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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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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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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일을 이른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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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기능===
 
===실질적 기능===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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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의 행사를 사적인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기원 - 중국===
 
===기원 - 중국===
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을 강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때는 [[한림원]]에 [[시강학사]]와 [[시독학사|시독학사(侍讀學士)]]를 두는 등 어전 강의가 제도화되었다. 유학이 발달한 송나라 때는 경연관직이 더욱 정비되고 강의 교재가 풍부해졌으며 격일제 강의 일정도 확립되었다. 원·명·청 나라 때에는 경연 강의가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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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을 강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때는 [[한림원]]에 [[시강학사|시강학사(侍講學士)]]와 [[시독학사|시독학사(侍讀學士)]]를 두는 등 어전 강의가 제도화되었다. 유학이 발달한 송나라 때는 경연관직이 더욱 정비되고 강의 교재가 풍부해졌으며 격일제 강의 일정도 확립되었다. 원·명·청 나라 때에는 경연 강의가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기원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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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경연===
우리 나라는 고려 때 예종이 경연을 처음 도입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무신집권 때는 경연이 폐지되었다. 원나라의 지배 아래에서는 명칭이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경연이 부진했던 원인은 대체로 불교가 성하고 유학이 위축되었던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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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고려 때 예종이 경연을 처음 도입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무신집권 때는 경연이 폐지되었다. 원나라의 지배 아래에서는 명칭이 '[[서연|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경연이 부진했던 원인은 대체로 불교가 성하고 유학이 위축되었던 데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는 [[경연청]]을 설치했고, [[정종]]과 [[태종]]도 각각 경연을 실시하였었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 경연에 참석했으며, [[집현전]]을 정비해 경연관을 강화하였다. 특히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경연에 참석, 여러 정치 문제를 협의하기도 경연이 바야흐로 정치의 심장부가 되기도 하였다. 경연은 [[조선 세조|세조]]와 [[연산군]]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으나 곧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존속하였다.경연관의 직제는 고려와 조선이 달랐다. [[성종]] 말년에는 특진관을 두었는데, 1·2품의 대신 중에서 임명했으며, 정원은 없었다. 낭청으로는 시강관·시독관·검토관이 있었는데 모두 홍문관원이 겸임하였다. 시강관은 직제학·전한·응교·부응교가 겸했고, 시독은 교리·부교리가 겸했으며, 검토관은 수찬·부수찬이 겸하였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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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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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는 [[경연청]]을 설치했고, [[정종]]과 [[태종]]도 각각 경연을 실시하였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 경연에 참석했으며, [[집현전]]을 정비해 경연관을 강화하였다. 특히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경연에 참석, 여러 정치 문제를 협의하기도 함으로써 경연이 바야흐로 정치의 심장부가 되기도 하였다. 경연은 [[조선 세조|세조]]와 [[연산군]]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으나 곧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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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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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관의 직제는 고려와 조선이 달랐다. [[성종]] 말년에는 특진관을 두었는데, 1·2품의 대신 중에서 임명했으며, 정원은 없었다. 낭청으로는 시강관·시독관·검토관이 있었는데 모두 홍문관원이 겸임하였다. 시강관은 직제학·전한·응교·부응교가 겸했고, 시독은 교리·부교리가 겸했으며, 검토관은 수찬·부수찬이 겸하였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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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방식===
 
===강의 방식===
 
강의 방식도 세종과 성종 때에 대체로 확립되었다. 세종 때는 승지 1인, 경연낭청(집현전) 2인, 사관(史官) 1인이 입시(入侍)하였다. 성종은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을 때부터 하루에 세 번 조강·주강·석강에 참석했는데, 성년이 된 뒤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조강에는 영사·지사(또는 동지사)·참찬관 각 1인, 낭청(홍문관) 2인·대간(臺諫) 각 1인, 사관 1인(뒤에는 2인), 특진관 2인 등 모두 10인 이상이 참석하였다. 주강과 석강의 참석자는 세종 때와 같았다. 좌석의 배치는 왕이 북쪽에 남향해 앉고, 1품은 동편에 서향, 2품은 서편에 동향, 3품 이하는 남쪽에 북향해 부복(仆伏 :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하였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강의 방식도 세종과 성종 때에 대체로 확립되었다. 세종 때는 승지 1인, 경연낭청(집현전) 2인, 사관(史官) 1인이 입시(入侍)하였다. 성종은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을 때부터 하루에 세 번 조강·주강·석강에 참석했는데, 성년이 된 뒤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조강에는 영사·지사(또는 동지사)·참찬관 각 1인, 낭청(홍문관) 2인·대간(臺諫) 각 1인, 사관 1인(뒤에는 2인), 특진관 2인 등 모두 10인 이상이 참석하였다. 주강과 석강의 참석자는 세종 때와 같았다. 좌석의 배치는 왕이 북쪽에 남향해 앉고, 1품은 동편에 서향, 2품은 서편에 동향, 3품 이하는 남쪽에 북향해 부복(仆伏 :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하였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강의 교재===
 
