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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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이후에 [[영암 도갑사|도갑사]]의 동쪽 산기슭에 부도탑과 탑비를 세웠다. 이를 근거로 수미의 부도가 [[영암 도갑사|도갑사]]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영암 도갑사|도갑사]]에 있는 14기의 부도 중 수미의 것으로 확인된 부도는 없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GC04400989 수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당시에 세워진 탑비는 마멸되어 1633년([[조선 인조|인조]] 11)에 비가 다시 건립되었으며 [[성총|백암성총(栢庵性聰)]]이 찬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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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이후에 [[영암 도갑사|도갑사]]의 동쪽 산기슭에 부도탑과 탑비를 세웠다. 이를 근거로 수미의 부도가 [[영암 도갑사|도갑사]]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영암 도갑사|도갑사]]에 있는 14기의 부도 중 수미의 것으로 확인된 부도는 없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01&contents_id=GC04400989 수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당시에 세워진 탑비는 마멸되어 1633년([[조선 인조|인조]] 11)에 [[도갑사묘각화상비|비]]가 다시 건립되었으며 [[성총|백암성총(栢庵性聰)]]이 찬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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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의 동쪽 산 기슭에 부도탑을 세우고 行德을 기록하여 碑를 세웠으나, 이미 글자가 거의 磨沒되어 판독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現在의 주지 淸信和尙이 다시 비문을 새겨 新碑를 건립하여 스님의 행적을 영원히 傳示하고자 그의 事蹟을 적은 行狀을 가지고 와서 碑銘을 청탁하므로 부득이 비문을 짓고 다음과 같이 銘하는 바이다.
 
|도갑사의 동쪽 산 기슭에 부도탑을 세우고 行德을 기록하여 碑를 세웠으나, 이미 글자가 거의 磨沒되어 판독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現在의 주지 淸信和尙이 다시 비문을 새겨 新碑를 건립하여 스님의 행적을 영원히 傳示하고자 그의 事蹟을 적은 行狀을 가지고 와서 碑銘을 청탁하므로 부득이 비문을 짓고 다음과 같이 銘하는 바이다.

2017년 9월 3일 (일) 02:43 판

수미(守眉)
BHST Monk1.png
대표명칭 수미
한자 守眉
생몰년 미상-미상
묘각(妙覺)
법명 수미(守眉)
성씨 최씨(崔氏)
출신지 영암(靈巖)
승탑비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도갑사수미왕사비



정의

조선 전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수미(守眉)는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가계와 정확한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1]

Quote-left.png 스님의 휘는 守眉이고, 속성은 崔氏니 옛 朗州 출신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0쪽.


탄생설화

어머니는 이인(異人)이 구슬을 남기고 가는 꿈을 꾸고 수미를 낳았다고 한다.[2]

Quote-left.png 어머니의 꿈에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구슬을 전해받는 胎夢을 꾸고 잉태하여 태어날 때에는 특이한 香氣가 방 안에 가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0쪽.


출가수행

13세가 되던 해에 월출산 도갑사(道岬寺)로 출가하였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3]

Quote-left.png 어릴 때부터 英特하여 항상 世俗을 멀리하려는 超然한 뜻을 품고 있다가 13살 때, 낭주의 西쪽에 있는 月出山 道岬寺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그 후 20세가 되어 比丘戒를 받고는 자유롭게 諸方講院으로 다니면서 三藏을 연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0쪽.


활동

처음에는 교학(敎學)에 뜻을 두고 불경을 강(講)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서 신미(信眉)를 만나 함께 대장경(大藏經)을 읽고 율(律)을 익혔다. 그러나 교학과 계율을 공부하는 것이 아무리 훌륭한 인물화를 그려도 생명력이 없는 것과 같음을 깨닫고 참선(參禪)에 뜻을 두게 되었다.[4]

Quote-left.png 諸方講院으로 다니면서 三藏을 연마하였다. 俗離山 法住寺로 가서 信眉 라는 沙彌스님을 만났는네, 뜻밖에 나이도同甲이고 또한 이름도 같았다. 그와 함께 如琢·如磨·如磋·如切히 대장경을 읽고, 毗尼를 익혔다. 그리하여 점점 慈容과 道骨과 眉彩가 뚜렷이 드러났으며, 詞氣와 음성이 朗潤하고, 辯才가 걸림이 없어서 學者들이 모두 그들을 두 甘露門이라고 推仰하여 頭角이 점점 세상에 드러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同學에게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하여야할 本分事를 등지고 있는 것이 마치 僧繇스님이 人物을 잘 그려서 비록 뛰어난 妙畵라고는 하지만, 마침내 살아 있는 자가 아닌 것과 같다’고 말하고, 드디어 배우던 學問을 그만두고, 雨傘으로 사용하는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禪窟에 出入하기 시작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0-321쪽.


