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번째 줄: 1번째 줄:
[[분류: 한글고문서_단체기사]]
+
{{단체정보
 +
|사진=한글팀_장용영_01_장용영_현판탁본.gif
 +
|사진출처=김영호, "[http://www.suwon.go.kr/sw-www/sw-child/sw-child_01/sw-child_01_06/sw-child_01_06_03.jsp;jsessionid=v3xomEx9c1UEoTXxScKCeLVsw0zsN52hNe6v1tueTr38hjlq9DkJkcGu7Jqz7GcB.WAS2_servlet_engine1 장용영은 정조의 친위부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휴먼시티 수원 어린이마당』<sup>online</sup></online></html>, 수원시.
 +
|대표명칭=장용영
 +
|한자표기=壯勇營
 +
|영문명칭=
 +
|이칭=
 +
|유형=제도
 +
|창립자=[[조선 정조|정조]]
 +
|창립시대=조선시대
 +
|창립일=1793년
 +
|변경일=
 +
|해체일=1802년
 +
|주요업무=국왕호위 친위체제
 +
|담당업무=
 +
|관련기관=
 +
|관련단체=
 +
|소재지=
 +
|웹사이트=
 +
}}
 +
 
 +
==정의==
 +
조선 후기 1793년(정조 17)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軍營).
 +
 
 +
==내용==
 +
==={{PAGENAME}}의 역할과 구성===
 +
{{PAGENAME}}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졌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화성행궁|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내영은 1월에 수원을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외사(壯勇外使)의 직을 겸하도록 함에 따라 자연히 도성의 본영을 내영이라 부르게 되었다.<ref>장필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705 장용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PAGENAME}} 내영에 대해서====
 +
내영의 지휘관인 장용영병방은 [[장용사|장용사(壯勇使)]] 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개칭되었다. 그 규모는 종래의 [[마보군|마보군(馬步軍)]] 3초(哨)에서 5사(司) 25초로 확대되어 [[도제조아문]]이 되었다. 그 아래에 [[군색|군색(軍色)]], [[향색제조|향색제조(餉色提調)]] 각 1인, 장용사 1인, 종사관 1인, [[선기별장|선기별장(善騎別將)]] 2인, [[행파총|행파총(行把摠)]] 5인, [[선기장|선기장(善騎將)]] 3인, [[초관|초관(哨官)]] 25인을 두었다. 5사는 전·후·좌·우·중사로 도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대를 포함하였다.<ref>장필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705 장용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PAGENAME}} 외영에 대해서====
 +
외영제는 [[화성행궁|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정3품의 부사에서 정2품의 유수로 승격, 장용외사와 행궁정리부(行宮整理府)의 직을 겸하게 했으며 그 아래에 판관 1인을 두었다. 이는 곧 [[조선 정조|정조]]가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장조)|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중시해 취했던 것이다. 외영의 편제는 행궁을 교대로 방비하는 입방군(入防軍) 20초와, 유사시에 동원해 성내의 군사를 돕도록 하는 인근 고을의 협수군(恊守軍) 22초로 구성되었다. 입방군은 비교적 정예군사로서 1년에 10초씩 5번(番)으로 나누어 1번에 2초씩 입방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협수군은 유병장(遊兵將)인 과천현감을 중심으로 유사시에 동·서·남·북성을 각각 분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입방군·협수군 외에 화성 별개의 수성군(守城軍)이 구성되어 있었다. 외영의 편제는 다시 1798년에 크게 개혁되어 오위법(五衛法)으로 변했다.<ref>장필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705 장용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지식관계망==
 +
===관계정보===
 +
{|class="wikitable sortable"
 +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PAGENAME}}||[[조선 정조]]||A는 B를 설립하였다||1793년
 +
|-
 +
|[[장헌세자]]||[[조선 정조]]||A는 B의 아버지다||
 +
|-
 +
|{{PAGENAME}}||[[화성행궁]]||A는  B와 관련이 있다||
 +
|}
 +
 
