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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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진은 [[난원|경덕국사]]가 입적한 후에는 [[의천|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1085년([[고려 선종|선종]] 2) [[의천]]이 송나라에 가자 왕명으로 뒤따라갔다.<ref>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7773&cid=50763&categoryId=50784 낙진]",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그곳에서 낙진은 [[의천]]과 함께 [[송 철종|철종(哲宗)]] 황제를 만나고, [[화엄종|화엄종(華嚴宗)]]의 승려인 [[유성|유성법사(有誠法師)]]와 [[항주 고려사|항주 혜인원(抗州 惠因院))의 [[정원|진수법사(晉水法師)]]를 만나 불법을 배웠다. 이후 낙진은 1086년([[고려 선종|선종]] 3) 귀국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4615&cid=40942&categoryId=33382 낙진]",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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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진은 [[난원|경덕국사]]가 입적한 후에는 [[의천|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1085년([[고려 선종|선종]] 2) [[의천]]이 송나라에 가자 왕명으로 뒤따라갔다.<ref>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7773&cid=50763&categoryId=50784 낙진]",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그곳에서 낙진은 [[의천]]과 함께 [[송 철종|철종(哲宗)]] 황제를 만나고, [[화엄종|화엄종(華嚴宗)]]의 승려인 [[유성|유성법사(有誠法師)]]와 [[항주 고려사|항주 혜인원(抗州 惠因院)]]의 [[정원|진수법사(晉水法師)]]를 만나 불법을 배웠다. 이후 낙진은 1086년([[고려 선종|선종]] 3) 귀국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4615&cid=40942&categoryId=33382 낙진]",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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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국사가 입적하고, 대각국사가 경덕국사의 법통(法統)을 계승하였다. 왕사는 경덕문인(景德門人)으로 (결락)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대각국사는 일찍부터 원경(元景)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인위상(引爲上) (결락) 지기강(之紀綱). 문정(門庭) (결락) 무소굴(無所屈) (결락) 대각국사가 원경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는 흔연(欣然)히 그의 의견(意見)을 청납(聽納)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사도 또한 지기(知己)를 만났다고 기꺼워하였다. 사(思) (결락) 대각국사가 일찍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지극한 정성으로 불법(佛法)을 받드는 신심(信心)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되었겠는가"라 하였다.
 
|경덕국사가 입적하고, 대각국사가 경덕국사의 법통(法統)을 계승하였다. 왕사는 경덕문인(景德門人)으로 (결락)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대각국사는 일찍부터 원경(元景)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인위상(引爲上) (결락) 지기강(之紀綱). 문정(門庭) (결락) 무소굴(無所屈) (결락) 대각국사가 원경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는 흔연(欣然)히 그의 의견(意見)을 청납(聽納)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사도 또한 지기(知己)를 만났다고 기꺼워하였다. 사(思) (결락) 대각국사가 일찍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지극한 정성으로 불법(佛法)을 받드는 신심(信心)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되었겠는가"라 하였다.

2017년 8월 11일 (금) 14:37 판

낙진(樂眞)
BHST Monk1.png
대표명칭 낙진
한자 樂眞
생몰년 1045년(정종 11)-1114년(예종 9)
시호 원경(元景)
오공통혜(悟空通慧)
자정(子正)
성씨 신씨
출신지 경기 이천
승탑비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원경왕사 낙진(元景王師 樂眞)은 1045년(정종 11)에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는 이천군(利川郡)의 우족(右族)[1]이었다.[2]

Quote-left.png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이름은 낙진(樂眞)이며, 자(字)는 자정(子正)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남(南) (결락) 이천군(利川郡)의 우족(右族)이었다. 스님께서 탄생한지 몇 달만에 그의 어머니가 (결락) 문전(門前)에 어떤 이상한 스님이 이르러 와서 이르기를, "이 아들은 숙질(淑質)을 받아 태어났으므로, 출가(出家)하여 스님이 되면 반드시 훌륭한 법기(法器)가 될 것이니, 잘 보호하여 키우라"고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반야사 원경왕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85-86쪽.


출가수행

낙진은 어렸을 때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경덕국사(景德國師)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닦았고, 1056년(문종 10) 12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063년(문종 17) 19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대덕(大德)이 되었으며,[3] 경덕국사의 문하에서 계속 수학하였다.[4]

Quote-left.png (결락) 지의귀(志依歸) (결락) 승통(僧統) 균찬(均粲)에 의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결락) 또 경덕국사(景德國師)에게서 수학하였다. 청령(淸寧) 2년 병신세(丙申歲)에 (결락) 사(寺)에 나아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함옹(咸雍) 4년 무신세(戊申歲)에는 대선장(大選場)에 합격하여 대덕(大德) 법계(法階)를 받았다. 이로부터 경덕(景德)의 문하(門下)를 떠나지 아니하고 수학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반야사 원경왕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86쪽.


