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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6일 (목) 15:50 판

승형(承逈)
BHST Monk1.png
대표명칭 승형
영문명칭 Seunghyeong
한자 承逈
생몰년 1172년(명종 2)-1221년(고종 8)
시호 원진(圓眞)
혜월(慧月)
승형(承逈)
영회(永廻)
성씨 신씨(申氏)
승탑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성은 신씨(申氏). 자는 영형(永逈). 아버지는 통한(通漢)이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세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 밑에서 자라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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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는 승형(承逈)이요, 자는 영회(永廻)이며, 속성은 신씨(申氏), 상락(上洛)의 산양(山陽)출신이다. 선대(先代)는 대대로 유가(儒家)이었다.아버지의 이름은 통한(通漢)이니, 이(以) (결락) 내급사(內給事)로 있다가 금성(錦城)군수(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재임(在任) 중에 순직하였고,어머니도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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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102-103쪽



출가수행

13세 때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선사 동순(洞純)을 은사로 득도(得度)하였고, 이듬해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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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운문사(雲門寺) 연실선사(淵實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모든 언행(言行)과 거지(擧止)가 모두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희세(希世)의 신동(神童)이라고 입을 모았다. 13살 적에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院北里)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嵓寺) 동순(洞純)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다음 해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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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103쪽.



활동

1197년 보제사(普濟寺) 담선대회(談禪大會)에 참석하였으나 동순사가 돌아가시자 장례에 임하여 선발되지 못하였지만, 고려 명종이 승형의 도행을 높이 평가하여 초선(抄選)에 특례로 선발되게 하였다. 1197년(명종 27)에 승형은 선종 대선에 상상품으로 합격하였으나 명리를 버리고 명산을 유력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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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년(丁巳年)봄 해마다 연례적(年例的)으로 개최하는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고 있는 중, 순공(純公)이 입적하였다는 부고를 받고,장례식에 떠나기 전 시어사(侍御史)인 숙부(叔父)를 찾아가서 여쭙되, 인생은 마치 아침 이슬과 같고, 부귀는 또한 뜬 구름과 같아서, 저는 세상 살이가 마치 밀을 씹는 것과 같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스님께서 입적(入寂)하였으므로 곧 떠나서 나의 초지(初志)를 성취하리라 하고는, 석장(錫杖)을 짚고 곧바로 떠났다. 이때 명종(明宗)임금이 조회(朝會) 때 신하들로부터 스님의 도행(道行)이 고매하다는 보고를 듣고, 유사(有司)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스님의 도행을 초록(抄錄)하였으니, 이는 상례(常例)를 벗어난 조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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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104쪽.


그 뒤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지눌(知訥)에게서 법요(法要)를 받고 강릉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배한 뒤 크게 감응을 얻었다. 또, 청평산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능엄경(首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문수원기(文殊院記)』를 읽고 마음 깊이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람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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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曹溪山)으로 가서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참방하고 법요(法要)를 물은 다음, 강원도 강릉군 오대산(五臺山)으로 가서 문수보살님 앞에서 예배기도(禮拜 祈禱)를 하고 명감(冥感)을 받았다. 이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으로 진락공(眞樂公)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김부철(金富轍)이 지은문수사기(文殊寺記)를 살펴보니, 공(公)이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수능엄경(首楞嚴經)은 심종(心宗)을 증인(證印)한 것이므로, 불교의 진리를 발명(發明)함에 있어 중요한 내객(內客)이다라는 말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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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105-106쪽.


1208년(희종 4)에 칙명으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주지가 되었다. 1215년(고종 2)에 개경 곽주사(郭注寺)에 머물게 하고 중수 낙성하여 선지를 천양하게 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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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泰和) 8년 무진(戊辰)에 왕명으로 개골산(皆骨山) 유점사(楡岾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가을 당시 귀척(貴戚)들이 경기의 연법사(演法寺)에서 법회를 개설하고,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스님을 법사(法師)로 모시기로 하고, 편지를 보내어 고청(固請)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사(京師)로 나아갔다. 지금의 상국(相國)인 청하공(淸河公)이 문하(門下)의 잠리(簪履)수천 명을 데리고 나와 도성의 동쪽에 있는 곽주사(郭注寺)로 영접하되, 기꺼이 경개(傾盖)로 환대하고 구의(摳衣)의 예를 다하였으니, 마치 돌로써 물에 던짐에 문연(脗然)히 상합(相合)함과 같았다.

...(중략)...

