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관련항목)
(암행어사)
48번째 줄: 48번째 줄:
  
 
===암행어사===
 
===암행어사===
박문수와 관련된 많은 암행어사 설화가 있으나, 실제 역사 속에서 박문수가 정작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었다.
+
박문수와 관련된 많은 암행어사 설화가 있으나, 실제 역사 속에서 박문수가 정작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었다.<ref>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수 [朴文秀] - 영원한 암행어사 (인물한국사)</ref>
  
1727년(영조 3) 9월의 일로, 이때 박문수는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임명되어 영남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암행어사는 그야말로 암행을 하는 어사였으나, 박문수는 이때 어사의 직함을 띠고 다음 해 3월까지 안동을 비롯해 예천, 상주 등지를 순행하며 도내 명망 있는 인사들과 공개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처럼 역사 기록을 보면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으나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역도 영남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지금 구전되는 박문수 관련 설화는 비단 영남에 국한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제주나 강화도까지도 관련 설화가 전하고 있으니, 그의 인기를 가히 실감할 만하다.
+
1727년(영조 3) 9월의 일로, 이때 박문수는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임명되어 영남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암행어사는 그야말로 암행을 하는 어사였으나, 박문수는 이때 어사의 직함을 띠고 다음 해 3월까지 안동을 비롯해 예천, 상주 등지를 순행하며 도내 명망 있는 인사들과 공개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처럼 역사 기록을 보면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으나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역도 영남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지금 구전되는 박문수 관련 설화는 비단 영남에 국한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제주나 강화도까지도 관련 설화가 전하고 있으니, 그의 인기를 가히 실감할 만하다.<ref>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수 [朴文秀] - 영원한 암행어사 (인물한국사)</ref>
  
 
그렇다면 이렇게 전설과 사실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박문수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라 생각된다. 1727년 박문수가 영남에 어사로 파견되어 활동할 때 환곡을 백성들의 삶을 위한 밑천으로 돌렸고, 탐관오리들을 다스렸으며, 바닷가 고을에 명망 있는 인물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거나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백성들에게 많은 어사나 암행어사가 있었음에도 박문수라는 이름이 각인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후대에 내려오면서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것이라 하겠다.<ref>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수 [朴文秀] - 영원한 암행어사 (인물한국사)</ref>
 
그렇다면 이렇게 전설과 사실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박문수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라 생각된다. 1727년 박문수가 영남에 어사로 파견되어 활동할 때 환곡을 백성들의 삶을 위한 밑천으로 돌렸고, 탐관오리들을 다스렸으며, 바닷가 고을에 명망 있는 인물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거나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백성들에게 많은 어사나 암행어사가 있었음에도 박문수라는 이름이 각인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후대에 내려오면서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것이라 하겠다.<ref>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수 [朴文秀] - 영원한 암행어사 (인물한국사)</ref>

2017년 10월 8일 (일) 14:27 판

박문수(朴文秀)
대표명칭 박문수
한자표기 朴文秀
생몰년 1691년(숙종 17)-1756년(영조 32)
본관 고령(高靈)
시호 충헌(忠憲)
기은(耆隱)
성보(成甫)
시대 조선
대표직함 예문관검열, 대사성, 어사, 예조참판, 호조참판, 병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박항한(朴恒漢)
이세필(李世弼)의 딸
성격 문신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내용

가계와 탄생

박문수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조판서 박장원(朴長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마(洗馬) 박선(朴銑)이고,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박항한(朴恒漢)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1]

활동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뽑혔다.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다시 사서(司書)에 등용되었으며, 영남안집어사(嶺南安集御史)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다. 이어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도당록(都堂錄)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731년 영남감진어사(嶺南監賑御史)로 나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함경도에 북도진휼사(北道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로 귀양갔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2]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다. 영조가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할 때 명문 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 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했으며,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3]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해 다른 신하들과 함께 『각전각궁공상정례(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尙方定例)』 3권을 합해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출판하였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4]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았으며, 암행어사 때의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5]

암행어사

박문수와 관련된 많은 암행어사 설화가 있으나, 실제 역사 속에서 박문수가 정작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었다.[6]

1727년(영조 3) 9월의 일로, 이때 박문수는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임명되어 영남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암행어사는 그야말로 암행을 하는 어사였으나, 박문수는 이때 어사의 직함을 띠고 다음 해 3월까지 안동을 비롯해 예천, 상주 등지를 순행하며 도내 명망 있는 인사들과 공개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처럼 역사 기록을 보면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으나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역도 영남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지금 구전되는 박문수 관련 설화는 비단 영남에 국한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제주나 강화도까지도 관련 설화가 전하고 있으니, 그의 인기를 가히 실감할 만하다.[7]

그렇다면 이렇게 전설과 사실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박문수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라 생각된다. 1727년 박문수가 영남에 어사로 파견되어 활동할 때 환곡을 백성들의 삶을 위한 밑천으로 돌렸고, 탐관오리들을 다스렸으며, 바닷가 고을에 명망 있는 인물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거나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백성들에게 많은 어사나 암행어사가 있었음에도 박문수라는 이름이 각인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후대에 내려오면서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것이라 하겠다.[8]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박문수 박항한 A는 B의 아들이다
박선 박문수 A는 B의 선조이다
박장원 박문수 A는 B의 선조이다
박문수 정미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박문수 이인좌의난 A는 B에 참가하였다 진압군 참여
박문수 오명항 A는 B와 관련이 있다
박문수 소론 A는 B에 포함된다
박문수 영남감진어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1731
박문수 수어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1750
박문수 영남안집어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1724
박문수 오명항토적송공비 A는 B를 저술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민백
  2. 민백
  3. 민백
  4. 민백
  5. 두산백과
  6.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수 [朴文秀] - 영원한 암행어사 (인물한국사)
  7.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수 [朴文秀] - 영원한 암행어사 (인물한국사)
  8.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수 [朴文秀] - 영원한 암행어사 (인물한국사)

참고문헌

  • 유승주, "박문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명옥, 『역사인물동화 연구 : 박문수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 방은순, 「朴文秀의 붕당인식과 국가재정론」, 『충청문화연구』 3,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0, 47-84쪽.
  • 육재용, 「<박문수전>의 복합 텍스트성과 형성원리」, 고소설연구 14, 한국고소설학회, 2002, 183-210쪽.
  • 심재우, 역사 속의 박문수와 암행어사로의 형상화, 역사와 실학 41, 역사실학회, 2010, 5-36쪽.
  • 이헌홍, 「<박문수전>의 제재적 근원 연구」, 『한국민족문화』29,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7, 221-241쪽.
  • 이승수, 「朴文秀 전승의 역사적 기반 탐색」, 『한국문화』42,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문화연구원, 2008, 37-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