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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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5070000,36&flag=Y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1969년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5070000,36&flag=Y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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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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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따르면 [[형미|선각대사]]는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으며, [[가지산문|가지산문(迦智山門)]]의 [[체징|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2-324쪽.</ref> [[체징]]이 입적한 후에는 891년 당(唐)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905년에 귀국하였고, 912년까지 8년간 월출산 [[강진 무위사|무위사(無爲寺)]]에 주석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5-327쪽.</ref> 이 시기에 [[형미|선각대사]]는 전라도 남부지역을 공략하러 온 [[궁예(弓裔)]]와 [[고려 태조|왕건(王建)]]을 만나게 되고, 이들을 따라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궁예]]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궁예]]가 실각한 후 [[고려 태조|왕건]]이 즉위하여 형미를 위해 탑과 사찰을 건립해주고 선각대사(先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려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ref>
  
---------금석문 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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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대사비에 나타난 궁예의 행적===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써서 김문윤(金文允)과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29년 후인 946년(정종 원년)에 세웠다. 귀부와 비신, 이수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비로서 사실적인 조각 기법을 보여주는데 비문은 풍화로 마멸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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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대사비는 다른 자료에 보이지 않는 [[궁예]]의 행적을 전하는 자료로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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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秦韓]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해안에 이르렀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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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
건립은 고려 정종 원년(946)으로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두산백과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민백
 
918년 속년(俗年) 54세, 승랍(僧臘) 35세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편광탑(遍光塔)’이라고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 년만인 946년(정종 1)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해서로 썼다.
 
 
 
---------한국금석문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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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형미를 태봉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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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8쪽.</ref>
  
===비문===
 
---------금석문 종합정보시스템
 
비문의 내용은 선각대사가 탄생하여 가지산문의 체징(體澄)에게 출가하고 당(唐)에 유학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고 귀국하여 무주의 세력가 요청으로 무위사에 머물다 왕건을 만나 왕건의 요청에 따라 함께 태봉의 서울인 철원에 가서 궁예에게 간언하다 죽음을 당하는 생애와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여 오관산의 산사를 수리하고 탑을 조성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2년 후 시호를 내린 사정을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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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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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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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10-333쪽.
*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34쪽. 온라인 참조: "[http://viewer.dbpia.co.kr/viewer.do?page=1&systemCode=&documentId=10000&serviceName=krpia 한국금석문집성 19]",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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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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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34쪽. 온라인 참조: "[http://viewer.dbpia.co.kr/viewer.do?page=1&systemCode=&documentId=10000&serviceName=krpia 한국금석문집성 19]",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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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6일 (금) 17:29 판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BHST Muwisa Seongak stele.jpg
대표명칭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영문명칭 Stele for Buddhist Monk Seongak at Muwisa Temple, Gangjin
한자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이칭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주소 전남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로 308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507호
문화재 지정일 1969년 6월 16일
찬자 최언위(崔彦撝)
서자 유훈율(柳勳律)
각자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서체 해서(楷書)
승려 형미(逈微)
건립연대 946년



정의

전라남도 강진군 무위사(無爲寺)에 있는 신라시대의 승려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 864-917)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선각대사 형미탑비로 정식 명칭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령탑비(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이다.[1] 높이 약 2.35m, 너비 1.12m로 [2]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진 고려 초의 전형적인 비석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귀부이수 등의 사실적인 조각은 당대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3]

고려 초의 대표적 문장가로 여러 고승들의 탑비를 지은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지었으며, 유훈율(柳勳律)이 당시에 유행하던 구양순체(歐陽詢體)해서(楷書)로 글씨를 썼다. 비석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여 현재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비석 하단의 일부는 마멸되어 판독되지 않고 있다.[4]

1969년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었다.[5]

비문

비문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으며, 가지산문(迦智山門)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6] 체징이 입적한 후에는 891년 당(唐)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905년에 귀국하였고, 912년까지 8년간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에 주석하였다.[7] 이 시기에 선각대사는 전라도 남부지역을 공략하러 온 궁예(弓裔)왕건(王建)을 만나게 되고, 이들을 따라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궁예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궁예가 실각한 후 왕건이 즉위하여 형미를 위해 탑과 사찰을 건립해주고 선각대사(先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려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8]

선각대사비에 나타난 궁예의 행적

선각대사비는 다른 자료에 보이지 않는 궁예의 행적을 전하는 자료로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9]

Quote-left.png 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秦韓]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해안에 이르렀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


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형미를 태봉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0]


[11]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형미 A는 B를 위한 비이다 946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강진 무위사 A는 B에 있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유훈율 A는 B가 비문을 썼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김문윤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최환규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고려 태조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2.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4.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5.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6.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2-324쪽.
  7.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25-327쪽.
  8.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9.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4쪽.
  10.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1.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8쪽.

참고문헌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10-333쪽.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3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