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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 원(元)나라 순제(順帝)가 제위에 오르기 이전에 황해의 대청도(大靑島)에 귀양 오게 되어 이곳을 지날 때에 풀 속에 한 부처가 있음을 보고, 그 부처에게 속히 귀국하여 왕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던 바, 그 후 귀국하여 왕이 되자 많은 재물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ref>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주, 『북한의 전통사찰』, 양사재, 2011.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92532&cid=50763&categoryId=50782 신광사터]", 북한의 전통사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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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가 제위에 오르기 이전에 황해의 대청도(大靑島)에 귀양 오게 되어 이곳을 지날 때에 풀 속에 한 부처가 있음을 보고, 그 부처에게 속히 귀국하여 왕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던 바, 그 후 귀국하여 왕이 되자 많은 재물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ref>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주, 『북한의 전통사찰』, 양사재, 2011.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92532&cid=50763&categoryId=50782 신광사터]", 북한의 전통사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1720년([[조선 숙종|숙종]] 46) 건립된 「신광사사적비(神光寺事跡碑)」에 의하면 1333년([[고려 충숙왕|충숙왕]] 2)부터 1341년([[고려 충혜왕|충혜왕]] 복위 2)까지 중창 공사가 있었다고 하며 당시의 전각들은 웅장하고 화려하였다고 한다. 이 때 원나라의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하였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 이수산(李壽山)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하였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674 신광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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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원(元)나라의 태자가 죄를 지어 옹현(瓮縣, 경기도 옹진군)의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되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수양산의 숭봉(崇峰) 아래에 있는데 홀연히 너를 위해 한번 찾아준 것이다." 하였다. 깨어나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냈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신인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반드시 네 스스로 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직접 산 아래에 가서 숲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암자가 있고 약사(藥師)라 칭하는 부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꿈에 나타난 것인가 하고 생각하여 곧 절하며 "저를 본국에 돌려보내주시면 꼭 큰 절을 지어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얼마 안 있어 태자가 본국에 돌아가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순제(順帝, 1333~1367년)이다. 신이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전에 한 말을 어찌 있었느냐? 어찌 이리 오래도록 적적한가? " 하였다. 순제가 놀라 깨어 곧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 등을 보내 공장을 시켜 중국의 재료를 가져다가 도량을 짓도록 하였다. 고려 왕이 또한 시중(侍中) 김석견(金石堅)과 한림(翰林) 이수산(李壽山) 등에 명하여 국력으로 돕도록 하여 거찰을 창건하니 곧 원통(元統) 원년(고려 충숙왕 복위 2, 1333년)이었고 지정(至正) 신사년(고려 충혜왕 복위 2, 1341년)에 이르러 일이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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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정병삼,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833 신광사사적비(神光寺事跡碑)]",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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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조선 숙종|숙종]] 46) 건립된 「신광사사적비(神光寺事跡碑)」에 의하면 1333년([[고려 충숙왕|충숙왕]] 2)부터 1341년([[고려 충혜왕|충혜왕]] 복위 2)까지 중창 공사가 있었다고 하며 당시의 전각들은 웅장하고 화려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신광사의 승려가 1,000여명에 이른다고 하고 있어 대찰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신광사사적비」에는 1677년([[조선 숙종|숙종]] 3) 절에 화재가 일어나 전각 요사채 천여가구가 전소하였다고 하였으며 다음 해인 1678년([[조선 숙종|숙종]] 4) 보광전(普光殿)을 중건하고 설법전(說法殿)·약사전(藥師殿)·시왕전(十王殿)·만세루(萬歲樓)·요사 등을 세웠다고 하였다.<ref>"[http://portal.nrich.go.kr/kor/originalUsrView.do?menuIdx=66&info_idx=918&bunya_cd=412 1998_북한문화재해설집2(사찰건축편)_북한.pdf]", 원문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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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신광사의 승려가 1,000여명에 이른다고 하고 있어 대찰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신광사사적비」에는 1677년([[조선 숙종|숙종]] 3) 절에 화재가 일어나 전각 요사채 천여가구가 전소하였다고 하였으며 다음 해인 1678년([[조선 숙종|숙종]] 4) 보광전(普光殿)을 중건하고 설법전(說法殿)·약사전(藥師殿)·시왕전(十王殿)·만세루(萬歲樓)·요사 등을 세웠다고 하였다.<ref>"[http://portal.nrich.go.kr/kor/originalUsrView.do?menuIdx=66&info_idx=918&bunya_cd=412 1998_북한문화재해설집2(사찰건축편)_북한.pdf]", 원문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현재는 폐사되었으며, 문화재로는 1324년([[고려 충숙왕|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674 신광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현재는 폐사되었으며, 문화재로는 1324년([[고려 충숙왕|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674 신광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2017년 7월 26일 (수) 14:43 판

