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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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7일 (월) 15:09 판

홍각(弘覺)
BHST Monk1.png
대표명칭 홍각
영문명칭 Honggak
한자 弘覺
생몰년 814(헌덕왕 6)-880(헌강왕 6)
시호 홍각선사(弘覺禪師)
이관(利觀)
탑호 선감(禪鑑)
유자(有者)
성씨 김씨(金氏)
출신지 경주(慶州)
승탑비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의 비신(碑身)이 파손되어, 주인공인 홍각선사(弘覺禪師)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7세기 중엽 당시 남아있던 비편의 일부를 탁본한 것이 각각 『금석청완(金石淸玩)』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수록되었다.[1]

유년기

선사의 속성은 김씨이고, 814년[2] 당시 신라의 도읍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출가 이전에 이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였으며, 상당한 학문적 소양과 불교적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3]

Quote-left.png 선사는 정신세계가 뛰어나게 맑고 시원하며 본성의 깨달음이 비범하여, 법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나루터이자 다리였다. ...(결락)... 이름은 이관이요, 자는 유자이며, 김씨로서 서울 사람[4]이다. 묵묵히 불교를 알아서 ...(결락)... 굳건한 정절로 한결같이 머무르매 절개와 지조는 짝할 사람이 없었고, 세상에 처함에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마음을 지녔다. 편안히 ...(결락)... 두루 경서와 사서에 통하여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Quote-right.png
출처: 김복순, 「선림원지 홍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한국국학진흥원, 2014, 7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출가수행

830년 17세에 출가한 홍각선사는 해인사(海印寺)로 가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았으며, 그 후 여러 선림(禪林: 선종의 사찰)과 영악(靈嶽: 신령스러운 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영암사(靈巖寺)에서 몇 달 동안 선정(禪定)을 닦았다.[5] 홍각선사가 출가 후 해인사로 간 것은 선종(禪宗)의 고승도 출가 전에는 유학 경전을 배우고, 출가 후에는 화엄종(華嚴宗)에서 기초를 익히며, 선종으로 대성하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이다.[6]

Quote-left.png 17세에 드디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는 속세를 버리었다. ...(결락)... 해인사에 가서 여러 선지식을 찾아뵙고 그 뛰어난 것을 구하여, 참예하고 듣는 것이 ...(결락)... 물흐르듯 하였다. 뜻의 바다는 한량 없고 글의 봉우리는 매우 우뚝하였다. 노승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후생이 ...(결락)... "라고 하였다. ...(결락)... 신령스러운 산악에 노닐며 두루 선림을 찾았다. Quote-right.png
출처: 김복순, 「선림원지 홍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한국국학진흥원, 2014, 77-7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활동

당시 원감대사 현욱(圓鑑大師 玄昱, 787-868)이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혜목산(惠目山: 지금의 여주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문이 마멸되어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문맥으로 보아 홍각선사가 현욱을 찾아가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7] 또한 홍각선사가 60세 무렵인 873년 경 다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했다고 기록하여(원문: 咸通末復往於雪山億聖[8]), 873년 이전의 어느 때 홍각선사가 억성사에 머무른 적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9]

원감대사 현욱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혜목산에 머무른 시기는 840년 경부터 868년까지이므로, 홍각선사가 현욱을 찾아간 시기는 대략 850년대 혹은 860년대로 여겨지며, 홍각선사가 일찍이 억성사에 머무른 시기는 840년 전후 즉 해인사를 떠나 각지를 유람할 때쯤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8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억성사에는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주석하고 있었으므로, 홍각선사는 염거화상의 만년에 억성사에서 그로부터 법문을 들었을 것이다.[10][11] 이후 억성사로 돌아온 홍각선사는 대대적인 중창을 통해 이 절을 크게 일으켰다.[12]

Quote-left.png 원감대사 현욱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혜목산에 머물며 ...(결락)... 산비탈에 얽어 매인 것을 새로 중건하니, 한 달이 채 못 되어 완공되었다. ...(결락)...이 집집마다 가득차고 수레가 성을 기울일 정도였다. ...(결락)... 선사는 불교계의 모범으로, 모습과 풍채가 준엄하여, (그를) 보는 자는 정신이 엄숙해져 ...(결락)... 제자가 되었다. 함통(860-874) 말에 다시 설산의 억성사로 가서 ...(결락)... 금당과 누각을 이루었다. 옥과 같이 좋은 나무들이 소나무 사이에 뒤섞여 있었으니, 은둔하는 것은 ...(결락)... 거슬렸으나, ...(결락)... 때의 명성은 우뢰처럼 세상을 울렸다. Quote-right.png
출처: 김복순, 「선림원지 홍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한국국학진흥원, 2014, 78-7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홍각선사가 억성사에 주석할 당시 그의 명성이 임금에게까지 들려 그의 덕음을 흠모하던 왕의 요청에 의하여 신라 서울에 가서 대궐에서 왕에게 법문을 강설한 후 열흘을 채 머무르지 않고 되돌아오기도 하였다.[13]