구곡각운(龜谷覺雲)의 지도를 받았고, 뒤에 정심(正心)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기존의 억불 정책이 완화되고 불교 진흥 정책이 취해졌는데, 이때에 수미는 판선종사(判禪宗事)가 되어 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5]

Quote-left.png 처음으로 龜谷覺雲 을 친견하였으나,서로 契合하지 못하였다. 그 후 登階를 만나 入室은 하였지만, 太宗의 佛法沙汰를 맞아 불교의 운명이 암담하고否塞한 시기였으므로 禪席이 황폐하고 寥落하여 희미하여진 것이 마치 새벽의 별 빛과 같았다. 이러한 때, 스님은 判禪宗事에 被選되어 橫으로 터져 흐르는 沙汰佛法의 거센 물결을 막고, 이미 무너진 둑을 막아 물결을 挽廻하여, 宗門의 큰 힘이 되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1-322쪽.


1457년(세조 3)에 도갑사로 돌아와서 황폐화된 절을 중수하고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3구(軀)를 조성하였으며 학승(學僧)들을 모아 지도하였다.[6] 세조가 왕명으로 문도인 홍월(洪月)에게 불사를 주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응대군(永膺大君)이 시주(施主)가 되어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7]

Quote-left.png 本寺인 道岬寺로 돌아왔으니, 이는 本寺를 잊어 버리지 아니함을 보여준 것이다. 스님은 도선국사가 지정한 裨補寺刹의 도량이 거의 황폐하고 乾沒하여 서늘한 안개가 덮인 茂盛한 풀 밭 속에 떨어져 있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개탄하고 大衆에 이르기를 '우리가 이 참혹한 광경을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고 復舊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하물며 聖上께서 스님의 門徒인 洪月 스님으로 하여금 復舊工事를 주관케 하도록 명령을 내렸음에 있어서이랴. 그리하여 莊嚴의 妙한 정성을 다하여 絳闕 과淸都가 마치 공중에서 떨어진 것과 같았다.

뿐만 아니라 永膺大君이 大檀越이 되어 약사여래불상 三軀를 敬塑하여 紺殿에 봉안하였으니, 그 때가 天順紀元 元年이었다. 그리하여 四事供養을 올리는 信徒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 앞을 다투어 모여들고, 六和의 大衆이 무리를 지어 찾아왔다. 많은 信男 信女가 圍繞하고 龍象大德 이 몰려들어 드디어 宗風을 크게 떨쳤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2-323쪽.


수미는 도갑사를 중창하고 그곳에 머물며 종풍을 크게 선양하였다. 세조는 이에 묘각(妙覺)이라는 법호와 자색가사(紫色袈裟)를 하사하고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이는 태조 대의 무학(無學)과 더불어 조선 전기의 드문 왕사 책봉 사례로서, 세조 대 불교 중흥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8]

Quote-left.png 뒤를 이은 光廟께서 예를 갖추고 맞이하여 王師로 책봉하고 妙覺 이라는 호와 紫色 袈裟一領을 하사하였다. 또 자주 手札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象毛拂子와 琉璃念珠를 선사하기도 하였다. 搢紳하고 縫 掖한 公卿大夫로부터 墨綬와 銅符

등 관직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高下를 막론하고 西向하고 꿇어 앉아 법을 물으며, 北쪽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記述할 수 없으니, 스님은 참으로 한 때 모든 사람들이 추앙하는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3-324쪽.


입적

입적한 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나이 63세, 법랍(法臘) 51세이었다.[9]

Quote-left.png 某年 某月 某日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宗門의 大事를 付囑한 다음, 조용히 入寂 하시니, 세수는 63세이고, 법랍은 51夏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4쪽.


탑비의 건립

입적 이후에 도갑사의 동쪽 산기슭에 부도탑과 탑비를 세웠다. 이를 근거로 수미의 부도가 도갑사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도갑사에 있는 14기의 부도 중 수미의 것으로 확인된 부도는 없다.[10] 또한 당시에 세워진 탑비는 마멸되어 1633년(인조 11)에 가 다시 건립되었으며 백암성총(栢庵性聰)이 찬술하였다.

Quote-left.png 도갑사의 동쪽 산 기슭에 부도탑을 세우고 行德을 기록하여 碑를 세웠으나, 이미 글자가 거의 磨沒되어 판독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現在의 주지 淸信和尙이 다시 비문을 새겨 新碑를 건립하여 스님의 행적을 영원히 傳示하고자 그의 事蹟을 적은 行狀을 가지고 와서 碑銘을 청탁하므로 부득이 비문을 짓고 다음과 같이 銘하는 바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4쪽.


또한 1653년(효종 4)에는 영암 도갑사에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도선과 함께 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월출산 도갑사 도선 국사 수미 대선사 비명(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이라고 하여 비의 주인공이 도선과 수미 두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 기록된 내용은 도선의 업적과 비석 건립 과정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고 수미에 대해서는 천순(天順) 연간에 도갑사 법당을 중창하였다고 간략히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11]

Quote-left.png 明나라 天順元年 丁丑年에 信眉와 守眉 두 스님이 合心하여 중창하고, 藝文提學 尹士昀이 重創記를 지었다. Quote-right.png
출처:


불경 간행

1458년(세조 4)에는 왕명으로 경차관(敬差官) 윤찬(尹贊)·정은(鄭珢)을 도와 해인사대장경 50부를 인출하였다. 그 뒤 신미와 함께 선도(禪道)를 홍포하고자 완산정응선사시몽산법어(晥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와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등의 법어(法語)를 해석하고 한글로 번역하였다.[12] 1459년(세조 5)에는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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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12-340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도갑사묘각화상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수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