해주 신광사
(海州 神光寺)
대표명칭 해주 신광사
한자 海州 神光寺
건립시기 신라 문무왕(661~681) 때
경내문화재 신광사오층탑, 신광사무자비



정의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에 있었던 절.

내용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에 따르면, 923년(태조 6) 입조사(入朝使)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창건연대 또한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1]

Quote-left.png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원홍(元弘)이 부처님 어금니와지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이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923), (곧) 본조 태조(太祖) 즉위 6년 양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尹質)이 가져 온 5백나한상(五百羅漢像: 석가의 제자로서 공양을 받을 자격을 지닌 5백 명의 고명한 제자)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 있다. Quote-right.png
출처: "진당대 원홍이 가져온 불아와 윤질이 가져온 5백나한상은 신광사에 있다",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고려 말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가 제위에 오르기 이전에 황해의 대청도(大靑島)에 귀양 오게 되어 이곳을 지날 때에 풀 속에 한 부처가 있음을 보고, 그 부처에게 속히 귀국하여 왕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던 바, 그 후 귀국하여 왕이 되자 많은 재물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2] 1720년(숙종 46) 건립된 「신광사사적비(神光寺事跡碑)」에 의하면 1333년(충숙왕 2)부터 1341년(충혜왕 복위 2)까지 중창 공사가 있었다고 하며 당시의 전각들은 웅장하고 화려하였다고 한다. 이 때 원나라의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하였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 이수산(李壽山)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하였다.[3]

Quote-left.png 옛날에 원(元)나라의 태자가 죄를 지어 옹현(瓮縣, 경기도 옹진군)의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되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수양산의 숭봉(崇峰) 아래에 있는데 홀연히 너를 위해 한번 찾아준 것이다." 하였다. 깨어나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냈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신인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반드시 네 스스로 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직접 산 아래에 가서 숲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암자가 있고 약사(藥師)라 칭하는 부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꿈에 나타난 것인가 하고 생각하여 곧 절하며 "저를 본국에 돌려보내주시면 꼭 큰 절을 지어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얼마 안 있어 태자가 본국에 돌아가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순제(順帝, 1333~1367년)이다. 신이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전에 한 말을 어찌 있었느냐? 어찌 이리 오래도록 적적한가? " 하였다. 순제가 놀라 깨어 곧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 등을 보내 공장을 시켜 중국의 재료를 가져다가 도량을 짓도록 하였다. 고려 왕이 또한 시중(侍中) 김석견(金石堅)과 한림(翰林) 이수산(李壽山) 등에 명하여 국력으로 돕도록 하여 거찰을 창건하니 곧 원통(元統) 원년(고려 충숙왕 복위 2, 1333년)이었고 지정(至正) 신사년(고려 충혜왕 복위 2, 1341년)에 이르러 일이 모두 끝났다. Quote-right.png
출처: 정병삼, "신광사사적비(神光寺事跡碑)",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신광사의 승려가 1,000여명에 이른다고 하고 있어 대찰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신광사사적비」에는 1677년(숙종 3) 절에 화재가 일어나 전각 요사채 천여가구가 전소하였다고 하였으며 다음 해인 1678년(숙종 4) 보광전(普光殿)을 중건하고 설법전(說法殿)·약사전(藥師殿)·시왕전(十王殿)·만세루(萬歲樓)·요사 등을 세웠다고 하였다.[4] 현재는 폐사되었으며, 문화재로는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5]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주석

  1.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주, 『북한의 전통사찰』, 양사재, 2011. 온라인 참조: "신광사터", 북한의 전통사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1998_북한문화재해설집2(사찰건축편)_북한.pdf", 원문정보,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5.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