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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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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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으로,<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572  식영정 [息影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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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1661년(현종 2)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정온(鄭蘊)·이언적(李彦迪)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678 도산서원(道山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992&cid=40942&categoryId=33383 식영정 [息影亭],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ref>
 
  
 
==내용==
 
==내용==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서하당유고]]》 행장에 따르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992&cid=40942&categoryId=33383  식영정 [息影亭],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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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2년 ‘道山(도산)’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매년 3월 중정(中丁: 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왔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는 서원터만 남아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5678 도산서원(道山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외에 정철은 식영정잡영 10수,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차환벽당운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 등을 남겼다. 그는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였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가운데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이하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圓柱]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992&cid=40942&categoryId=33383 식영정 [息影亭],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ref>
 
 
 
식영정 옆에는 1973년에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芙蓉堂)을 건립하고, 입구에 《[[성산별곡]]》 시비를 세웠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 속에 잠겨버렸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992&cid=40942&categoryId=33383  식영정 [息影亭],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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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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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향지』(거창군,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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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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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고대방(典故大方), 강효석, 발행지미상,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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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학지(太學志), 민종현, 성균관, 태학지 번역사업회, 서울: 成均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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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향지(居昌鄕誌), 거창군 문화공보실, 거창군,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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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권혁명,「16세기 息影亭 詩壇의 詩世界 硏究 : 林億齡, 梁應鼎, 金成遠, 鄭澈을 중심으로」, 학위논문 (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국어국문학과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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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환,「도산서원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석사)-- 경일대학교 대학원 : 건축공학과 건축계획(한국전통건축) 2016. 8
*황민선,「누정연작제영 <息影亭 20詠>연구」, 학위논문(석사)-- 전남대학교 대학원 : 국어국문학과 2006. 8
+
*박은희,「도산구곡의 문화경관 해석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 환경자원학과 조경학 2014. 8
*박연호, 「식영정 원림의 공간 특성과 <성산별곡>」 , 韓國文學論叢, Vol.40 No.- [2005], 33-58(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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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해 , 「도산서당(陶山書堂)의 전통(傳統) 입지환경(立地環境)」,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1 No.- [2012],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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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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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유물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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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월) 13:25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