구법유학

낙진은 경덕국사가 입적한 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1085년(선종 2) 의천이 송나라에 가자 왕명으로 뒤따라갔다.[5] 그곳에서 낙진은 의천과 함께 철종(哲宗) 황제를 만나고, 화엄종(華嚴宗)의 승려인 유성법사(有誠法師)항주 혜인원(抗州 惠因院)진수법사(晉水法師)를 만나 불법을 배웠다. 이후 낙진은 1086년(선종 3) 귀국하였다.[6]

Quote-left.png 경덕국사가 입적하고, 대각국사가 경덕국사의 법통(法統)을 계승하였다. 왕사는 경덕문인(景德門人)으로 (결락)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대각국사는 일찍부터 원경(元景)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인위상(引爲上) (결락) 지기강(之紀綱). 문정(門庭) (결락) 무소굴(無所屈) (결락) 대각국사가 원경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는 흔연(欣然)히 그의 의견(意見)을 청납(聽納)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사도 또한 지기(知己)를 만났다고 기꺼워하였다. 사(思) (결락) 대각국사가 일찍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지극한 정성으로 불법(佛法)을 받드는 신심(信心)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되었겠는가"라 하였다.

숙왕(肅王)이 번저(藩邸)에 있을 때, (결락) 도량(道場)을 개설하고, 왕사를 청하여 강주(講主)로 모셨는데, 도속(道俗)의 청중이 무려 수백명에 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名聲)이 더욱 널리 떨쳤다. 증시(曾是) 대각(大覺) (결락) "밝지 않음이 이미 오래되었다. 내가 송(宋)나라에 가서 유학(遊學)하여 그 법(法)을 얻고자 하니, 나를 따라갈 자 오직 자네뿐이라"고 했다. 이때 왕사가 이르기를 (결락) 학(學) (결락) 여러 차례에 걸쳐 문종(文宗)에게 유학할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나, 마침내 공식 허가(許可)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사의 구법(求法) 의지(意志)는 견고할 뿐아니라 '심분분(心憤憤) 구비비(口悱悱)'하여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의 원력(願力)은 점점 더욱 굳어져 (결락) 마침내 상선(商船)을 얻어 타고 미복(微服)으로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문종이 이 소식을 듣고 경탄(驚歎)하여 원경왕사(元景王師)에게 명(命)하되, 왕사(王師)와 대사(大師)인 혜선(慧宣)과 도린(道隣) 등을 추종(追從)토록 하였다.

자중하(自仲夏) (결락) 대각(大覺). 7월(七月) ▨일일(▨一日) 대각국사(大覺國師)를 따라 송(宋)의 경사(京師)에 이르러 철종황제(哲宗皇帝)를 배알하였는데 황제의 대우(待遇)가 매우 융숭하였다. (결락) 왕사가 국사의 뒤를 따라 화엄종(華嚴宗)의 유성법사(有誠法師)를 만나 교리(敎理)를 청해 듣고 계발(啓發)된 바가 많았다. 항주(杭州) 혜인원(惠因院)의 진수법사(晉水法師)는 처음 만난 초면이었지만, 오래전부터 친한 구면처럼 느껴져서 항상 온안(溫顔)으로 친절히 대해주었다. (결락) 원외랑(員外郞)인 양걸(楊傑)이 소문을 듣고 이르기를, "자정(子正)의 학문이 박식다문(博識多聞)하여 참으로 사람들의 스승이 될 만한 스님이다"라고 칭송하였다. (결락) 술사(述士) (결락) 근자(近者)에 다시 법계(法階)를 첨가(添加)하는 고래(誥勑)을 받았으니, 앞으로 멀지않아 마땅히 왕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병인년(丙寅年) 5월 29일 대송(大宋)으로부터 귀국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반야사 원경왕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86-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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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우족(右族): 적자(嫡子)의 계통. 고귀한 가문. 지방의 호족(豪族). 출처: 이지관, "합천 반야사 원경왕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86쪽, 주37.
  2. 이지관, "합천 반야사 원경왕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85쪽.
  3. 정병조, "낙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지관, "합천 반야사 원경왕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86쪽.
  5.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낙진",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낙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