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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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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ref> 원영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730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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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이름이다.<ref> 원영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730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내용==
조선 태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듬해인 1395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으로 [[경성부]]로 개칭될 때까지 516년간 사용한 조선 왕조 수도의 행정구역명이자 관청명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에 해당한다. <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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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듬해인 1395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으로 [[경성부]]로 개칭될 때까지 516년간 사용한 조선 왕조 수도의 행정구역명이자 관청명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에 해당한다. <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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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의 지리적 범위===
 
===한성부의 지리적 범위===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의 지역)였다. 지리적 범위는 대략 북으로 북한산, 남으로 한강 노도, 동으로 중랑천, 서로 사천(모래내)에 이르렀고, 도성의 범위는 백악산(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연결해 쌓은 둘레 약 18km의 성곽 안쪽이었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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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의 지역)가 한성부에 속하였다. 지리적 범위는 대략 북으로 북한산, 남으로 한강 노들, 동으로 중랑천, 서로 사천(모래내)에 이르렀고, 도성의 범위는 백악산(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연결해 쌓은 둘레 약 18km의 성곽 안쪽이었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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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의 관할업무===  
 
===한성부의 관할업무===  
크게 호적·혼인·시전·부역·진휼·풍속 관리 등 행정업무와 도로·화재·공공위생·시체검시 등 도시관리업무로 나누어진다.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사송관련 업무를 관할하는 조선시대 [[삼법사|삼법사(三法司)]] 중 하나로 사법기능도 부여되었는데, 주로 민사소송을 다루고 구타·절도·채무 관련 형사사건도 담당하였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호적관련 업무로 단지 한성부뿐 아니라 전국의 호적을 관장하였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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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호적·혼인·시전·부역·진휼·풍속 관리 등 행정업무와 도로·화재·공공위생·시체검시 등 도시관리업무로 나누어진다.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사송관련 업무를 관할하는 조선시대 [[삼법사|삼법사(三法司)]] 중 하나로 사법기능도 부여되었는데, 주로 민사소송을 다루고 구타·절도·채무 관련 형사사건도 담당하였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호적관련 업무로 단지 한성부뿐 아니라 전국의 호적을 관장하였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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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의 행정체계와 그 변화===
 
===한성부의 행정체계와 그 변화===
고려 말 [[개성부]]의 관제를 계승한 것으로,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하였다. 성종 5년(1474) 간행된 [[경국대전|<경국대전>]]에 따르면 예종 때 개편된 한성부 직제는 판윤 1명, 좌윤과 우윤 각 1명, 서윤 1명, 판관 2명, 참군 3명으로, 이 직제는 숙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중 6조판서와 동등한 정2품직 판윤은 현재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자리로 시기에 따라 판부사 또는 부윤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기별 차이는 있지만 종5품 이상 관직은 대략 6~8명이고, 실무직인 서리, 서사, 서원, 사령 등까지 합치면 관원수는 약 90명이었다. 실무는 기능별 관리조직인 육방조직이 담당하였는데, 호방은 호적과 시전·가옥 관리, 예방은 왕가의 간택과 묘지소송, 병방은 도성 내 순찰과 화재 관련, 형방은 시체검시와 치안, 공방은 도로·교량·하천 관리 업무를 맡았다. 지역별 하부조직은 5부(북부, 중부, 남부, 동부, 서부)로 구성되고, 5부의 하위조직으로 방(坊), 방의 하위조직으로 계(契)를 두었다. 태조 때는 5부 52방, 세종 때는 5부 49방이었고, 영조 때에는 5부 46방 328계로 구성되었다. 5부 방 체제에 편성된 몇 곳의 성저십리 지역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성 내부의 행정체제로 기능하였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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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개성부]]의 관제를 계승한 것이다. [[경국대전|『경국대전』]]에 따르면 예종 때 개편된 [[한성부]] 직제는 판윤 1명, 좌윤과 우윤 각 1명, 서윤 1명, 판관 2명, 참군 3명으로, 이 직제는 숙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중 6조판서와 동등한 정2품직 판윤은 현재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자리로 시기에 따라 판부사 또는 부윤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시기별 차이는 있지만 종5품 이상 관직은 대략 6~8명이고, 실무직인 서리, 서사, 서원, 사령 등까지 합치면 관원 수는 약 90명이었다. 실무는 기능별 관리조직인 육방조직이 담당하였다. 호방은 호적과 시전·가옥 관리, 예방은 왕가의 간택과 묘지소송, 병방은 도성 내 순찰과 화재 관련, 형방은 시체검시와 치안, 공방은 도로·교량·하천 관리 업무를 맡았다. 지역별 하부조직은 5부(북부, 중부, 남부, 동부, 서부)로 구성되고, 5부의 하위조직으로 방(坊), 방의 하위조직으로 계(契)를 두었다. 태조 때는 5부 52방, 세종 때는 5부 49방이었고, 영조 때에는 5부 46방 328계로 구성되었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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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관청의 위치===
 
===한성부 관청의 위치===
궁궐 앞 [[광화문]] [[육조거리]]의 [[호조]]와 [[이조]] 중간에 있었다. [[한성부]]의 인구는 세종 10년(1428) 당시 10만 9,372명(도성 내 10만 3,328명, 도성 외 6,044명)이었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 유럽 주요도시의 인구에 뒤지지 않는 수였다. 이후 정조 4년(1780)에는 인구가 약 2배로 증가하여 20만 1,070명이 거주하였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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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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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 서지언,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표현된 한성부 및 인근지역의 문화경관 해석」,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2.
 
