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연행록 (해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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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9일 (화) 20:57 기준 최신판
본 기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6년에 개최한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2016.6.29~12.31)'의 도록 및 2016~2017년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중 무오연행록 (해독) 관련 '발표내용'을 참고 활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원문 중 옛 한글의 경우 웹브라우저 및 시스템의 문자세트(character set) 표현상 한계로 인해 표시가 불완전할 수 있으며, 각 내용상의 사소한 교정은 별도의 언급 없이 적용하였습니다. |
원문과 해석문
원문 | 해석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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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삼일 관의 머므다. 오시랑(午時量)의 역관이 드러와 고 “길 왕 쟤 다 마으락이 우 상모 히며 통관이 아문의 잇쟤 그리거 나가 그 연고 무니 태샹황이 묘시(卯時)의 상(喪事)낫다”더라. 우리 황셩의 니던 날 즉시 드러오믈 뭇고 그 이튼날 인견코져 러니 그날 비록 아니 되여시나 이십구일 슈방(漱芳齋)의셔 인견야 국왕 평안(平安)시물 뭇고 그 이튼날 황뎨 듕화뎐(中和殿)의셔 인견야 한만(閑漫) 슈작이 이시며 졍됴(正朝)의 두곳의 화 됴하(朝賀) 바드니 일노 홍화졈(紅花店) 이후 소문이 극히 허황믈 짐작고 황셩 사도 귀쳔 업시 아국(我國使行) 드러온 후로부터 태상황 병환이 쾌히 령복(寧復)엿다 일콧더니 일 슈일(數日)이 못야 이의 니니 됴하 못고 이곳의셔 큰 일이 잇 당니 진실노 근심되고 민망지라. | 초삼일 관에 머물다. 오시쯤에 역관이 들어와 고하되, “길에 왕래하는 자가 다 마래기 위에 상모[槊毛]를 떼었으며, 통관이 아문에 있는 자가 또한 그리하거늘, 나가 그 이유를 물으니, 태상황이 오늘 卯時에 喪事가 났다.”하더라. 우리가 황성에 이르던 날 즉시 들어오는가를 묻고 그 이튿날 인견코자 하더니, 그날 비록 인견하지 못하였으나, 29일 漱芳齋에서 인견하여 國王의 평안하심을 묻고, 그 이튿날 황제가 中和殿에서 인견하여 한가하고 느긋한 수작이 있으며, 正朝에 두 곳에 나누어 朝賀를 받으니, 이로써 紅花店 이후 소문이 극히 허황함을 짐작하고 황성 사람도 귀천 없이 우리라라 使行이 들어온 후로부터 태상황 병환이 회복되었다고 일컫더니, 며칠 되지 않아 이에 이르니, 朝賀를 못하고 이곳에서 큰일이 있는 때를 당하니 진실로 근심되고 민망한지라. |
