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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건축은 553년부터 569년까지 총 1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본래는 [[진흥왕]] 때에 본궁 남쪽에 짓던 새 궁궐이었으나, 궁을 짓는 도중에 황룡이 출현하자 이를 기려 불사(佛寺)로 고쳤고 [[황룡사]]라 명명하였다. 절의 구조는 전형적인 삼국시대 가람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앙에 위치한 구층 목탑에는 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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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건축은 553년부터 569년까지 총 1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본래는 [[진흥왕]] 때에 본궁 남쪽에 짓던 새 궁궐이었으나, 궁을 짓는 도중에 황룡이 출현하자 이를 기려 불사(佛寺)로 고쳤고 황룡사라 명명하였다. 절의 구조는 전형적인 삼국시대 가람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앙에 위치한 구층 목탑에는 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Blockquote|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출처="[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126 황룡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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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및 구조===
 
===규모 및 구조===
1238년 몽고군의 침입에 절 전체가 불타 없어진 뒤 과거의 모습은 터에 남은 것들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하였다.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중심에는 [[황룡사 구층석탑|구층석탑]]이 자리잡아 있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둘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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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8년 몽고군의 침입에 절 전체가 불타 없어진 뒤 과거의 모습은 터에 남은 것들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하였다.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중심에는 [[경주 황룡사 구층석탑|구층석탑]]이 자리잡아 있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둘렀다.<br/>
금당 안에는 장륙의 [[황룡사 장육존상|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현재의 인도인 서천축(西天竺)의 [[아소카왕]]이 불상의 모형과 황금을 보내어 인연 있는 신라에서 주조가 이루어지기를 발원하였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황룡사 장육존상|장륙상]]만 하더라도 무게가 3만 5,007근에 달할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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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 안에는 장륙의 [[경주 황룡사 장육존상|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현재의 인도인 서천축(西天竺)의 [[아소카왕]]이 불상의 모형과 황금을 보내어 인연 있는 신라에서 주조가 이루어지기를 발원하였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경주 황룡사 장육존상|장륙상]]만 하더라도 무게가 3만 5,007근에 달할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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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0일 (목) 21:39 판

황룡사
(皇龍寺)
"황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황룡사
한자표기 皇龍寺
유형 사찰
시대 신라
소장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관련인물 자장
관련장소 경주 황룡사지
관련유물유적 경주 황룡사지 구층목탑,경주 황룡사지 장육존상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대표적 사찰.

설명

건축

황룡사 건축은 553년부터 569년까지 총 1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본래는 진흥왕 때에 본궁 남쪽에 짓던 새 궁궐이었으나, 궁을 짓는 도중에 황룡이 출현하자 이를 기려 불사(佛寺)로 고쳤고 황룡사라 명명하였다. 절의 구조는 전형적인 삼국시대 가람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앙에 위치한 구층 목탑에는 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Quote-left.png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황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규모 및 구조

1238년 몽고군의 침입에 절 전체가 불타 없어진 뒤 과거의 모습은 터에 남은 것들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하였다.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중심에는 구층석탑이 자리잡아 있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둘렀다.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현재의 인도인 서천축(西天竺)의 아소카왕이 불상의 모형과 황금을 보내어 인연 있는 신라에서 주조가 이루어지기를 발원하였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장륙상만 하더라도 무게가 3만 5,007근에 달할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경주 황룡사 경주 황룡사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경주 황룡사 A는 B에 위치한다
경주 황룡사 장육존상 경주 황룡사 A는 B에 위치한다
신라 진흥왕 경주 황룡사 A는 B를 건설하였다 569년
김태-황룡사의 조영 경주 황룡사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569년 신라 진흥왕경주 황룡사를 건설하였다.
574년 아소카왕삼존불상의 재료를 보냈다.
645년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이 완공되었다.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경주 황룡사가 소실되었다.
1976년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5.837947 129.232168 황룡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에 있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황룡사", 시사상식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황룡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황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