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개성 흥왕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9번째 줄: 29번째 줄:
 
고려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며,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1056년(문종 10)에 착공하여 12년 만인 1067년(문종 21)에 준공한 대공사로서 고려 일대를 통해서 가장 큰 규모였다.<ref>이를 통해 당시 고려의 문물 발달이나 국가의 부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제현의 《익재난고》에서는 나라의 부유함과 높은 문화수준을 묘사하며 이 시기를 태평성대라 적고 있기도 하다.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4일.</ref> 사찰이 너무 장엄하고 사치스러워서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공사를 그대로 진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흥왕사는 개별 사찰만 2800여칸에 이르렀고 사찰에 딸린 원(院)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해진다.<ref>"[http://luckcrow.egloos.com/2091044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까마구둥지』<sup>online</sup></online></html>,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ref> 흥왕사가 완공되고 9일동안은 연등회를 열었으며<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36 흥왕사]", 정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ref>
 
고려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며,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1056년(문종 10)에 착공하여 12년 만인 1067년(문종 21)에 준공한 대공사로서 고려 일대를 통해서 가장 큰 규모였다.<ref>이를 통해 당시 고려의 문물 발달이나 국가의 부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제현의 《익재난고》에서는 나라의 부유함과 높은 문화수준을 묘사하며 이 시기를 태평성대라 적고 있기도 하다.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4일.</ref> 사찰이 너무 장엄하고 사치스러워서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공사를 그대로 진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흥왕사는 개별 사찰만 2800여칸에 이르렀고 사찰에 딸린 원(院)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해진다.<ref>"[http://luckcrow.egloos.com/2091044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까마구둥지』<sup>online</sup></online></html>,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ref> 흥왕사가 완공되고 9일동안은 연등회를 열었으며<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36 흥왕사]", 정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ref>
 
, 그 다음해인 1068년(문종 22)에는 이를 기념하는 경성회를 개최하고 왕이 직접 행차를 했다.<ref>"[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1070년(문종 24) 6월에는 흥왕사에 성을 쌓았는데, 사찰에 성까지 쌓은 것은 고려시대에 지은 절 중에 유일하다.<ref>"[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1078년에는 금탑을 조성하였고 아울러 이 금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숙종 때 송나라 조정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이 탑 속에 봉안하였다. 문종이 죽은 뒤에는 문종의 진영(眞影)을 모셨으며, 그 뒤 고려의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 절은 몽고의 병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그 뒤 여러 차례 중창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고, 1330년(충숙왕 17)에 정조(晶照)·[[달환|달환(達幻)]] 등의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 때는 이 절에서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36 흥왕사]", 정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ref> 1948년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5일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가 당시 조사에 참가하였던 박물감 황수영에 의해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논문집(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論文集)』에 발표되었다.<ref>흥암사의 현재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문이라고 한다."[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현재는 건물은 없고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ref>"[http://luckcrow.egloos.com/2091044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까마구둥지』<sup>online</sup></online></html>,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ref>
 
, 그 다음해인 1068년(문종 22)에는 이를 기념하는 경성회를 개최하고 왕이 직접 행차를 했다.<ref>"[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1070년(문종 24) 6월에는 흥왕사에 성을 쌓았는데, 사찰에 성까지 쌓은 것은 고려시대에 지은 절 중에 유일하다.<ref>"[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1078년에는 금탑을 조성하였고 아울러 이 금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숙종 때 송나라 조정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이 탑 속에 봉안하였다. 문종이 죽은 뒤에는 문종의 진영(眞影)을 모셨으며, 그 뒤 고려의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 절은 몽고의 병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그 뒤 여러 차례 중창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고, 1330년(충숙왕 17)에 정조(晶照)·[[달환|달환(達幻)]] 등의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 때는 이 절에서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36 흥왕사]", 정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ref> 1948년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5일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가 당시 조사에 참가하였던 박물감 황수영에 의해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논문집(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論文集)』에 발표되었다.<ref>흥암사의 현재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문이라고 한다."[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ref> 현재는 건물은 없고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ref>"[http://luckcrow.egloos.com/2091044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까마구둥지』<sup>online</sup></online></html>,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ref>
 +
  
