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내용)
(내용)
38번째 줄: 38번째 줄:
  
 
*초계문신의 교육
 
*초계문신의 교육
1781년(정조 5) 2월에 확립된 초계문신 교육은 각신의 고유한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초계문신제는 과거를 거친 문신(文臣) 가운데 참상관(參上官)‧ 참하관(參下官)을 막론하고 37세 이하의 사람을 의정부에서 선발하여 40세가 될 때까지 교육하는 제도였다. 이렇듯 관료의 재교육을 실시한 목적은 경학(經學)과 역사(歷史)에 밝은 인재를 주축으로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
초계문신제는 과거를 거친 문신(文臣) 가운데 참상관(參上官)‧ 참하관(參下官)을 막론하고 37세 이하의 사람을 의정부에서 선발하여 40세가 될 때까지 교육하는 제도였다. 이렇듯 관료의 재교육을 실시한 목적은 경학(經學)과 역사(歷史)에 밝은 인재를 주축으로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정조 때의 초계문신은 모두 10회에 걸쳐 138명이 선발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이후 높은 관직에 진출했으며 각신으로도 18명이 진출했다. 그러나 유학적인 정치사상을 관료사회에 부식시키려 했던 정조의 노력과는 달리 정조가 사학(邪學)으로 규정했던 서학(西學)과 패관소품(稗官小品)이 관료사회에까지 침투하고, 심지어는 초계문신 출신인 [[정약용 | 정약용(丁若鏞)]]‧ 정약전(丁若銓) 등이 서학에 연루 되는 등 정조의 의도와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조 사후 [[김조순 | 김조순(金祖淳)]], [[김재찬 | 김재찬(金載瓚)]], [[서유구 | 서유구(徐有榘)]] 등 많은 초계문신 출신 인사들이 19세기의 주도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ref>이민아,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G0011 규장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컨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정조 때의 초계문신은 모두 10회에 걸쳐 138명이 선발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이후 높은 관직에 진출했으며 각신으로도 18명이 진출했다. 정조 사후에도 [[김조순 | 김조순(金祖淳)]], [[김재찬 | 김재찬(金載瓚)]], [[서유구 | 서유구(徐有榘)]] 등 많은 초계문신 출신 인사들이 19세기의 주도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ref>이민아,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G0011 규장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컨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변화===
+
===역할 및 기능의 축소===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면서 규장각은 도서를 수장하고 관리하는 기관 정도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의 부속기관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명칭이 규장원(奎章院)으로 바뀌었다가 1897년(고종 34)에 규장각이라는 이름을 회복하였다. 1907년 봉상시(奉常寺), 종부시, 홍문관이 폐지되면서 그 사무가 규장각으로 이관되었고, 규장각은 제실도서(帝室圖書)라는 이름으로 왕실과 각 관청의 도서를 수집하여 관장했다.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으로 규장각이 폐지되고 규장각 도서들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혼란한 시기, 이관을 거듭하면서 증감을 거듭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규장각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ref>이민아,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G0011 규장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컨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면서 규장각은 도서를 수장하고 관리하는 기관 정도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의 부속기관이 되었으며,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으로 규장각이 폐지되고 규장각 도서들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혼란한 시기, 이관을 거듭하면서 증감을 거듭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규장각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ref>이민아,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G0011 규장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컨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내용==
 
==내용==

2017년 10월 5일 (목) 21:35 판

규장각(奎章閣)
"규장각",『국립중앙박물관』online, 국립중앙박물관.
대표명칭 규장각
한자표기 奎章閣
이칭 내각
유형 관청
창립자 정조
창립시대 조선
창립일 1776
해체일 1910
관련기관 장서각, 조선총독부, 교서관, 홍문관, 예문관, 검서관



정의

규장각은 조선 후기 장서의 인쇄, 보관 및 언론의 역할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내용

