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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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작품 보고 지부복궐상소 같이 넣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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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소재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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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전라도 태인현에서 항일 의병을 일으켰을 때 최익현은 이미 74세였고, 그 생애의 마지막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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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의 의병은 첫 항일 전투에서 열악한 무기와 미비한 전투력 탓에 패배를 했고, 전투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한국주차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가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위술영 경비대에 이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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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최고령 의병장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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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6월 13일 조정으로부터 궁내부특진관에서 해임되었다. 6월 14일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유종규,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 나기덕(羅基德), 이용길, 유해용(柳海瑢) 등 13인의 의사들은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항전은 종말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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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다시 경성부로 압송되어 경성 주재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병장들은 여기서 그들의 심문과 회유를 받는 동안에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음모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2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월 하순 일본의 쓰시마 섬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그곳에는 홍주의병진의 유준근(柳濬根), 이식(李식) 등 의병 9인이 이미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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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은 일본 정부 측의 갖은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최익현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임병찬에게《유소(遺疏)》를 구술, 다음과 같은 여한(餘恨)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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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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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1907년 1월 1일 쓰시마 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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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경상남도 동래부 초량(草梁)에 닿았다.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앞세운 그의 영구(靈柩)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구포, 성주, 황간, 공주 등지를 거쳐 1월 20일 청양의 본가에 도착,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1907년 논산군 상월면의 국도변에 안장했다가 뒤에 예산군 관음리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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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D%B5%ED%9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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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이미 소장(疏狀)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 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남원 진입을 꾀했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측 진위대(鎭衛隊)임이 확인되었다. 진위대 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 차례나 보내왔다. 선생은 괴로워했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하였다. 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뿐이었다. 4월 23일(양력 6월 14일), 선생 등 의병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단식끝에 한 많은 적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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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1월 20일(양력 1월 4일) 일본 대마도 수선사(修善寺)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이틀 후에 부산 초량에 닿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시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맞이하였으며 영구(靈柩)를 붙들고 통곡했다. 상여가 마련되어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하는 곳에 따라 노제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하였다. 영구는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 만에 정산에 도착하여 그 해 4월(양력 5월) 노성 무동산에 안장되었다. 위대한 유학의 거봉(巨峰)이요 항일의 선봉이 되어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된 선생의 충혼은 영원히 불멸의 빛이 되어 오늘에 사는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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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최익현 [崔益鉉] - 74세 나이로 의병 봉기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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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65&cid=59011&categoryId=5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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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의 의병은 첫 항일 전투에서 열악한 무기와 미비한 전투력 탓에 패배를 했고, 전투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한국주차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가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위술영 경비대에 이감되었다. 그리고 ‘왜놈 땅에서 난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을 하다가 대마도로 이송된 지 넉 달 만인 11월 17일에 그곳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러나 그의 항일 의병 운동은 일제하에 되살아나 독립 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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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은 선비의 마지막 선택인 무력 항쟁으로 애국을 실천했고, 망국의 고통을 구국 항쟁으로 승화하였다. 타협과 굴절을 외면하고 행동하는 지성으로 투쟁함으로써 조선 선비의 전형을 보여 준 최익현의 치열한 생애는 현실론이 판을 치는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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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청양의 모덕사(慕德詞)에 제향되고 포천ㆍ해주ㆍ고창ㆍ곡성ㆍ화순ㆍ무안ㆍ함평ㆍ광산ㆍ구례ㆍ등지에서 봉향되어 그의 높은 지조와 절의를 기리고 있으며, 그를 기리는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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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최고령 의병장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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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9일 (화) 01:10 판


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이의주-최익현유해환국(최익현)-1976s.jpg
작가 이의주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계몽/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미상


정의

해당 작품은


설명

작품 소재

작품의 소재 최익현


1906년 전라도 태인현에서 항일 의병을 일으켰을 때 최익현은 이미 74세였고, 그 생애의 마지막 해였다.

