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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8) 2월에 최치원이 [[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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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8) 2월에 최치원이 [[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정책이다.<ref>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ref>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전후의 사정을 고려해볼 때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다만, 귀족개념에는 진골 독점의 귀족개념이 아니라 6두품과 여타의 대호족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신분의 귀족개념이었을 것이다. 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최치원의 이같은 시무책은 통일신라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骨品制社會)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보고자 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ref>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ref>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전후의 사정을 고려해볼 때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다만, 귀족개념에는 진골 독점의 귀족개념이 아니라 6두품과 여타의 대호족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신분의 귀족개념이었을 것이다. 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최치원의 이같은 시무책은 통일신라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骨品制社會)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보고자 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ref>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은 이 시무책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아찬(阿飡)]]으로 올렸다. 그러나 이때의 신라사회는 이 시무책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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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은 이 시무책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아찬(阿飡)]]으로 올렸다. 그러나 이때의 신라사회는 이 시무책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다.<ref>정중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357 시무십여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7월 27일 (목) 15:53 판

최치원(崔致遠)
대표명칭 최치원
한자표기 崔致遠
생몰년 857년-미상
본관 경주(慶州)
고운(孤雲), 해운(海雲)
출생지 경주(慶州)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
시대 통일신라
대표저서 계원필경(桂苑筆耕), 사산비명(四山碑銘)
대표직함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최견일(崔肩逸)



정의

신라 하대의 학자이자 문장가.

내용

개요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1]

업적

당나라를 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는데,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阿飡)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2]

868년 당나라로 건너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으며,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3]

토황소격문을 짓다

최치원이 과거에 합격한 2년이 지난 무렵에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4]

'토황소격문'은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5]

사산비명을 짓다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최치원이 지은 비문 가운데 신라의 불교사를 비롯하여 한문학사·사상사 등 여러 면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은 네 편을 뽑아 엮은 책이다. [6]

네 편의 비문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聖住寺) 터에 있는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雙磎寺) 경내에 있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碑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鳳巖寺) 경내에 있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을 가리키며, 위의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7]

네 비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찬술되었다.[8]

시무십여조

894년(진성여왕 8) 2월에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정책이다.[9]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10] 최치원의 이같은 시무책은 통일신라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骨品制社會)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보고자 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11]

진성여왕은 이 시무책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阿飡)으로 올렸다. 그러나 이때의 신라사회는 이 시무책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다.[12]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견일 최치원 A는 B의 어버이이다
최치원 사산비명 A는 B와 관련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68년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874년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최치원", 『두산백과』online.
  2.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3.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4.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5. "토황소격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최병헌,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최병헌,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최병헌,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전후의 사정을 고려해볼 때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다만, 귀족개념에는 진골 독점의 귀족개념이 아니라 6두품과 여타의 대호족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신분의 귀족개념이었을 것이다.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정중환, "시무십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최치원", 『두산백과』online.
  • 윤희진, "최치원",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발행일: 2010년 3월 22일.
  • 최병헌,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