설립

정조는 즉위 후 외척 및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의 서립을 추진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신을 가장 가까운 신하로 둠으로써 관료기강을 쇄신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즉위 5년 2월 규장각의 기능이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다. 정조가 1781년(정조 5) 3월 전‧현직 각신(閣臣)들과 내각(內閣)의 이문원(摛文院)에서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한 후 각신들에게 정치적 혁신을 위한 보좌를 당부하면서 시상(施賞)했는데, 이는 가까운 신하의 친족으로 인해 해이해진 관료기강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1]

역할

  • 장서의 보관 및 검토

창덕궁 후원에 위치했던 규장각의 본각에는 정조의 초상화 및 글‧글씨‧도장 등을 봉안하였고, 서남쪽의 봉모당(奉謨堂)에는 역대 왕들의 다양한 글‧글씨‧그림과 족보, 왕의 치적을 기록한 문서 등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정남쪽의 열고관(閱古館)과 그 북편의 개유와(皆有窩)에는 중국의 서적을, 서북쪽의 서고(西庫)는 우리나라의 서적을 각각 소장하였고, 서쪽의 이안각(移安閣)은 포쇄를 위해 사용하였다. [2] 정서의 보관을 위해 여러 차례 문류 작업히 행해졌는데, 첫 번째 분류 목록은 1781년(정조 5) 약 3만여 권의 중국 책을 대상으로 서호수(徐浩修)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를 ≪규장총목 奎章總目≫이라 하며 이것이 오늘날 규장각도서의 시원(始源)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 책들만을 분류한 것이 『누판고』와 『군셔표기』이다.[3]

  • 장서의 간행

어제와 서적의 소장만을 담당하던 규장각은 원년 12월 제학 서명응(徐命膺)의 건의로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귀속함에 따라 그 업무가 확대되었다. [4] 이에 정유자(丁酉字, 1777년), 한구자(韓構字, 1782년), 생생자(生生字, 1792년), 정리자(整理字, 1795년) 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수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간행하였다.[5] 이때부터 규장각은 역대 국왕 관련 기록 및 각종 서적의 인쇄부터 반포‧소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6] 대표적인 규장각 간행 저서로는 일성록, 홍재전서 등이 있다.

  • 초계문신의 교육

초계문신제는 과거를 거친 문신(文臣) 가운데 참상관(參上官)‧ 참하관(參下官)을 막론하고 37세 이하의 사람을 의정부에서 선발하여 40세가 될 때까지 교육하는 제도였다. 이렇듯 관료의 재교육을 실시한 목적은 경학(經學)과 역사(歷史)에 밝은 인재를 주축으로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정조 때의 초계문신은 모두 10회에 걸쳐 138명이 선발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이후 높은 관직에 진출했으며 각신으로도 18명이 진출했다. 정조 사후에도 김조순(金祖淳), 김재찬(金載瓚), 서유구(徐有榘) 등 많은 초계문신 출신 인사들이 19세기의 주도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7]

역할 및 기능의 축소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면서 규장각은 도서를 수장하고 관리하는 기관 정도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의 부속기관이 되었으며,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으로 규장각이 폐지되고 규장각 도서들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혼란한 시기, 이관을 거듭하면서 증감을 거듭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규장각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8]

시각자료

갤러리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서유구|| 규장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조 규장각 A는 B를 설립하였다 1776년
숙종 규장각 A는 B를 설립하였다 1674-1720년
승정원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홍문관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문관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서호수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서명응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교서관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1777년
서호수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정약용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유득공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박제가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74-1720년 시중사 내부에 규장각을 처음 설치하였다
1776년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였다
1777년 교서관이 규장각에 편입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궁내부의 부속기관으로 변경되었다
1895년 규정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897년 명칭이 규장각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1910년 규장각이 폐지되었다
1930년 규장각이 경성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1945년 규장각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주석

  1.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용덕,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김용덕,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강문식, 「규장각 西庫의 운영과 서적 관리 」, 『한국문화』vol.70,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5
    • 배제총, 「조선(朝鮮) 정조대(正祖代)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조선사연구』vol.5, 조선사연구회, 1996.

유용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