** 이규철, 「대한제국기 한성부 도시공간의 재편」, 서울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0.
 
** 심은애, 「한성부 관아의 입지변화와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1865년부터 1910년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0.
 
** 김동수, 「조선초기(朝鮮初期) 한성부(漢城府)의 성립과 도시기능의 발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0.
 
** 이신우, 「18세기 서울의 주거문제와 도시확장책」,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6.
 
 
 
*저서
 
 
** 서울특별시 기획예산실 조직제도담당관, 『서울특별시 조직변천사 II』, 서울특별시, 2001.
 
** 서울특별시 기획예산실 조직제도담당관, 『서울특별시 조직변천사 II』, 서울특별시, 2001.
 
** 원영환, 『조선시대 한성부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0.
 
** 원영환, 『조선시대 한성부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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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 육백년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77.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 육백년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77.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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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원영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730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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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언,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표현된 한성부 및 인근지역의 문화경관 해석」,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전, 석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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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철, 「대한제국기 한성부 도시공간의 재편」, 서울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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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은애, 「한성부 관아의 입지변화와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1865년부터 1910년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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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수, 「조선초기(朝鮮初期) 한성부(漢城府)의 성립과 도시기능의 발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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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우, 「18세기 서울의 주거문제와 도시확장책」,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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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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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영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730 한성부(漢城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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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252&cid=40942&categoryId=33383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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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분류:단체]]
 
[[분류:단체]]

2017년 11월 24일 (금) 01:25 기준 최신판

한성부(漢城府)
원영한, "한성부", 한국민족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대표명칭 한성부
한자표기 漢城府
창립시대 조선
창립일 1395년
해체일 1910년


정의

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이름이다.[1]

내용

조선 태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듬해인 1395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으로 경성부로 개칭될 때까지 516년간 사용한 조선 왕조 수도의 행정구역명이자 관청명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에 해당한다. [2]

한성부의 지리적 범위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의 지역)가 한성부에 속하였다. 지리적 범위는 대략 북으로 북한산, 남으로 한강 노들, 동으로 중랑천, 서로 사천(모래내)에 이르렀고, 도성의 범위는 백악산(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연결해 쌓은 둘레 약 18km의 성곽 안쪽이었다.[3]

한성부의 관할업무

크게 호적·혼인·시전·부역·진휼·풍속 관리 등 행정업무와 도로·화재·공공위생·시체검시 등 도시관리업무로 나누어진다.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사송관련 업무를 관할하는 조선시대 삼법사(三法司) 중 하나로 사법기능도 부여되었는데, 주로 민사소송을 다루고 구타·절도·채무 관련 형사사건도 담당하였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호적관련 업무로 단지 한성부뿐 아니라 전국의 호적을 관장하였다.[4]

한성부의 행정체계와 그 변화

고려 말 개성부의 관제를 계승한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예종 때 개편된 한성부 직제는 판윤 1명, 좌윤과 우윤 각 1명, 서윤 1명, 판관 2명, 참군 3명으로, 이 직제는 숙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중 6조판서와 동등한 정2품직 판윤은 현재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자리로 시기에 따라 판부사 또는 부윤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시기별 차이는 있지만 종5품 이상 관직은 대략 6~8명이고, 실무직인 서리, 서사, 서원, 사령 등까지 합치면 관원 수는 약 90명이었다. 실무는 기능별 관리조직인 육방조직이 담당하였다. 호방은 호적과 시전·가옥 관리, 예방은 왕가의 간택과 묘지소송, 병방은 도성 내 순찰과 화재 관련, 형방은 시체검시와 치안, 공방은 도로·교량·하천 관리 업무를 맡았다. 지역별 하부조직은 5부(북부, 중부, 남부, 동부, 서부)로 구성되고, 5부의 하위조직으로 방(坊), 방의 하위조직으로 계(契)를 두었다. 태조 때는 5부 52방, 세종 때는 5부 49방이었고, 영조 때에는 5부 46방 328계로 구성되었다.[5]

한성부 관청의 위치

궁궐 앞 광화문 육조거리호조이조 중간에 있었다. 한성부의 인구는 1428년 당시 10만 9,372명(도성 내 10만 3,328명, 도성 외 6,044명)이었다. 이후 1780년에는 인구가 약 2배로 증가하여 20만 1,070명이 거주하였다.[6]


연계 자원 보러 가기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지식관계망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한성부 어제 유함경남북관대소민인등윤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한성부 어제계주윤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한성부 호조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한성부 개성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한성부 경성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한성부 서울특별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원영환, "한성부(漢城府)", 『한국민족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한성부(漢城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서울특별시 기획예산실 조직제도담당관, 『서울특별시 조직변천사 II』, 서울특별시, 2001.
    • 원영환, 『조선시대 한성부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0.
    • 서울특별시 기획예산실 조직제도담당관, 『서울특별시 조직변천사』, 서울특별시, 1986.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 육백년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77.
  • 논문
    • 서지언,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표현된 한성부 및 인근지역의 문화경관 해석」,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전, 석사학위논문, 2012.
    • 이규철, 「대한제국기 한성부 도시공간의 재편」, 서울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 심은애, 「한성부 관아의 입지변화와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1865년부터 1910년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2010.
    • 김동수, 「조선초기(朝鮮初期) 한성부(漢城府)의 성립과 도시기능의 발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010.
    • 이신우, 「18세기 서울의 주거문제와 도시확장책」,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