 +
===시간정보===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
!style="width:20%px"|시간정보!!style="width:80%px"|내용
 +
|-
 +
|1793년||{{PAGENAME}}은 [[조선 정조]]가 설립하였다
 +
|}
 +
 
 +
==시각자료==
 +
===갤러리===
 +
<gallery>
 +
파일: 한글팀_장용영_01_장용영_현판탁본.gif| 장용영 현판 탁본
 +
</gallery>
 +
 
 +
==주석==
 +
<references/>
 +
 
 +
==참고문헌==
 +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방섭, 「정조(正祖)의 장용영(壯勇營) 운영과 정치적 구상 」, 『조선시대사학보』, 53, 2010, 45-82쪽.
 +
**이왕무, 「『本營圖形』을 통한 조선후기 장용영의 모습 」, 『장서각』, 21, 2009, 5-38쪽.
 +
 
 +
===유용한 정보===
 +
*장필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705 장용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단체]]
 
[[분류:이창섭]]
 
[[분류:이창섭]]

2017년 8월 9일 (수) 18:32 판

장용영(壯勇營)
김영호, "장용영은 정조의 친위부대", 『휴먼시티 수원 어린이마당』online, 수원시.
대표명칭 장용영
한자표기 壯勇營
유형 제도
창립자 정조
창립시대 조선시대
창립일 1793년
해체일 1802년
주요업무 국왕호위 친위체제



정의

조선 후기 1793년(정조 17)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軍營).

내용

장용영의 역할과 구성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졌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내영은 1월에 수원을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외사(壯勇外使)의 직을 겸하도록 함에 따라 자연히 도성의 본영을 내영이라 부르게 되었다.[1]

장용영 내영에 대해서

내영의 지휘관인 장용영병방은 장용사(壯勇使) 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개칭되었다. 그 규모는 종래의 마보군(馬步軍) 3초(哨)에서 5사(司) 25초로 확대되어 도제조아문이 되었다. 그 아래에 군색(軍色), 향색제조(餉色提調) 각 1인, 장용사 1인, 종사관 1인, 선기별장(善騎別將) 2인, 행파총(行把摠) 5인, 선기장(善騎將) 3인, 초관(哨官) 25인을 두었다. 5사는 전·후·좌·우·중사로 도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대를 포함하였다.[2]

장용영 외영에 대해서

외영제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정3품의 부사에서 정2품의 유수로 승격, 장용외사와 행궁정리부(行宮整理府)의 직을 겸하게 했으며 그 아래에 판관 1인을 두었다. 이는 곧 정조가 자신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중시해 취했던 것이다. 외영의 편제는 행궁을 교대로 방비하는 입방군(入防軍) 20초와, 유사시에 동원해 성내의 군사를 돕도록 하는 인근 고을의 협수군(恊守軍) 22초로 구성되었다. 입방군은 비교적 정예군사로서 1년에 10초씩 5번(番)으로 나누어 1번에 2초씩 입방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협수군은 유병장(遊兵將)인 과천현감을 중심으로 유사시에 동·서·남·북성을 각각 분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입방군·협수군 외에 화성 별개의 수성군(守城軍)이 구성되어 있었다. 외영의 편제는 다시 1798년에 크게 개혁되어 오위법(五衛法)으로 변했다.[3]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장용영 조선 정조 A는 B를 설립하였다 1793년
장헌세자 조선 정조 A는 B의 아버지다
장용영 화성행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93년 장용영은 조선 정조가 설립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장필기, "장용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장필기, "장용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장필기, "장용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방섭, 「정조(正祖)의 장용영(壯勇營) 운영과 정치적 구상 」, 『조선시대사학보』, 53, 2010, 45-82쪽.
    • 이왕무, 「『本營圖形』을 통한 조선후기 장용영의 모습 」, 『장서각』, 21, 2009, 5-38쪽.

유용한 정보

  • 장필기, "장용영", 『한국민족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