황셩 안 사이 조곰도 놀난 빗과 셜워 빗치 업고 다만 오 “셰 노인의 예(例事)라 무 괴이리오” 며 샹고(商賈)들이 양피(羊皮)를 무역여 코 내지 아니니이 드러오무로브터 양피 갑시 도닷다 말이 들니고 오랑 겨을의 국상을 만나면 흰 갓옷 닙어 샹복이라 일 연괴라. 인심이 흉악기 이더라. 그러나 나라희 큰 샹이시나 셩즁이 안연(晏然)야 아홉셩문을 의구히 열엇고 큰길의 급히 왕쟈 보지 못며 졍됴 이후 지춍(紙銃)소 쥬야(晝夜) 히이지 아니터니 이날 낫 젼의 일시의 업셔지더라. | 황성 안 사람이 조금도 놀란 빛과 서러워하는 빛이 없고, 다만 말하기를, “100세 노인의 예사라, 무엇이 괴이하리오.”하며, 商賈들과 羊皮를 수입하여 쌓아놓고 내지 아니하니, 사행이 들어옴으로부터 양피 값이 올랐다는 말이 들리고, 오랑캐 겨울에 國喪을 만나면 흰 갖옷을 입어 상복이라 일컫기 때문이라. 인심이 흉악하기 이러하더라. 그러나 나라에 큰 상사가 있으나, 城中이 편안하고 침착하여 아홉 성문을 예전과 다름없이 열었고, 큰길에 급히 왕래하는 자를 보지 못하여 설날 아침 이후는 딱총 소리가 주야로 끊이지 않더니, 이날 낮 일시에 없어지더라. |
녯법의 황뎨 젼의 태 셰오지 아니고 다만 몃 아 아모 세오라야 아모도 므게 궐 현판(懸板) 속의 너헛다가 죽기 님야 비로소 일홈 둔 곳을 갈의치 법이라.2) 그법이 극히 소활(疎闊)야 근심되고 위 일이 경(頃刻)의 관계지라 이러므로 황뎨 상의 여러 날 발상(發喪) 아니코 황뎨 졍 후의 비로소 발샹을 러니 태황은 뉵십년 텬하 누리고 이의 젼의 황태 세워 위(位) 졍니 신황뎨 즉위 지 임의 년이라. 밋 태샹황 상 당 나라 어룬 님군이 잇지라 인심이 귀향(歸向)배 인심을 인연여 텬해 안연(天下晏然)고 즉일의 발샹야 관(百官)이 야흐로 궐하(闕下)의 모히엿다니 대개 태황이 이젼 그른 법을 라 젼(前代)의 아다온 법을 본바드니 엇지 영명(英明) 님군이 아니리오. 그 복녁(福力)이 이치 맛당도다. | 옛 법에 황제 생전에 太子를 세우지 아니하고 다만 몇째 아들 아무를 세우라 하여 아무도 모르게 闕內 懸板 속에 넣었다가 죽기를 당하여 비로소 이름 둔 곳을 가르치는 법이라. 그 법이 극히 疎闊하여 근심되고 위태한 일이 頃刻에 관계한지라, 이러므로 황제 상사에 여러 날 發喪을 아니 하고, 새 황제를 정한 후에 비로소 발상을 하더니, 太上은 60년 천하를 누리고, 이에 생전에 皇太子를 세워 位를 정하니, 신황제(嘉慶帝)가 即位한 지 이미 4년이라. 태상황 상사를 당하여 나라에 어른 임금이 있는지라, 인심이 歸向하는 바 인심을 인연으로 천하가 晏然하고 바로 그날 발상하여 백관이 바야흐로 궐하에 모였다 하니, 대개 太皇(乾隆帝)이 이전의 그른 법을 깨달아 前代의 아름다운 법을 본받으니, 어찌 사리에 밝은 임금이 아니리요. 그 福力이 이같이 마땅하더라. |
오후의 쥬 부(主客司 付子) 니니 오“됴션 신과 통관과 와 셔반의 복(服) 닙을 대포(大布)를 관으로 보거시니 즉의 녜부(禮部)로셔 타다가 옷 일워 명일 궐의 나아와 일졔히 모히라” 엿더라. 밤든 후의 역관이 녜부 의(儀)□ 가져와시니 이 나라희 므 일이 이시면 위의 졀 녜부로셔 마련야 반포미러라. 의□의 닐더시 “녜부 삼가 엿와 황지(皇旨) 쳥노니 대태샹황뎨 궤연(几筵) 알 날마다 향등(香燈)을 도도며 슈직 곳은 춍관과 태감으로 셔로 맛지고 아과 낫과 져녁 삼시졔젼의 법가(法駕)와 뇨(燎) 초와 베플며 븕은 명졍(銘旌)을 건쳥문 외현의 셰우고 왕 이하와 문무관과 종실 각노(宗室 閣老)의 무리며 공쥬 복진(福晉)3) 이하와[복진은 옹쥬튼 사이라] 향군(鄕君)[공후 부인의 관명], 봉은쟝군(奉恩將軍)의 안, 공인(恭人) 이샹과 민공民公[벼 일홈] 부인 이하와 좌령삼시시위(佐領三時侍衛)[벼] 안해 이샹과 죵실의 드리 긔 복(服)을 일우며 무부관원(內務府官員) 녕 최당아(領催□當阿)[벼]의 무리 다 머리털을 코 복을 일우며 부[마을 일홈] 삼긔[벼] 관원과 호군(護軍)과 녕최당아의 