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효황후 민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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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이혜영
+
#넘겨주기[[순명효황후]]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순명효황후
 
|한자표기=純明孝皇后
 
|영문명칭=
 
|이칭=
 
|자=
 
|호=
 
|시호=경현성휘순명효황후
 
|본관=여흥 민씨
 
|직함=
 
|시대= 조선
 
|국적= 한국
 
|출생년= 1872
 
|사망년= 1904
 
|재위기간=
 
|출생지= 양덕방
 
|사망지= 경운궁 강태실
 
|능묘= 유릉
 
|배우자= [[조선 순종]]
 
|부친= 민태호
 
|모친= 민태호 처 은진 송씨
 
|자녀=
 
|전임자=
 
|후임자= 순정효황후
 
|대표저술= [[순명효황후 한글편지]]
 
}}
 
==정의==
 
여흥 민씨 민태호의 딸로 1882년 [[조선 순종]]과 혼례를 올렸다. 1987년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1904년 경운궁의 강태실에서 33세의 나이로 죽었다.<ref>한희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888 순명효황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순명효황후의 생애===
 
{{PAGENAME}}는 대제학을 지낸 [[민태호]]의 딸로 1882년, 11세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된다. 순종의 어머니인 [[명성황후]]는 자신의 집안인 여흥 민씨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집안 출신인 {{PAGENAME}}를 간택한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태호]]가 살해당하고 그녀의 오빠 민영익이 크게 다치는 등 그녀의 집안은 큰 화를 입게 된다. 게다가 임신하지도 못해 궁중생활이 순탄지 못했으며, 1895년 그녀의 버팀목이었던 명성황후를 일본인이 죽이려하자 그 앞을 가로 막다가 혼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마음의 병을 얻어 [[조선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조선 순종]]이 즉위한 1907년에 황후로 추대되었다.
 
<ref>박지은, 「19세기 조선조 순원왕후와 순명효황후의 언간서체의 심미적 특징」,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34-37쪽.</ref>
 
===순종과 {{PAGENAME}}의 결혼===
 
1882년 [[조선 순종]]과 {{PAGENAME}}의 결혼식([[가례]])이 열렸다. [[조선 순종]]의 첫번째 [[가례]]로  당시 세자빈 후보의 명단인 [[간택단자]]에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 당시 혼례에 쓰인 물품이나 예식의 진행상황을 상세히 적어 기록한 발기가 여러개 전해져 온다. 그 중 상궁이나 나인들이 보기 위해 한글로 작성된 것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왕세자빈 의대 발기]], [[각색 인문보 발기]], [[왕세자 가례 차비관 발기]],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왕세자 관례 상차림 발기]], [[왕세자 관례 상격 발기]] 등이 있다.
 
 
 
===김상덕과 한글편지===
 
{{PAGENAME}}이 [[김상덕]]에게 보낸 11편의 편지가  [[경주김씨 직각종택]]에 소장되어 있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되었다. [[김상덕]]은 순종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 {{PAGENAME}}에게도 글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김상덕]]을 친아버지처럼 따르며 여러번 편지를 보냈다. 시어머니 [[명성황후]]의 영향을 받아 글씨가 아름답고, 당시 혼란스러운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순명효황후 한글편지]]이다.
 
 
 
==주석==
 
<references/>
 
[[분류:한글고문서_인물기사]]
 
[[분류:이혜영]]
 

2017년 10월 19일 (목) 17:3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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