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혜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가계와 탄생)
(입당유학)
31번째 줄: 31번째 줄:
  
 
===입당유학===
 
===입당유학===
{{Blockquote
+
{{Blockquote|드디어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면서 “슬프게 이별한지가 오래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라고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함에, 머리를 조아려 인계를 받았다 ...(중략)... 승려들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 라고 하였다.<ref>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5쪽.</ref>}}
드디어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면서 “슬프게 이별한지가 오래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라고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함에, 머리를 조아려 인계를 받았다 ...(중략)... 승려들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 라고 하였다.<ref>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5쪽.</ref>}}
 
  
 
혜소는 804년(애장왕 5년, 31세)에 당나라로 들어가는 세공사(歲貢士)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기를 자원하여 당나라로 간다. 당나라에 도착하자 바로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만나 수행하고, 810년(헌덕왕 2년, 37세)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나라에서 신라 승려 도의와 만나기도 하였다. 도의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자<ref>도의는 혜소보다 9년 앞서 821년 신라로 귀국하였다.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7쪽의 각주 51.</ref> 혜소는 중국을 유람하며 고행을 닦았다.<ref>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4-198쪽.</ref>
 
혜소는 804년(애장왕 5년, 31세)에 당나라로 들어가는 세공사(歲貢士)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기를 자원하여 당나라로 간다. 당나라에 도착하자 바로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만나 수행하고, 810년(헌덕왕 2년, 37세)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나라에서 신라 승려 도의와 만나기도 하였다. 도의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자<ref>도의는 혜소보다 9년 앞서 821년 신라로 귀국하였다.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7쪽의 각주 51.</ref> 혜소는 중국을 유람하며 고행을 닦았다.<ref>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4-198쪽.</ref>

2017년 2월 28일 (화) 14:46 판


혜소(慧昭)()
BHST Monk1.png
대표명칭 혜소(慧昭)
영문명칭 Hyeso
생몰년 774(혜공왕 10)-850(문성왕 12)
시호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탑호 대공(大空)
성씨 최씨(崔氏)
출신지 익산(益山)
승탑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정의

통일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Quote-left.png 어머니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가매(假寐, 잠자리를 제대로 차리지 않고 잠을 자는 것)를 하였는데, 꿈에 한 범승(梵僧)이 나타나 “나는 아미(阿㜷, 방언으로 어머니를 이른다)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이르며, 유리 항아리를 표적을 삼아 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사를 임신하게 되었다.[1] Quote-right.png
출처:


혜소(慧昭)는 774년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다. 그의 선대는 한족으로, 산동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 지방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뜻을 굽히고 귀화한 자가 있었는데, 당나라가 옛 한사군 지역을 차지함에 이르러, 바로 전주의 금마 사람이 되었다. [2] [3] 어린시절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삼았다.[4]

입당유학

Quote-left.png 드디어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면서 “슬프게 이별한지가 오래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라고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함에, 머리를 조아려 인계를 받았다 ...(중략)... 승려들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 라고 하였다.[5] Quote-right.png
출처:


혜소는 804년(애장왕 5년, 31세)에 당나라로 들어가는 세공사(歲貢士)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기를 자원하여 당나라로 간다. 당나라에 도착하자 바로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만나 수행하고, 810년(헌덕왕 2년, 37세)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나라에서 신라 승려 도의와 만나기도 하였다. 도의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자[6] 혜소는 중국을 유람하며 고행을 닦았다.[7]

관련항목

node relation node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를 위한 비이다 체징(體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는 -의 승탑이다 체징(體澄)
염거(廉居) 는 -의 스승이다 체징(體澄)
체징(體澄) 는 -의 스승이다 형미(逈微)
체징(體澄) 는 -를 중창하였다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는 -와 관련있다 가지산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가 비문을 지었다 김영(金穎)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는 -가 비문을 썼다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참고문헌

  • 김정권, 「진감선사 혜소의 남종선 수용과 쌍계사 창건」, 『역사와 담론』 27, 호서사학회, 1999, 1-36쪽.

각주

  1.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3쪽.
  2.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2-193쪽.
  3. 혜소의 선대는 고구려계 유민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유민에 대해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지금의 익산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게 했다고 한다. 김정권, 「진감선사 혜소의 남종선 수용과 쌍계사 창건」, 『역사와 담론』 27, 호서사학회, 1999, 4쪽.
  4.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4쪽.
  5.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5쪽.
  6. 도의는 혜소보다 9년 앞서 821년 신라로 귀국하였다.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7쪽의 각주 51.
  7.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94-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