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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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네번째 아들(후일의 [[징엄|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은 [[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은 법주사의 주지가 되었다.<ref>민백, 학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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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네번째 아들이자 [[의천]]의 제자인 [[징엄|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은 [[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은 법주사의 주지가 되었다.<ref>민백, 학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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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8일 (목) 21:01 판

학일(學一)
BHST Monk1.png
대표명칭 학일
한자 學一
생몰년 1052년(문종 6)-1144년(인종 22)
시호 원응(圓應)
봉거(逢渠)
성씨 이씨(李氏)
속명 학일(學一)
출신지 충청북도 서원(西原)
승탑비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학일은 1052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지방인 서원(西原)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아버지는 이응첨(李應瞻)으로 관직에 진출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이씨(李氏)였으며,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학일은 어려서부터 매운 채소와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Quote-left.png 국사의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이 학일(), 자가 봉거이며 서원 보안 출신이다. 아버지 응첨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 이씨가 어느 날 밤에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태어날 때에 …(결락)…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국사는 젖먹이 때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 젖을 먹지 않았고, 나이 겨우 8살 때에 매운 채소와 고기를 먹지 않았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금석문집성24, 조명제, 한국국학진흥원, 15쪽.


출가수행

학일은 1062년 11세에 출가하여 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고, 1064년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선지(禪旨)에 통달하였고, 경률론(經律論)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하여 반야(般若)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질병까지 고쳐주었으므로 크게 존경을 받았다.[1] 1084년에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Quote-left.png 11세에 진장 선사에게 의탁하여 출가하였고, 13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에 향수사의 혜함 선사를 찾아뵈었다. 어느 날 혜함이 "어떤 승려가 장경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배우는 이가 출신할 길입니까?"라고 하니, 장경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할 길이다'라고 하였다"라는 고칙을 들어 보이니, 국사가 이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윽고 …(결락) … 선지에 밝았고, 또 경·율·론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반야경』에 더욱 뛰어나 삼매력을 얻어 모든 사람의 질병을 귀하고 천한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모두 구제하였는데, 행하면 번번히 호혐이 있었다. 종도들이 태산북두와 같이 추앙하였다.

우리 선종 2년이며 송 신종 원풍 7년 갑자에 광명사 선불장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금석문집성, 15-16쪽.


활동

1086년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자, 선종(禪宗)의 승려들 가운데 10명 중 6~7명은 천태종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학일의천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종의 승려로 남았다. 특히 1098년에 의천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法會)를 개최하여 학일을 법회의 부강(副講)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학일은 이를 사양하고 단지 청강하였다.

Quote-left.png 대각국사가 송에 유학하여 화엄의를 전수받고, ~~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끝내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략… 우리 숙종 4년이며, 송 소성 5년 무인에 대각국사가 홍원사에서 원각경 법회를 열고 국사를 부강으로 삼았으나, 국사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선과 강이 서로 함부로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다만 참석하여 … (결락) … 청강할 뿐이었다. Quote-right.png
출처: 한국금석문집성24, 16쪽.


숙종의 네번째 아들이자 의천의 제자인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은 법주사의 주지가 되었다.[2]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학일"
  2. 민백, 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