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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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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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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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195 귀부(龜趺)]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810 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195 귀부(龜趺)]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98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195 귀부(龜趺)]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810 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195 귀부(龜趺)]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98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850년 선사가 입적하고 삼기(三紀, 36년)가 지난 뒤, 헌강왕이 시호를 진감선사라 추증하고, 탑이름을 대공령탑이라 하였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887년 7월에 세워진다.
 
850년 선사가 입적하고 삼기(三紀, 36년)가 지난 뒤, 헌강왕이 시호를 진감선사라 추증하고, 탑이름을 대공령탑이라 하였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887년 7월에 세워진다.

2017년 3월 2일 (목) 04:31 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자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이칭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문화재 지정번호 국보 47호
문화재 지정일 1962.12.20
찬자 최치원(崔致遠)
서자 최치원(崔致遠)
각자 환영(奐榮)
서체 전서(篆書)
승려 혜소(慧昭)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혜소(慧昭)의 탑비.

탑비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귀부(龜趺)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龜趺)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1]

850년 선사가 입적하고 삼기(三紀, 36년)가 지난 뒤, 헌강왕이 시호를 진감선사라 추증하고, 탑이름을 대공령탑이라 하였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887년 7월에 세워진다.

Quote-left.png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참된 종교(禪宗)를 흠앙하시어 '진감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하시고 탑이름을 '대공령탑'이라 하셨다. 그리고 전각을 허락하여 길이 명예를 전하도록 하시었다.[2] Quote-right.png
출처:


비문

비문에는 염거의 제자인 지선선사 체징(體澄)선종 가지산문을 열고 이를 신라 헌안왕과 왕실이 후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서 최초로 남종선을 전래하였을 때에 신라 불교계에서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3]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4]이라고 평한 바 있다.[5]

가상현실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갤러리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그래프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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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를 위한 비이다 혜소(惠昭)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에 위치한다 하동 쌍계사(河東 雙磎寺)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가 비문을 지었다 최치원(崔致遠)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가 비문을 썼다 최치원(崔致遠)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가 비문을 새겼다 환영(奐榮)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로 불려진다 사산비명(四山碑銘)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의 이름을 지었다 헌강왕

각주

  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209쪽
  3.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주요 소장품 검색 상세정보에서 인용.
  4.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에서 인용.
  5.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