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도강영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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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홍가신(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 37년(1604)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허목|허목(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채제공|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35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조선 영조|영조]]의 세자폐위 문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는데 이로인해 [[조선 영조|영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으로 행정의 최고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수원성]] 건설에도 참여하였으며 『[[경종내실록]]』, 『[[영종실록]]』, 『[[국조보감]]』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말 부여현의 관아 건물이던 것을 1971년 신축하여 이들을 모신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영당은 앞면 1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을 마련하고 뒤쪽은 통칸으로 3인의 영정을 모셨다.<ref>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31,01160000,34&queryText= 도강영당]",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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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허목]]·[[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영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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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홍가신(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 37년(1604)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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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허목(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도, 벼슬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이르렀다.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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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35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조선 영조|영조]]의 세자폐위 문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는데 이로 인해 [[조선 영조|영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으로 행정의 최고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수원성]] 건설에도 참여하였으며 『[[경종내실록]]』, 『[[영종실록]]』, 『[[국조보감]]』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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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원래 조선말 부여현의 관아이던 것을 1971년 신축하여 이들의 영정을 안치한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앞면 1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을 마련하고 뒤쪽은 통칸으로 3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ref>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31,01160000,34&queryText= 도강영당]",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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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2일 (금) 00:08 기준 최신판

부여 도강영당
(扶餘 道江影堂)
"도강영당",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
대표명칭 부여 도강영당
한자표기 扶餘 道江影堂
시대 조선시대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지정일 1984년 5월 17일
소장처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40-1번지
수량 1 동
관련인물 홍가신, 허목, 체재공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있는 영당이다.

내용

홍가신·허목·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영당이다.

홍가신(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 37년(1604)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허목(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도, 벼슬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이르렀다.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35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영조의 세자폐위 문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는데 이로 인해 영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으로 행정의 최고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수원성 건설에도 참여하였으며 『경종내실록』, 『영종실록』, 『국조보감』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말 부여현의 관아이던 것을 1971년 신축하여 이들의 영정을 안치한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앞면 1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을 마련하고 뒤쪽은 통칸으로 3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1]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부여 도강영당 홍가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부여 도강영당 허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부여 도강영당 채제공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채제공 초상(흑단령포본) 채제공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채제공 초상(흑단령포본) 부여 도강영당 A는 B에 봉안되어 있었다 A ekc:former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1년 부여현 관아 건물을 도강영당으로 신축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도강영당",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웹자원
    • "도강영당",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