Quote-left.png ...(결락)... 임금께서 명성을 듣고 그 덕을 사모하여 ...(결락)... 자나깨나 ...(결락)... 선사의 자취를 ...(결락)... 그리하여 궁궐에서 『능엄경』의 연약달다의 비유를 설하니 ...(결락)... 이에 ...(결락)... 용안 ...(결락)... 맑은 하늘을 보는 듯 하였다. 다시 열흘이 지나지 않아 하직을 고하자, 명을 내려 ...(결락)... 길에서 쓸 경비를 하사하고 ...(결락)... 또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 산에 이르기까지 호위하여 모셔다 드리게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김복순, 「선림원지 홍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한국국학진흥원, 2014, 7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입적

홍각선사는 880년 10월 아침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불법에 힘쓰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하였다.[14]

Quote-left.png 광명 원년(880: 헌강왕 6) 겨울 10월 21일 아침에 ...(결락)... "이제 법의 인연이 다 되었다. 너희는 힘써 도를 지키라"하고, 그날 자연스레 입적하니 ...(결락)... 법랍이 50이었다. 아! 살아서는 세속을 구제하더니 죽어서는 멸함을 보이는구나. 임금께서 ...(결락)... 애도하고 만 백성이 슬퍼하였으며, 인동초가 시들고 자애로운 눈발(구름)이 처절하였다 ...(결락)... 무리들이 추모하는 슬픔을 못 이기니, 제자 범룡과 사의 등이 매우 슬퍼하였다 ...(결락)... 임금은 측은히 여겨 중관을 명하여 다투어 새기도록 하였다. 이듬해에 ...(결락)... 시호를 내려 홍각선사라 하고 탑호를 선감지탑이라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김복순, 「선림원지 홍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한국국학진흥원, 2014, 7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홍각 A는 B를 위한 비이다 886년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양양 선림원지 A는 B에 있다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김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왕희지체 A는 B로 쓰여졌다
홍각 합천 해인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홍각 억성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홍각 억성사 A는 B를 중건하였다
현욱 홍각 A는 B의 스승이다
염거 홍각 A는 B의 스승이다

시각자료

갤러리

타임라인

주석

  1.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정사지의 추정」, 『사학연구』 55, 56, 한국사학회, 1998, 78쪽.
  2. 남아있는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선사는 17세에 출가하였으며 880년에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법랍 50세와 17세 출가를 합하면 세수 67세가 되고, 여기서 다시 입적연대가 880년인 것을 고려하면 814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권기종, 「홍각선사비문을 통해 본 선림원」, 『강좌미술사』 Vol.18,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2, 9쪽.
  3. 권기종, 「홍각선사비문을 통해 본 선림원」, 『강좌미술사』 Vol.18,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2, 6쪽.
  4. 京都人. 신라의 왕경인을 말함. 김복순, 「선림원지 홍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한국국학진흥원, 2014, 71-8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5.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정사지의 추정」, 『사학연구』 55, 56, 한국사학회, 1998, 81쪽.
  6. 허흥식, "사림원홍각선사비문(沙林院弘覺禪師碑文)",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576쪽. 권기종, 「홍각선사비문을 통해 본 선림원」, 『강좌미술사』 Vol.18,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2, 10쪽에서 재인용.
  7. 권기종, 「홍각선사비문을 통해 본 선림원」, 『강좌미술사』 Vol.18,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2, 9-10쪽.
  8.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선림원지홍각선사비(禪林院址弘覺禪師碑)",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9.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정사지의 추정」, 『사학연구』 55, 56, 한국사학회, 1998, 85-86쪽.
  10.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정사지의 추정」, 『사학연구』 55, 56, 한국사학회, 1998, 85-86쪽.
  11. 권기종, 「홍각선사비문을 통해 본 선림원」, 『강좌미술사』 Vol.18,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2, 10쪽.
  12.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정사지의 추정」, 『사학연구』 55, 56, 한국사학회, 1998, 81쪽.
  13.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정사지의 추정」, 『사학연구』 55, 56, 한국사학회, 1998, 82쪽.
  14.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정사지의 추정」, 『사학연구』 55, 56, 한국사학회, 1998, 82쪽.

참고문헌

  • 권기종, 「홍각선사비문을 통해 본 선림원」, 『강좌미술사』 Vol.18,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2, 5-16쪽.
  •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정사지의 추정」, 『사학연구』 55, 56, 한국사학회, 1998, 75-88쪽.
  • 김복순, 「선림원지 홍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한국국학진흥원, 2014, 71-8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2: 신라8 비문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김선근, "홍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림원지홍각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