최익현의 의병은 첫 항일 전투에서 열악한 무기와 미비한 전투력 탓에 패배를 했고, 전투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한국주차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가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위술영 경비대에 이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고령 의병장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1906년 6월 13일 조정으로부터 궁내부특진관에서 해임되었다. 6월 14일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유종규,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 나기덕(羅基德), 이용길, 유해용(柳海瑢) 등 13인의 의사들은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항전은 종말을 고하였다. 6월 말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다시 경성부로 압송되어 경성 주재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병장들은 여기서 그들의 심문과 회유를 받는 동안에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음모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2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월 하순 일본의 쓰시마 섬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그곳에는 홍주의병진의 유준근(柳濬根), 이식(李식) 등 의병 9인이 이미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최익현은 일본 정부 측의 갖은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최익현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임병찬에게《유소(遺疏)》를 구술, 다음과 같은 여한(餘恨)을 남겼다.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1907년 1월 1일 쓰시마 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경상남도 동래부 초량(草梁)에 닿았다.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앞세운 그의 영구(靈柩)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구포, 성주, 황간, 공주 등지를 거쳐 1월 20일 청양의 본가에 도착,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1907년 논산군 상월면의 국도변에 안장했다가 뒤에 예산군 관음리로 이장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D%B5%ED%98%84


선생은 “이미 소장(疏狀)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 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남원 진입을 꾀했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측 진위대(鎭衛隊)임이 확인되었다. 진위대 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 차례나 보내왔다. 선생은 괴로워했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하였다. 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뿐이었다. 4월 23일(양력 6월 14일), 선생 등 의병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단식끝에 한 많은 적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1906년 11월 20일(양력 1월 4일) 일본 대마도 수선사(修善寺)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이틀 후에 부산 초량에 닿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시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맞이하였으며 영구(靈柩)를 붙들고 통곡했다. 상여가 마련되어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하는 곳에 따라 노제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하였다. 영구는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 만에 정산에 도착하여 그 해 4월(양력 5월) 노성 무동산에 안장되었다. 위대한 유학의 거봉(巨峰)이요 항일의 선봉이 되어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된 선생의 충혼은 영원히 불멸의 빛이 되어 오늘에 사는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익현 [崔益鉉] - 74세 나이로 의병 봉기 (독립운동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65&cid=59011&categoryId=59011


최익현의 의병은 첫 항일 전투에서 열악한 무기와 미비한 전투력 탓에 패배를 했고, 전투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한국주차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가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위술영 경비대에 이감되었다. 그리고 ‘왜놈 땅에서 난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을 하다가 대마도로 이송된 지 넉 달 만인 11월 17일에 그곳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러나 그의 항일 의병 운동은 일제하에 되살아나 독립 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최익현은 선비의 마지막 선택인 무력 항쟁으로 애국을 실천했고, 망국의 고통을 구국 항쟁으로 승화하였다. 타협과 굴절을 외면하고 행동하는 지성으로 투쟁함으로써 조선 선비의 전형을 보여 준 최익현의 치열한 생애는 현실론이 판을 치는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충청남도 청양의 모덕사(慕德詞)에 제향되고 포천ㆍ해주ㆍ고창ㆍ곡성ㆍ화순ㆍ무안ㆍ함평ㆍ광산ㆍ구례ㆍ등지에서 봉향되어 그의 높은 지조와 절의를 기리고 있으며, 그를 기리는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고령 의병장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작품 배경

시각적 안내

손병희이의주 「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1976
이 그림에 대한 정보

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의주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A는 B를 그렸다 1976년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 ]] A는 B와 관련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A는 B를 대여하였다 1991년 11월 30일-1992년 11월 29일
지부복궐상소 최익현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76년 2월
조헌 지부복궐상소 A는 B와 관련이 있다
강화도조약 지부복궐상소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76년 2월 3일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6년 이의주가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를 그렸다.
1991년 11월 30일-1992년 11월 29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을 대여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3554 127.053661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을 대여하였다

그래프

참고문헌

주석

  1.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18",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