계에서 그 연구가 미진하지만 17세기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조선왕조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한 ‘실무관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필원은 지방관일 때는 지방에 누적된 폐단을 개선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중앙에 올라와서는 소신의 정치를 추구했다.
“민본과 변통을 중시하는 실천적 경세가”
육곡 서필원에 대해 경기문화재단이 엮은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인물』은 “서인 중 한당 계열 관료로서 민본과 변통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경세가”라고 평가했다. 효종 때 김육과 함께 대동법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이다. 붕당에 기댄 활동보다 신념과 사상에 의한 활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필원은 58세가 되는 1671년에 사망했다. 당시 병조판서였지만 기록적인 재난으로 백만에 가까운 이들이 죽은 경신대기근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서필원은 역사학계에서 그 연구가 미진하지만 17세기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조선왕조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한 ‘실무관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필원은 지방관일 때는 지방에 누적된 폐단을 개선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중앙에 올라와서는 소신의 정치를 추구했다.
당시 서인계열은 낙당, 원당, 산당, 한당이라는 4개의 분파로 구분돼 있었다. 낙당과 원당은 상낙부원군 김자정과 원평부원군 원두표를 각기 영수로 뒀다. 이른바 공신세력에서 나온 분파라고 할 수 있다. 산당은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영수로 둔 분파다. 모두 충천도 연산, 회덕의 산속 사람들이라 산당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한당은 김육과 신면을 중심으로 대개 서울과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효종 때 김육이 정승이 되면서 한당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이 때 김육은 대동법 시행과 화폐사용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김자점의 역모에 한당 영수인 신면이 연루됐다는 의혹에 장살되기도 하지만 김육은 대동법을 추진해 나갔다. 서필원도 김육과 함께 대동법 시행을 이끌었고 김육이 부국강병을 노리는 효종과의 갈등으로 물러났을 때도 대동법의 실무를 이어갔다.
서필원이 대동법 시행의 맡은 것은 1656년 총청감사에 제수되면서다. 당시 이조가 충청감사 적임자를 찾지 못하자 효종이 직접 이조정랑이던 서필원을 지목했다. 이조정랑(5품)에서 충청감사(종2품 가선대부)으로의 승진은 당시로서도 파격이었다. 그만큼의 서필원의 대한 효종의 신망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기간 동안 호서대동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서원의 남설금지, 충청병영의 산성이전, 충청 수군의 폐단 개혁 등을 추진했다.
이어 1658년 서필원은 전라감사에 임명됐다. 호서대동법이 긍정적 효과를 보자 전라도의 대동법 시행을 위한 조치였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서필원은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백성을 구휼을 위해 노력했다. 1659년 전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봉록을 내어 백성을 구휼하고, 소 전염병으로 경작이 어려울 때는 다른 지방에서 소를 얻어 나눠주기도 했다. 이를 공덕을 기려 주민들이 논산군 황화정에 인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에 있다. 이곳은 효종이 자신의 동생인 인평대군에게 정해준 자리인데, 숙종이 서필원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직계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부여융)의 원손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 아간공 (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5세 후손인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생애 및 활동사항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김집(金集)과 정홍명(鄭弘溟)에게 수학하였다. 1643년(인조 21)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사옹원봉사가 되었으며, 164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관을 거쳐 예문관검열과 설서(說書)를 역임하고 1654년(효종 5)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뒤 사간원헌납·이조좌랑·평안도어사를 거쳤다.
1656년 수찬을 비롯,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이조정랑 등을 지내다 충청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서원의 폐단을 보고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1658년 대사간과 승지를 거쳐 전남도감사가 되었을 때, 대동법(大同法) 시행에 찬동하여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하였다. 또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왕대비의 삭선(朔膳)을 감할 것을 청했다가 추고되었다.
1659년 진휼을 위해 속미(贖米)를 받고 중죄인을 석방했다가 파직당하였다. 현종 초년 병조참의·승지·대사성·예조참의·이조참의 등을 거쳐, 1663년(현종 4) 대사간·승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목면 재배를 권장하고 구휼 사업에 힘쓰기도 하였다. 특히 육진혁막제조(六鎭革瘼諸條)를 올려 그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는 데 앞장섰다.
1663년 11월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수찬 김만균(金萬均)은 현종을 배종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병자호란 당시 그의 할머니가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이유로 배종할 수 없다며 사직을 요청하였다. 서필원은 이 문제에 대해 사적인 정보다 공의(公義)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김만균의 사직을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김만균을 불충(不忠)이라는 이유로 파직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듯하였지만 이듬해 송시열이 사의(私義)를 강조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공의·사의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결국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山黨) 계열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서필원은 일시 파직되기도 하였다.
1665년에 강화유수가 되었고 그 뒤 형조참판,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그 해 죽었다.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많이 하였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나서 그 시대 이상진(李尙眞) 등과 함께 오직(五直)이라 불렸다. 시호는 정의(貞毅)이다.
저서로는 『육곡유고(六谷遺稿)』가 있다.
부여 서씨 광석리 집성촌(扶餘 徐氏 廣石里 集姓村)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관련항목 보기에 있는 부여 서씨 집성촌. 족보에 의하면 부여 서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인 부여융(서융)(徐隆)이지만, 문중은 고려 시대에 병부 상서를 지낸 서존(徐存)을 시조로 본다. 후손은 주로 평안남도 개천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부여 서씨 전체 인구는 2000년 기준으로 4,486가구 1만 4312명이었다.
부여 서씨 광석리(廣石里) 집성촌의 입향조(入鄕祖)는 서존의 17세손인 육곡(六谷) 서필원(徐必遠)[1614~1671]이다. 서필원의 집안은 16세기 이래 중앙의 훈척(勳戚) 집안과 혼인해 두각을 드러내고 점차 명문가로 발돋움한 경기도 지방 가문이었다. 서필원은 집권 세력인 서인(西人) 계열 중에 국왕 중심의 정치를 추구한 김육(金堉)의 한당(漢黨)에 속하였으며, 사림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는 송시열(宋時烈) 계의 산당(山黨)을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후일 소론(小論)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서필원의 묘는 현재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광릉촌에 있는데, 이곳은 원래 효종의 사위인 인평위(寅平尉) 집안에 내려진 땅이었지만 현종이 서필원의 공적을 감안해 묏자리로 특별히 하사하였다. 한편 후에 서필원에게 정의(貞毅)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부여 서씨 문중의 인물로는 유일한 일이었다. 따라서 부여 서씨 문중은 정의공파(貞毅公派)를 만들어 이를 기념하고 있다. 집성촌은 18세기 중반에 서필원의 6세손인 서재록(徐在祿)[1742~1820]이 5대조인 서필원 등 선대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고향인 충남 논산을 떠나 서필원의 묘소 옆으로 이주했던 1770년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7~8대를 거치면서 양주 및 서울·경기도 파주시·경기도 연천군 일대에서 혼인하며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조사한 양주 지역 54개 집성촌에 포함되지 않았다. 1977년 14가구[광적면 전체], 1992년 약 15가구였다. 해방 이후 집성촌이 한창 번성하였을 때는 30호에 달하였으나 2010년 7가구가 거주하다가 2011년 현재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종손 등 3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과거에서 이어지는 혼맥(婚脈)을 유지하고 있다. 주요 행사는 매년 음력 10월 4일 지내는 시제(時祭)이며, 양력 8월 15일 전후에 벌초를 한다. 선산에 약 30기의 묘가 있다. 종손인 서형관은 현재 『육곡집(六谷集)』, 『인척가계초』 등 다수의 고문헌을 소장하고 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