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2번째 줄: 12번째 줄:
 
}}
 
}}
 
=='''정의'''==
 
=='''정의'''==
 +
해당 작품은 1930년 5월 8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이승훈]]이 자신이 개교한 [[오산학교|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훈화를 하는 장면을 담고있다. 이튼날 5월 9일 오전 4시, 67세의 나이로 [[이승훈]]은 병사하였다.
  
 
+
=='''설명'''==
 +
===작품 소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343&cid=59011&categoryId=5901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343&cid=59011&categoryId=5901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560&cid=46623&categoryId=4662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560&cid=46623&categoryId=46623
=='''설명'''==
 
===작품 소재===
 
이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그의 열성과 성의을 바탕으로 이종성(李鍾聲)·이광수(李光洙)·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교육사업에 헌신하면서 민족운동에 가담하던 중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임치정(林蚩正) 등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출옥 즉시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에 안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어 같은 해 12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 된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다.
+
 
 +
[[이승훈]]은 1904년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이승훈]]의 헌신뿐 아니라, 그는 교육사업에 헌신하면서 [[오산학교]]는 [[이종성]], [[이광수]], [[조만식]]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
 
 +
1907년 12월 평북 정주군(定州郡)에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8236&cid=40942&categoryId=34666
 +
민족운동에 가담하던
 +
 
 +
 
 +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
 
 +
일제에게 나라를 강점 당한 직후부터 선생은 5년여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1910년 말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선생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에 의한 민족운동자 탄압의 출발점이었다.
 +
 
 +
 
 +
 
 +
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출옥 즉시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
 
 +
 
 +
 
 +
1911년 9월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민족운동자들을 대거 체포한 ‘신민회사건’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흔히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을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다. 감옥생활은 선생의 민족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52세의 만학도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게 되었다.
 +
 
 +
 
 
한말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의 구국계몽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전에도 선생은 기독교 설교를 들은 일이 있었지만, 그에 입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답답한 심정으로 평양으로 나갔다가 한석진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 들으러 갔다. 선생은 그 날부터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했고, 돌아와서 오산학교 교육도 기독교 정신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한말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의 구국계몽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전에도 선생은 기독교 설교를 들은 일이 있었지만, 그에 입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답답한 심정으로 평양으로 나갔다가 한석진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 들으러 갔다. 선생은 그 날부터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했고, 돌아와서 오산학교 교육도 기독교 정신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일제에게 나라를 강점 당한 직후부터 선생은 5년여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1910년 말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선생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에 의한 민족운동자 탄압의 출발점이었다. 1911년 9월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민족운동자들을 대거 체포한 ‘신민회사건’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흔히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을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다. 감옥생활은 선생의 민족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52세의 만학도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 민족대표 33인 (독립운동가)
 
  
이후 선생은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다. 그러면서 물산 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나아가 <동아일보>가 1924년 1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게재와 4월 박춘금 사건으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를 맡아 ‘민족지’의 경영 정상화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다.
 
  
교단에 선 선생을 그린 기록화
+
 
 +
 
 +
 
 +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하게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하게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
 
 +
 
 +
 
 +
 
 +
 
 +
 
 +
 
 +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
 
 +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에 안장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이후 선생은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다. 그러면서 물산 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나아가 <동아일보>가 1924년 1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게재와 4월 박춘금 사건으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를 맡아 ‘민족지’의 경영 정상화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 민족대표 33인 (독립운동가)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 민족대표 33인 (독립운동가)
 
===작품 배경===
 
===작품 배경===

2017년 5월 11일 (목) 13:48 판


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박각순-오산학교(이승훈)-1976s.jpg
작가 박각순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계몽/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독립기념관


정의

해당 작품은 1930년 5월 8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이승훈이 자신이 개교한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훈화를 하는 장면을 담고있다. 이튼날 5월 9일 오전 4시, 67세의 나이로 이승훈은 병사하였다.

설명

작품 소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343&cid=59011&categoryId=5901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560&cid=46623&categoryId=46623


이승훈은 1904년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이승훈의 헌신뿐 아니라, 그는 교육사업에 헌신하면서 오산학교이종성, 이광수, 조만식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1907년 12월 평북 정주군(定州郡)에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8236&cid=40942&categoryId=34666 민족운동에 가담하던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강점 당한 직후부터 선생은 5년여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1910년 말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선생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에 의한 민족운동자 탄압의 출발점이었다.


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출옥 즉시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9월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민족운동자들을 대거 체포한 ‘신민회사건’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흔히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을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다. 감옥생활은 선생의 민족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52세의 만학도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게 되었다.


한말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의 구국계몽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전에도 선생은 기독교 설교를 들은 일이 있었지만, 그에 입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답답한 심정으로 평양으로 나갔다가 한석진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 들으러 갔다. 선생은 그 날부터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했고, 돌아와서 오산학교 교육도 기독교 정신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하게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에 안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후 선생은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다. 그러면서 물산 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나아가 <동아일보>가 1924년 1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게재와 4월 박춘금 사건으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를 맡아 ‘민족지’의 경영 정상화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훈 [李昇薰] - 민족대표 33인 (독립운동가)

작품 배경

오산학교 교장, 민족대표33인 기독교대표, 동아일보사 사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시각적 안내

손병희한용운백용성박각순 「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1976
이 그림에 대한 정보

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박각순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A는 B를 그렸다 1976년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이승훈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오산학교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독립기념관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A는 B를 소장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A는 B를 대여하였다 1991년 1월 15일-1992년 1월 14일

1907 오산학교 건립, 신민회 가입 1911 105인사건으로 옥고 1919 민족대표33인중 기독교측 대표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6년 박각순이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를 그렸다.
1991년 1월 15일-1992년 1월 14일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이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을 대여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7861847 127.2242915 독립기념관이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을 소장하고 있다
37.392958 127.158241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이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을 대여하였다

그래프

참고문헌

주석

  1.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9",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
  2.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9",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
  3. "최규하국무총리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전람회관람3",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