안해와 밋 관영하집(官營下執事)[벼] 남부(男婦)[나와 안해라] 무리 다 머리털을 버히고 복을 일우고 삭쟉(削爵) 종실 각노도 여금 복을 일우며 삭직 만주와 한인대신의 관원은 셩복(成服)의 드지 아니며 경셩의 잇 외번공주(外藩公主)와 복진격노(福晉格格)4)[종실의 이라]의 무리와 부(額駙)[벼] 왕길(王台吉)[벼]의 무리와 밋 외국공 다 여금 복을 일우 그 이십칠일예 경셩의 니른쟈 일톄 복을 일우고 후의 니른쟈 나희 관의 영낙(纓絡)을 리고 겨집은 슈식(首飾)을 려 흘을 지고 단묘(端廟)와 당와 복션젼(福善殿)과 슈황뎐(壽皇殿)과 곤령궁(坤寧宮) 졔와 신젼과 능침의 응당 졔 지 곳 일을 맛튼 관원과 감(內監)[환관]과 밋 군듕(軍中)과 영문(營門)의 잇이와 츌젼 군와 그 가쇽의 거샹(居喪) 옷슬 다 졍지고 부모의 상 새로 만나니와 녀의 역질(疫疾) 도드니 복을 일우지 아니며 인야 일을 머리털을 지 아니며 관원의 일졔히 모히 곳은 갓가히 뫼시던 왕과 대신과 건쳥문의 시위던 이 건쳥문 안희 뫼히여 오긔왕(五旗王)[벼슬품슈] 이하와 입팔분공[공벼 품슈] 이샹과 대신과 각태(內閣太學士)의 무리와 샹삼긔(上三旗) 시위와 한만 종실 각노와 포의 관원은 건쳥궁 밧긔 뫼히여 오긔도통부(五旗都統府) 도통(都統)과 팔긔(八旗)관원과 경셩 잇 대신의 관원과 믈잊 응당 뫼히 관원은 경훈문[景運門] 밧긔 뫼히여 좌우 화 립(配立)야 날마다 세 번식 궁(梓宮) 알젼(奠)드리 기려 반열을 와 슬프믈 드러 녜(行禮)며 안희잇 공쥬와 복진은 경산(景山) 문 안희셔 을 고 신무문(神武門)으로 나와 챵진문의 니러 을 려 안흐로 나와 궤연(几筵) 뫼신 뎐(殿內)예셔 녜며 오긔왕의 복진과 군쥬 경산 문 밧긔셔 을 고 신무문으로 나와 뇽죵문(隆宗門)의 니러 을 려 안흐로 나오며 대신의 명뷔(命婦) 맛당히 안해 나올 쟈 경산 문 밧긔 잇다가 신무문의 니러 을 려 거러여 늉죵문을 나아가 궤연 뫼신 집 아 붉은 셤 올흔편의셔 녜며 그 능히 안해 나아오지 못 명부 늉죵문 밧긔 일졔히 모히여 날마다 세 번식 반열을 라 슬프믈 드러 녜며 물읫 삼일을 고 일만의 왕륵(王貝勒)과 패공(貝子公)[졔일놉흔 벼이라]의 공쥬와 왕의 복진[옹쥬튼 벼이라]들은 각각 집 실(齋室)의 이시며 각부 각원관은 각각 아문의 이시며 상복 이십칠을 지되 날마다 일졔히 모히여 공경여 상 위의(威儀) 다리고 왕 대신과 시위한 집(執事) 상복을 [일]닙으며, 왕공관원과 군와 셩이 다 일을 머리털을 치지 아니며 갓가은 종실과 경셩의 잇 왕공대신과 문무관원은 긔년(朞年) 안 혼(婚娶) 아니며 경셩의 와잇 군와 셩은 마으락□의 영낙을 히고 샹복을 이십칠일을 닙고 일 안희 혼 아니며 풍뉴(風流) 짓지 아니며 문무의 히기 기리 관원과 과업(科業)을 닉이 감(監生)과 니뎐(吏銓)과 승관과 도관도 다 샹복을 닙어 슌텬부(順天府)의 삼일을 모히여 아과 져녁의 술프물 들며 상복 벗기 젼은 비답(批答)의 프른 붓 며 각부 각원 엿 글월은 십오일 후로 기려 다시 엿오며 이십칠을 안 엿 샹소와 문셔와 니문(移文)을 다 프른 인(印)을 치고 경셩의 잇 졀과 묘당의 잇 븍을 삼만 마치 치라.” 엿더라. | 오후에 主客司 문서에 이르길, “조선 사신과 통관과 대사와 서반의 服 입을 大布를 관으로 보낼 것이니, 즉각 禮部로부터 타다가 옷을 만들어 내일 궐내에 나와 일제히 모이라.”하였더라. 밤이 깊어진 후에 역관이 예부 儀註를 가져왔으니, 이는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절차를 예부로부터 마련하여 頒布함이러라. 