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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30일 (토) 15:55 판

양만춘(楊萬春)
대표명칭 양만춘
한자표기 楊萬春
시대 고구려
대표직함 성주


정의

고구려의 장군이자 안시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의 성주이다.

내용

문헌 속에 기록된 양만춘

고구려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쓰여 있다. [1]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과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에 의하면, 안시성전투에서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해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양만춘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양만춘안시성전투

645년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이세적(李世勣)의 건의로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15만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안시성에서 8리 떨어진 곳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에서 양만춘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은 완강히 저항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총 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요동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고 군량도 다하자 당나라 태종은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양만춘은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고, 당나라 태종은 그의 기백을 높이 평가해 비단 100필을 주면서 격려하였다. [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만춘 안시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양만춘 안시성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645년
당나라 태종 안시성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645년
안시성전투 안시성 A는 B에서 일어났다 645년
양만춘 동춘당선생별집 A는 B에 언급되었다
양만춘 열하일기 A는 B에 언급되었다
양만춘 정관음 A는 B에 언급되었다
양만춘 가정집 A는 B에 언급되었다
송준길 동춘당선생별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박지원 열하일기 A는 B를 저술하였다
이색 정관음 A는 B를 저술하였다
이곡 가정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645년 양만춘안시성에서 안시성전투에 참가하였다

주석

  1. 이도학, "양만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도학, "양만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도학, "양만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김세호, 「연행을 통해 되살아난 안시성(安市城)과 梁萬春/楊萬春」, 『漢文學報』31, 우리한문학회, 2014.
    • 남재철, 「安市城主의 姓名 ‘양만춘' 考證 1 : 姓名의 出處 樣相 檢討를 中心으로」, 『동아시아고대학』35,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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