이보다 앞서 스님께서 어느 때 풍악산(楓嶽山) 보덕굴(普德崛)에서 지낼 때, 특이(特異)한 꿈을 꾼 적이 있는데,지금에 미치고서야 그 꿈을 징험(徵驗)하게 되었다. 계유년(癸酉年)에 이르러 지금의 고종(高宗) 임금께서 천조(踐祚)하고 선왕(先王)인 강종의 뜻을 계승하여 2년 갑술(甲戌)에 곽주사(郭注寺)를 중수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선지(禪旨)를 크게 천양(闡揚)하고 선사(禪師)의 법계를 비수(批授)하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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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107-109쪽.


1216년(고종 3)에 보경사(寶鏡寺) 주지로 임명되는 동시에 대선사 법계에 승진하였다. 고종은 스님을 흠모하여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 서치(徐雉)의 아들을 대신하여 출가하게 할 정도였다. 이 외에도 청평산 문수사(文殊寺), 설악 한계사(寒溪寺), 운문산 복안사(伏安寺), 청도군 칠엽사(七葉寺), 공산 염불난야(念佛蘭若) 등에 주석하였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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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가을에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비가(批加)하고, 조칙(詔勅)을 내려 동경(東京) 이내(理內)인 청하현(淸河縣) 보경사(寶鏡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평산(淸平山) 문수사(文殊寺)와 설악산(雪嶽山) 한계사(寒溪寺)에 주지(住持)토록 명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지금 보경사의 주지를 맡은 것은 강권(强勸)에 의한 것이지, 결코 스님의 뜻은 아니었다. 운문산(雲門山)에 복안사(伏安寺)란 절이 있었는데, 항적(降賊)의 주장(主長)들이 연수(淵藪)에 모여 있던 구염(舊染)의 좋지 못한 형태가 아직까지 말끔히 정돈(整頓)되지 않아서, 당두(堂頭)와 노숙(老宿)스님들이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이들을 새로운 생활의 길로 개도(開導)코자 하여 스님을 초청해서 특별히 법회(法會)를 열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강설하였더니, 군적(群賊)들이 모두 크게 감화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흉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로부터 그 지방 일대(一帶)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태평세상(太平世上)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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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110-111쪽.


입적

1221년 7월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옮겨 입적하였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비는 보경사에 있다. 시호는 원진(圓眞)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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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팔공산(八公山) 염불사(念佛寺)로 이석(移錫)하였다. 마지막으로 원정(元正)과 청림(靑林)등 두 선로(禪老)와 함께 종용(從容)히 도담(道談)을 나누었다. 8월 28일에 이르러 삭발하고, 목욕하였다. 9월 2일 시자(侍者)를 불러 옷을 갈아 입고, 단정히 승상(繩床)에 앉아 범패(梵唄)를 읊게 하였다. 이때 시자(侍者)가 스님께 임종게(臨終偈)를 청(請)하니, 스님은 눈을 뜨고 한참동안 노려 보고 이르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동안 한 게송(偈頌)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인가? 하시고, 승상(繩床)을 세 번 내리친 다음, 곧 적요(寂寥)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입적하시었다. 그러나 안색(顔色)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여 온 몸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중략)...

10월 10일 문도(門徒) 50여명이 영여(靈輿)를 모시고 팔공산(八公山) 남쪽 기슭에서 화장(火葬)하였다. 다음 날 영골(靈骨)을 수습(收拾)하여 신구산(神龜山)으로 이장(移葬)하고 탑(塔)을 세웠다. 세수는 51이요, 법랍은 37(비문에 24는 오치(誤植)이다)세였다. 고종(高宗) 임금께서 부고를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면서 국사(國師)로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증정(贈呈)하였다.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탑비(塔碑)를 세우고자 조정(朝廷)에 건의(建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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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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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승형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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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184년 승형문경 봉암사에서 수행함
1185년 승형김제 금산사에서 수행
1197년 승형개성 보제사에서 수행
1208년 승형고성 유점사에서 수행
1215년 승형개성 곽주사에서 수행
1216년 승형포항 보경사에서 주석
1221년 승형을 기리기 위한 비인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포항 보경사에에서 세워짐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김영길, "승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영길, "승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기문, 「고려시대 봉암사와 희양산파의 추이」, 『불교연구』 34, 한국불교연구원, 2011, 69-71쪽.
  4. 김영길, "승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영길, "승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영길, "승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한기문, 「고려시대 봉암사와 희양산파의 추이」, 『불교연구』 34, 한국불교연구원, 2011, 71쪽.
  8. 김영길, "승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김영길, "승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91-118쪽.
  • 한기문, 「고려시대 봉암사와 희양산파의 추이」, 『불교연구』 34, 한국불교연구원, 2011, 5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