===강의 교재===
강의 교재는 사서와 오경 및 역사책인 [[자치통감]]≫·≪[[자치통감강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 기본서였다. 그 밖의 교재로 [[성리대전|성리대전(性理大全)]]≫·≪[[근사록|근사록(近思錄)]]≫·≪[[소학]]≫·≪[[심경]]≫·≪[[대학연의|대학연의(大學衍義)]]≫·≪[[정관정요|정관정요(貞觀政要)]]≫·≪[[국조보감|국조보감(國朝寶鑑)]]등도 사용하였다. 강의는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음독, 번역, 설명하고 나면, 왕이 질문도 하고 다른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정치 문제도 협의하였다. 특히, 대신과 대간이 참석한 조강은 협의체로서의 기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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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교재는 사서와 오경 및 역사책인 [[자치통감|≪자치통감≫]]·[[자치통감강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기본서였다. 그 밖의 교재로 [[성리대전|≪성리대전(性理大全)]]·[[근사록|≪근사록(近思錄)]]·[[소학|≪소학≫]]·[[심경|≪심경≫]]·[[대학연의|≪대학연의(大學衍義)]]·[[정관정요|≪정관정요(貞觀政要)]]·[[국조보감|≪국조보감(國朝寶鑑)]] 등도 사용하였다. 강의는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음독, 번역, 설명하고 나면, 왕이 질문도 하고 다른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정치 문제도 협의하였다. 특히, 대신과 대간이 참석한 조강은 협의체로서의 기능이 컸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뒤 경연청에 [[홍문관]]과 [[예문관]]을 합했고, 이듬해 [[경연청]]을 없애고 [[경연원|경연원(經筵院)]]을 신설해 시강 1인과 시독 4인을 두었다. 1897년에는 다시 경연원을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뒤 경연청에 [[홍문관]]과 [[예문관]]을 합했고, 이듬해 [[경연청]]을 없애고 [[경연원|경연원(經筵院)]]을 신설해 시강 1인과 시독 4인을 두었다. 1897년에는 다시 경연원을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ref> 권연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681  경연(經筵)]",<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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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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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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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문관지(弘文館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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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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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남지대, 「경연제도」, 『한국사론』 6,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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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지대, 「朝鮮初期의 經筵制度 :  世宗, 文宗年間을 중심으로」, 『韓國史論』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0, 117-170쪽.
** 권연웅, 「조선전기 경연의 재이론」, 『역사교육논집』 13·14합집,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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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연웅, 「조선전기 경연(經筵)의 재이론」, 『역사교육논집』13, 역사교육학회, 1990, 597-6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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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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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 신동은, 「조선 전기 경연(經筵)의 이념과 전개 :  태조 ~ 중종 연간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Vol.32 No.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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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항녕, 「문치주의와 대칭적 경세론에서 본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사상연구』, (사)율곡연구원, Vol.28 No.-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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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은, 「조선 전기 경연(經筵)의 이념과 전개 :  태조 ~ 중종 연간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김영주, 「조선조 경연제도 연구」, 『언론학연구』, 부산울산경남언론학회, Vol.18 No.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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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항녕, 「문치주의와 대칭적 경세론에서 본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사상연구』28, (사)율곡연구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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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주, 「조선조 경연제도 연구」, 『언론학연구』18, 부산울산경남언론학회, 2014.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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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165&cid=40942&categoryId=31723  경연(經筵)]",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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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71932&cid=42922&categoryId=42922  경연(經筵)]", 관직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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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분류:개념]]

2017년 11월 22일 (수) 21:36 기준 최신판

경연
(經筵)
Gyeongyeon.png
대표명칭 경연
한자표기 經筵
이칭 경악(經幄), 경유(經帷)
유형 교육제도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일을 이른다.[1]

내용

실질적 기능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의 행사를 사적인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2]

기원 - 중국

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을 강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때는 한림원시강학사(侍講學士)시독학사(侍讀學士)를 두는 등 어전 강의가 제도화되었다. 유학이 발달한 송나라 때는 경연관직이 더욱 정비되고 강의 교재가 풍부해졌으며 격일제 강의 일정도 확립되었다. 원·명·청 나라 때에는 경연 강의가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3]

고려시대 경연

우리나라는 고려 때 예종이 경연을 처음 도입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무신집권 때는 경연이 폐지되었다. 원나라의 지배 아래에서는 명칭이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경연이 부진했던 원인은 대체로 불교가 성하고 유학이 위축되었던 데 있다.

조선시대 경연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는 경연청을 설치했고, 정종태종도 각각 경연을 실시하였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 경연에 참석했으며, 집현전을 정비해 경연관을 강화하였다. 특히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경연에 참석, 여러 정치 문제를 협의하기도 함으로써 경연이 바야흐로 정치의 심장부가 되기도 하였다. 경연은 세조연산군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으나 곧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존속하였다.

경연관

경연관의 직제는 고려와 조선이 달랐다. 성종 말년에는 특진관을 두었는데, 1·2품의 대신 중에서 임명했으며, 정원은 없었다. 낭청으로는 시강관·시독관·검토관이 있었는데 모두 홍문관원이 겸임하였다. 시강관은 직제학·전한·응교·부응교가 겸했고, 시독은 교리·부교리가 겸했으며, 검토관은 수찬·부수찬이 겸하였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경연 분류두공부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연 예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연 유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연 왕권 견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연 서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연 경연청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연청 홍문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연청 예문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연 갑오경장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권연웅, "경연(經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권연웅, "경연(經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권연웅, "경연(經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권연웅, "경연(經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논문
    • 남지대, 「朝鮮初期의 經筵制度 : 世宗, 文宗年間을 중심으로」, 『韓國史論』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0, 117-170쪽.
    • 권연웅, 「조선전기 경연(經筵)의 재이론」, 『역사교육논집』13, 역사교육학회, 1990, 597-616쪽.
    • 신동은, 「조선 전기 경연(經筵)의 이념과 전개 : 태조 ~ 중종 연간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오항녕, 「문치주의와 대칭적 경세론에서 본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사상연구』28, (사)율곡연구원, 2014.
    • 김영주, 「조선조 경연제도 연구」, 『언론학연구』18, 부산울산경남언론학회, 2014.
  •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