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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지배 이념인 유학을 보급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교육기관이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한일합병 이후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다. 명칭도 [[경학원]]으로 바뀌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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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국자감|국자감(國子監)]], 신라시대의 [[국학|국학(國學)]], 고구려의 [[태학|태학(太學)]] 등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배원정책(排元政策)에 따른 관제의 복구로 [[국자감]]으로 불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 + | 고려시대의 [[국자감|국자감(國子監)]], 신라시대의 [[국학|국학(國學)]], 고구려의 [[태학|태학(太學)]] 등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배원정책(排元政策)에 따른 관제의 복구로 [[국자감]]으로 불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바꾸었다. [[공민왕]] 즉위 초에는 [[성균관]](국자감)에 유교학부(儒敎學部)와 함께 설치되어온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의 기술학부를 완전히 분리시켜 따로 교육시키게 함으로써, 성균관은 유학교육만을 전담하는 최고 학부가 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5448&cid=46615&categoryId=46615 성균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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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서도 성균관의 위상은 그대로 이어졌다. 우수한 성균관 유생은 문과에 급제하면 고급문관관료가 될 수 있었다. 조선은 문(文)을 무(武)보다 숭상하는 국가로, 유교이념을 지키는 [[성균관]] 유생들은 유교이념에 대치되는 국가정책을 성토할 수 있는 등 책임도 주어졌다.<ref>李成茂 , 「朝鮮의 成均館과 書院」, 한국사 시민강좌 18, 1996, 45쪽.</ref> | ||
+ | 조선 후기에는 성균관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지역별 서원이 발달한 데다 성균관 유생들이 당쟁에 휩쓸려 학업을 소홀히 하고, 과거시험이 불공정하게 운용되어 성균관은 그 교육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부진하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 개화의 파도 속에서, 이제까지 부진을 면치 못했던 구교육의 총본산인 성균관은 더욱 침체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의 단행으로 대부분의 관제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과거제도]]의 철폐와 함께 새로운 관리등용법이 마련됨으로써 [[성균관]]은 인재양성의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성균관급상교서원국(成均館及庠敎書院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05년(광무 9)에 성균관의 관제가 다시 개정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하여,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었고, 현재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5448&cid=46615&categoryId=46615 성균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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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진, 「고종시대 성균관에 관한 연구 - 『고종실록』을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 Vol.21, 한국교육사학회, 1999. | * 한용진, 「고종시대 성균관에 관한 연구 - 『고종실록』을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 Vol.21, 한국교육사학회,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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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8일 (토) 22:44 기준 최신판
성균관(成均館) | |
대표명칭 | 성균관 |
---|---|
한자표기 | 成均館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성균관로 25-1 |
|
목차
정의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유학 교육기관이다.
내용
조선의 지배 이념인 유학을 보급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교육기관이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한일합병 이후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다. 명칭도 경학원으로 바뀌었다.
역사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 신라시대의 국학(國學), 고구려의 태학(太學) 등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배원정책(排元政策)에 따른 관제의 복구로 국자감으로 불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바꾸었다. 공민왕 즉위 초에는 성균관(국자감)에 유교학부(儒敎學部)와 함께 설치되어온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의 기술학부를 완전히 분리시켜 따로 교육시키게 함으로써, 성균관은 유학교육만을 전담하는 최고 학부가 되었다.[1]
조선시대에서도 성균관의 위상은 그대로 이어졌다. 우수한 성균관 유생은 문과에 급제하면 고급문관관료가 될 수 있었다. 조선은 문(文)을 무(武)보다 숭상하는 국가로, 유교이념을 지키는 성균관 유생들은 유교이념에 대치되는 국가정책을 성토할 수 있는 등 책임도 주어졌다.[2]
조선 후기에는 성균관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지역별 서원이 발달한 데다 성균관 유생들이 당쟁에 휩쓸려 학업을 소홀히 하고, 과거시험이 불공정하게 운용되어 성균관은 그 교육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부진하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 개화의 파도 속에서, 이제까지 부진을 면치 못했던 구교육의 총본산인 성균관은 더욱 침체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의 단행으로 대부분의 관제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과거제도의 철폐와 함께 새로운 관리등용법이 마련됨으로써 성균관은 인재양성의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성균관급상교서원국(成均館及庠敎書院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05년(광무 9)에 성균관의 관제가 다시 개정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하여,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었고, 현재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3]
구성
조선 개국 초에는 고려시대의 직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정3품 대사성(大司成) 1인, 종3품 좨주(祭酒) 1인, 정4품 악정(樂正) 2인, 정5품 직강(直講) 1인, 정6품 전부(典簿) 1인, 정7품 박사(博士) 2인, 종7품 순유박사(諄諭博士) 2인, 정8품 진덕박사(進德博士) 2인, 정9품 학정(學正) 2인, 정9품 학록(學錄) 2인, 종9품 직학(直學) 2인, 종9품 학유(學諭) 4인을 두고, 서리(書吏) 2인을 배속시켰다. 2품 이상의 대신(大臣) 가운데 학덕이 높은 자를 성균관제조(成均館提調) 또는 대사성(大司成)에 겸임시켜 교육에 임하도록 하는 제도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성균관의 겸관(兼官)으로 지사(知事)와 동지사(同知事)가 설치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직제의 일부가 개정되어 좨주가 사성(司成), 악정이 사예(司藝), 전부가 주부(注簿)로 개칭되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의 관제 대개혁 때 성균관의 직제도 바뀌어 정비되었다.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성균관 직제는 정2품 지사(겸관) 1인, 종2품 동지사(겸관) 2인, 정3품 대사성 1인, 종3품 사성 2인, 정4품 사예 3인, 정5품 직강 4인, 정6품 전적(典籍) 13인, 정7품 박사 3인, 정8품 학정 3인, 정9품 학록 3인, 종9품 학유 3인을 두고, 서리 10인을 배속시켰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문묘 작헌례 | 성균관(成均館) | A는 B에서 거행되었다 | A edm:happenedAt B |
성균관(成均館) | 영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대사례 | 성균관(成均館) | A는 B에서 거행되었다 | A edm:happenedAt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743년 | 영조는 성균관 대성전에서 문묘 작헌례를 거행하였다 |
1743년 | 영조는 성균관 하연대에서 대사례를 거행하였다 |
1743년 | 영조는 성균관 하연대에서 문과시취의을 거행하였다 |
1743년 | 영조는 성균관 하연대에서 무과시취의를 거행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86178 | 126.995739 | 창경궁 명정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에 위치한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성균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네이버. - ↑ 李成茂 , 「朝鮮의 成均館과 書院」, 한국사 시민강좌 18, 1996, 45쪽.
- ↑ 성균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네이버. - ↑ 성균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네이버. - ↑ 궁중기록화팀.
- ↑ 궁중기록화팀.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박종배, 「조선시대 成均館 大射禮의 시행과 그 의의」, 『교육사학연구』 Vol.21, 교육사학회, 2003.
- 李成茂 , 「朝鮮의 成均館과 書院」, 한국사 시민강좌 18, 1996.
- 한용진, 「고종시대 성균관에 관한 연구 - 『고종실록』을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 Vol.21, 한국교육사학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