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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휼청과 역할)
(독립된 진휼청의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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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4년(조선 중종 19)에 심한 흉년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를 진휼사(賑恤使)로 삼고, 그 이듬해에 [[광흥창|광흥창(廣興倉)]]·[[풍저창|풍저창(豊儲倉)]]의 곡물과 여타 관고(官庫)의 잉여곡물을 모아 진휼청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뒤이어 [[상평청]]과 합해 평상시에는 곡가 조절 업무를, 흉황시에는 구휼·진대의 업무를 삼공(三公)의 지휘·감독 아래 수행하게 하였다. 이른바 [[상진청|상진청(常賑廳)]]이 성립된 것이다. 상진청은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존속하다가, 전란이 종식된 뒤 다시 [[상평청]]과 진휼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1608년에 [[선혜청]]이 설치되자, 진휼청은 이에 배속되면서 그 업무를 다시 상평청과 합치게 되었다.<ref>한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010 진휼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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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진휼청]]의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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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구의 증가와 흉황의 빈발에 따른 구휼·진대 업무의 증대로 1661년에 [[진휼청]]을 다시 분리, 독립하게 되었고, [[비변사]]의 관리 아래 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1686년에 다시금 [[선혜청]]의 관리 아래 두게 하였다. 이 때부터 [[갑오경장|갑오경장(1894년)]] 때 폐지되기까지 [[진휼청]]은 담당 낭청(郎廳)의 주관하에 계사(計士)·서리·고직(庫直) 등의 직원들이 [[선혜청]] 당상의 지휘를 받으며 구휼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나타난다.<ref>한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010 진휼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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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흉황의 빈발함에 따라 구휼·진대 업무가 늘게 되었다. 이에 1661년에 진휼청을 다시 분리, 독립하게 되었고, [[비변사]]의 관리 아래 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1686년에 다시금 [[선혜청]]의 관리 아래 두었다. 이 때부터 [[갑오경장|갑오경장(1894년)]] 때 폐지되기까지 진휼청은 담당 [[낭청|낭청(郎廳)]]주관 하에 계사(計士)·서리·고직(庫直) 등의 직원들이 선혜청 당상의 지휘를 받으며 구휼 업무를 수행하였다.<ref>한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010 진휼청]",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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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00:14 기준 최신판

진휼청(賑恤廳)
"충청수영 진휼청", 관광명소, 국보/보물/사적, 『보령시 문화관광』online, 보령시청.
대표명칭 진휼청
한자표기 賑恤廳
유형 제도
창립시대 조선시대
창립일 1525년
해체일 1894년
주요업무 재해로 인한 인민구제 활동
관련기관 호조



정의

조선시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담당했던 관서.

내용

조선 초기 기민 구제 및 곡가 조절 단체

조선시대에는 당초 기민을 구제하고 곡가(穀價)를 조절하는 업무를 호조가 담당하였다. 고려 말에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업무를 수행하던 의창(義倉)을 관장하는 삼사(三司)가 1405년에 호조로 흡수됨에 따라 호조판적사(版籍司)에서 그 업무를 승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창의 업무가 날로 번다해지자 판적사에서 감당하기 벅차게 되었다. 이에 세종 말엽에 구황청(救荒廳)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기민 구제는 구황청에서, 곡가 조절은 상평창에서 각기 전담하게 하였다.[1]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 의창

그러나 구황청은 상평창(뒷날의 상평청)처럼 상설 운영되지 않고 흉년에만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다. 때문에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업무는 제도상 여전히 호조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세조 때 의창이 경영난으로 폐쇄되고 이를 대신해 환상(還上) 업무를 계승했던 (社倉)들마저 성종 말엽부터 하나씩 문을 닫게 되었다. 위정 당국으로서는 진휼을 위한 새로운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2]

드디어 나타난 진휼청 그리고 그 역할

1524년(조선 중종 19)에 심한 흉년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를 진휼사(賑恤使)로 삼고, 그 이듬해에 광흥창(廣興倉)·풍저창(豊儲倉)의 곡물과 여타 관고(官庫)의 잉여곡물을 모아 진휼청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뒤이어 상평청과 합해 평상시에는 곡가 조절 업무를, 흉황시에는 구휼·진대의 업무를 삼공(三公)의 지휘·감독 아래 수행하게 하였다. 이른바 상진청(常賑廳)이 성립된 것이다. 상진청은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존속하다가, 전란이 종식된 뒤 다시 상평청과 진휼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1608년에 선혜청이 설치되자, 진휼청은 이에 배속되면서 그 업무를 다시 상평청과 합치게 되었다.[3]

독립된 진휼청의 업무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흉황의 빈발함에 따라 구휼·진대 업무가 늘게 되었다. 이에 1661년에 진휼청을 다시 분리, 독립하게 되었고, 비변사의 관리 아래 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1686년에 다시금 선혜청의 관리 아래 두었다. 이 때부터 갑오경장(1894년) 때 폐지되기까지 진휼청은 담당 낭청(郎廳)의 주관 하에 계사(計士)·서리·고직(庫直) 등의 직원들이 선혜청 당상의 지휘를 받으며 구휼 업무를 수행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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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휼전칙


지식 관계망

  • 자휼전칙에 관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의창 호조 A는 B에 포함된다 A dcterms:isPartOf B
판적사 호조 A는 B에 포함된다 A dcterms:isPartOf B
의창 상평청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판적사 상평청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상진청 풍저창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상진청 광흥창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상진청 진휼청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선혜청 진휼청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선혜청 상평청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진휼청 비변사 A는 B에 포함된다 A dcterms:isPartOf B
진휼청 선혜청 A는 B에 포함된다 A dcterms:isPartOf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05년 의창판적사의 업무를 승계하였다
세종 말엽 구황청상평창이 설립되었다
조선 세조시기 의창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다
1524년 광흥창 풍저창 그리고 진휼청과 함께 상진청이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상진청상평청진휼청으로 분리됨
1608년 선혜청이 설치되면서 진휼청이 이속되었다.
1661년 진휼청이 독립되었고 비변사가 관리하게 되었다
1686년-1894년 진휼청선혜청이 관리하게 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한영국, "진휼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영국, "진휼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영국, "진휼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한영국, "진휼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원재영, 「조선시대 재해행정과 17세기 후반 진휼청의 상설화」, 『동방학지』17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5, 133-167쪽.
  • 웹자원
    • 한영국, "진휼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