의주에 일렀으되, “예부는 삼가 여쭈어 皇旨를 청하노니, 大行 태상 황제 几筵 앞에 날마다 香燈을 달며, 守直하는 곳은 摠管과 太監으로 서로 맡기고, 아침과 낮과 저녁 三時 제사에 法駕와 燎(大燭)를 갖추어 베풀며, 붉은 銘旌을 건청문 왼쪽에 세우고, 왕 이하와 문무백관과 宗室 閣老의 무리며 공주 복진 이하와 鄕君, 奉恩將軍의 아내 恭人 이상과 民公부인 이하와 佐領三時侍衛 아내 이상과 종실의 딸들이 함께 服을 이루며, 內務府官員 영최배당아의 무리가 다 머리털을 끊고 복을 이루며, 내부 삼기 관원과 護軍과 또 영최배당아의 아내와 官營下執事 부부 무리가 모두 머리털을 베고 복을 이루며, 削爵한 종실 각로도 또한 복을 이루며, 삭탈관직한 滿洲와 漢人大臣의 관원은 成服에 들지 아니하며, 京城에 있는 外藩 公主와 복진격노의 무리와 액부와 왕태길의 무리와 외국 공사로 하여금 복을 이루게 하되, 그 27일 내에 경성에 이른 자는 모두 복을 이루고 후에 이른 자는 사나이는 관에 영락을 버리고, 계집은 머리 장식을 버려 사흘을 지내고, 端廟와 당자와 福善殿과 壽皇殿과 坤寧宮 제사와 神殿과 陵寢에 응당 제사 지내는 곳 일을 맡은 관원과 환관과 軍中과 營門에 있는 이와 出戰한 군사와 그 가족의 상복을 다 정지하고, 그 부모의 상사를 새로 만난 이와 자녀의 疫疾 돋은 이도 또한 복을 이루지 아니하며, 100일 동안 머리털을 깎지 아니하며, 관원으로서 가까이 모시던 왕과 大臣과 乾淸門에 시위하던 이는 건청문 안에 모이어, 五旗王 이하와 入八分公 이상과 內大臣과 內閣 太學士의 무리와 上三旗 시위와 한인과 만주인 宗室 閣老와 布衣 관원은 건청문 밖에 모이어, 五旗 都統府 都統과 八旗 관원과 경성에 있는 대신의 관원과 대체로 응당 모이는 관원은 경운문 밖에 모여 좌우로 나누어 늘어서서, 날마다 세 번씩 관 앞에 奠 드리는 때를 기다려 반열을 따라 슬픔으로 行禮하며, 안에 있는 공주와 복진은 景山 柵門 안에서 말을 타고 神武門으로 나와 창진문에 이르러 말을 내려 안으로 나와 几筵 모신 殿內에서 행례하며, 오기왕의 복진과 郡主는 경산 책문 밖에서 말을 타고 신무문으로 나와 隆宗門에 이르러 말을 내려 안으로 나오며, 대신의 命婦 마땅히 안에 나올 자는 경산 책문 밖에 있다가 신무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가며, 융종문을 나아가 궤연 모신 집 아래 丹階 오른편에서 행례하며, 그 능히 안에 나오지 못할 명부는 융종문 밖에 일제히 모여 날마다 세 번씩 반열을 따라 슬픔으로 행례하며, 무릇 3일을 하고 4일 만에는 王貝勒과 貝子公의 공주와 왕의 福晉들은 각각 私家의 齋室에 있으며 각부 각원 관원은 각각 아문에 있으며, 喪服을 입고 27일을 지내되 날마다 일제히 모이어 공경하여 喪事 威儀를 갖추고, 왕대신과 시위한 執事는 상복을 입으며, 王公官員과 군사와 백성이 다 100일 동안 머리털을 자르지 아니하며, 가까운 종실과 경성에 있는 왕공 대신과 문무 관원은 1년 안에 혼인을 하지 않으며, 경성에 와 있는 군사와 백성은 마래기의 영락을 떼고 상복을 27일을 입고 100일 안에 혼인을 아니 하며, 風流를 짓지 아니하며, 文武의 과거를 보려는 관원과, 과거 공부를 익히는 監生, 吏銓, 僧官, 道官도 다 상복을 입어 順天府에 3일을 모여 아침과 저녁에 슬픔을 드리며 상복 벗기 전은 批答에 푸른 붓을 쓰며, 각부 각원 여쭙는 글월은 15일 후로 기다려 다시 여쭈오며, 27일 안에 여쭈는 上疏와 文書와 移文을 다 푸른 印을 찍고, 경성에 있는 절과 廟堂에 있는 북을 3만마치를 치라.”하였더라.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