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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2월 평북 정주군(定州郡)에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 | 1907년 12월 평북 정주군(定州郡)에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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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 |
+ |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 ||
− | + | @@@@@@1911년 9월 [[105인 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감옥생활을 하였고,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 |
+ |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 ||
− | + |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하게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 |
− | + |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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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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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에 안장되었다. | ||
+ |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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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 ||
+ |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 ||
+ |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 ||
− | + |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 민족대표 33인 (독립운동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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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오산학교 교장, 민족대표33인 기독교대표, 동아일보사 사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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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민족기록화_작품_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_오산학교.jpg|<ref>"[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200056465&dsid=000000000009&gubun=search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9]",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ref> | + | 파일:민족기록화_작품_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_오산학교.jpg| 작품과 비슷한 구도의 오산학교<ref>"[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200056465&dsid=000000000009&gubun=search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9]",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ref> |
파일:민족기록화 작품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스케치1.jpg|<ref>"[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200056465&dsid=000000000009&gubun=search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9]",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ref> | 파일:민족기록화 작품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스케치1.jpg|<ref>"[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200056465&dsid=000000000009&gubun=search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9]",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sup>online</sup></online></html>,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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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 =='''관련항목'''== |
2017년 6월 1일 (목) 02:34 판
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 |
작가 | 박각순 |
---|---|
제작연도 | 1976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계몽/항일 |
분류 | 유화 |
소장처 | 독립기념관 |
정의
해당 작품은 1930년 5월 8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이승훈이 자신이 개교한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훈화를 하는 장면을 담고있다. 이튼날 5월 9일 오전 4시, 67세의 나이로 이승훈은 병사하였다.
설명
작품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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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은 1904년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의 헌신뿐 아니라, 이종성, 이광수, 조만식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1907년 12월 평북 정주군(定州郡)에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
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1911년 9월 105인 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감옥생활을 하였고,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하게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에 안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 민족대표 33인 (독립운동가)
작품 배경
오산학교 교장, 민족대표33인 기독교대표, 동아일보사 사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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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민족기록화
1894년 오승윤-동학교주 전봉준
1898년 최대섭-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
1905년 11월 30일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1906년 5월 장리석-홍주성수복
1906년 정창섭-태백산전투
1906년 11월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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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박영선-이등박문을 총살하는 안중근의사
1910년 장리석-민족을 계몽하고 있는 안창호선생
1919년 3월 1일 최대섭-민족대표의 독립선언
1919년 3월 1일 문학진-파고다공원의 3.1독립만세시위
1920년 손수광-청산리싸움
1920년 임직순-홍범도장군의 봉오동전투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박각순 |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 A는 B를 그렸다 | 1976년 |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 이승훈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 [[ ]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 오산학교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
독립기념관 |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 A는 B를 소장하고 있다 | |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 A는 B를 대여하였다 | 1991년 1월 15일-1992년 1월 14일 |
1907 오산학교 건립, 신민회 가입 1911 105인사건으로 옥고 1919 민족대표33인중 기독교측 대표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76년 | 박각순이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를 그렸다. |
1991년 1월 15일-1992년 1월 14일 |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이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을 대여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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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861847 | 127.2242915 | 독립기념관이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을 소장하고 있다 |
37.392958 | 127.158241 |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이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을 대여하였다 |
그래프
참고문헌
주석
- ↑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9",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 - ↑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9",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 - ↑ "최규하국무총리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전람회관람3",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