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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정사 뒤쪽 높은 곳에 배치. 1924년 각 지방의 선비들이 기국정과 같이 시내 소제동에 있던 송시열의 고택을 이건하여 사당을 만들었다. 남간정사 뒤에 20단의 돌계단이 놓여 있고 이 계단을 오르면 현판없는 3칸대문이 있다. 문을 들어서면 횡으로 45척, 앞뒤 폭이 15척 정도의 뜰이 있는데 여기에 시멘트 보도블록을 격자로 깔아놓았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화강석을 잘다듬어 4단으로 층급쌓기를 하였다. 경사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정면에만 기단석을 쌓고 측면과 뒤에는 토단으로 되어 있다.
  
 
==촬영 스팟==
 
==촬영 스팟==

2017년 10월 8일 (일) 13:43 판

답사지 정보

남간정사

  • 송시열이 1683년 만년에 능인암 아래에 건립한 서당으로, 송시열은 여기서 유림과 제자들을 모아 성리학을 강론하며 지냈다.
  • 남간정사의 ‘남간’은 주자의 시구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빌어온 말로 볕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을 뜻한다. 지금은 이 일대까지 시가지가 번져왔고 바로 옆으로 찻길이 지나가지만 예전에는 지금의 담 안쪽뿐 아니라 주변의 숲과 시내가 모두 남간정사의 뜨락이 되었을 것이다.
  • 남간정사는 계곡에 있는 샘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건물의 대청 밑을 지나서 연못으로 흘러가게 하였는데, 이는 한국 정원 조경사에 새로운 조경방법이다.
  •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네 칸은 대청이고 서쪽 두 칸은 방이며 동쪽 두 칸은 뒤쪽 한 칸이 방이고 앞쪽 한 칸에 대청과 연결된 누마루가 놓였다. 대청보다 한 단 높게 만들어진 이 누마루는 방에서 볼 때는 다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아래쪽에 아궁이가 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대청 밑으로 물길을 낸 점이다. 양쪽의 방은 축대 위에 세워졌고 대청은 다리 걸치듯 공중에 떠 있다. 그 아래로 집 뒤편 샘에서 나온 물이 흘러 앞쪽 연못으로 들어간다. 또 이 건물은 앞이 아니라 뒤쪽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기국정

기국정은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에 있던 송시열의 별당이다. 효종 5년(1654)에 송시열이 벼슬을 사양하고 내려와 있으면서 소제 방죽을 쌓고 그 연못가에 세웠던 건물로, 주변에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하게 피어난다 하여 기국정(杞菊亭)이라 이름지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대전역을 지으면서 마을이 커져 소제 연못을 메우게 되자 1926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기국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왼쪽 네 칸은 대청, 오른쪽 뒤편의 한 칸 반은 방이고 앞쪽 반 칸은 대청보다 한 단 높은 누마루, 누마루 아래는 아궁이다. 방 바깥에 좁다란 툇마루가 달렸다.

남간사

남간정사 뒤쪽 높은 곳에 배치. 1924년 각 지방의 선비들이 기국정과 같이 시내 소제동에 있던 송시열의 고택을 이건하여 사당을 만들었다. 남간정사 뒤에 20단의 돌계단이 놓여 있고 이 계단을 오르면 현판없는 3칸대문이 있다. 문을 들어서면 횡으로 45척, 앞뒤 폭이 15척 정도의 뜰이 있는데 여기에 시멘트 보도블록을 격자로 깔아놓았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화강석을 잘다듬어 4단으로 층급쌓기를 하였다. 경사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정면에만 기단석을 쌓고 측면과 뒤에는 토단으로 되어 있다.

촬영 스팟

  1. 드론 불가
  2. 파노라마 5
    • 정문 앞
    • 기국정 앞
    • 남간정사 + 못 보이게
    • 남간정사 뒷편
    • 남간사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