 
===특징===
 
===특징===
39번째 줄: 40번째 줄:
 
그런데 금탑은 다음해에 뜻하지 않은 사태와 신하들의 기지로 다시 절로 돌아오게 된다.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제국공주는 일관(日官)이었던 오윤부에게 치료법을 물어보았다. 오윤부는 금탑을 흥왕사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공주가 금탑을 돌려주자 충렬왕의 병이 씻은듯이 나은 것이다.<ref>"[https://namu.wiki/w/%ED%9D%A5%EC%99%95%EC%82%AC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ref>
 
그런데 금탑은 다음해에 뜻하지 않은 사태와 신하들의 기지로 다시 절로 돌아오게 된다.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제국공주는 일관(日官)이었던 오윤부에게 치료법을 물어보았다. 오윤부는 금탑을 흥왕사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공주가 금탑을 돌려주자 충렬왕의 병이 씻은듯이 나은 것이다.<ref>"[https://namu.wiki/w/%ED%9D%A5%EC%99%95%EC%82%AC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ref>
  
 +
====흥왕사와 교장敎藏<ref>이전에는 '속장경'이라 불리기도 했다.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가 일본식 오기(誤記)인 '속장경'을 '교장'으로 명칭을 바로잡고 국사교과서에 반영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0027955 ‘속장경→교장’ 새 국사교과서 반영], 서울신문, 2005년 1월 12일</ref>====
 +
흥왕사는 초대 주지인 [[의천]]에 의해 [[교장|교장(敎藏)]]의 간행사업이 이루어지고 실현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 교장은
 +
의천이 경. 율. 논 등의 삼장(三藏) 즉 대장경에 대해 연구하여 해석한 장소(章疏)를 수집하고 그 목록을 만들고 간행한 것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5560 교장]",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ref> 의천은 평소 송에서 수학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1085년(선종 2)에 몰래 송에 건너가 경서 1천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다시 요ㆍ송 등에서 경전을 널리 수집하여 흥왕사에 [[교장도감|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각국의 불서 4천 여권을 정리하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교장이다.<ref>흥암사의 현재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문이라고 한다.<ref>"[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978&tabNodeId=NODE04080191&nodeId=NODE04080198&currentLocale=ko 제 3화 흥왕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26일.</ref> 
 +
다.
  
 
 
 
 
금탑조성
 
속장경 간행
 
 
흥왕사의 변
 
흥왕사의 변
  

2017년 4월 26일 (수) 11:03 판


개성 흥왕사
(開城 興王寺)
대표명칭 개성 흥왕사
한자 開城 興王寺
주소 경기도 개풍군
건립시기 1067년
창건자 고려 문종



정의

경기도 개풍군 덕적산(德積山)에 있었던 절.[1]


내용

역사

고려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며,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1056년(문종 10)에 착공하여 12년 만인 1067년(문종 21)에 준공한 대공사로서 고려 일대를 통해서 가장 큰 규모였다.[2] 사찰이 너무 장엄하고 사치스러워서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공사를 그대로 진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흥왕사는 개별 사찰만 2800여칸에 이르렀고 사찰에 딸린 원(院)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해진다.[3] 흥왕사가 완공되고 9일동안은 연등회를 열었으며[4] , 그 다음해인 1068년(문종 22)에는 이를 기념하는 경성회를 개최하고 왕이 직접 행차를 했다.[5] 1070년(문종 24) 6월에는 흥왕사에 성을 쌓았는데, 사찰에 성까지 쌓은 것은 고려시대에 지은 절 중에 유일하다.[6] 1078년에는 금탑을 조성하였고 아울러 이 금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숙종 때 송나라 조정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이 탑 속에 봉안하였다. 문종이 죽은 뒤에는 문종의 진영(眞影)을 모셨으며, 그 뒤 고려의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였다. 이 절은 몽고의 병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그 뒤 여러 차례 중창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고, 1330년(충숙왕 17)에 정조(晶照)·달환(達幻) 등의 화엄종 고승들이 9년 동안 공사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 때는 이 절에서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7] 1948년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5일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가 당시 조사에 참가하였던 박물감 황수영에 의해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논문집(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論文集)』에 발표되었다.[8] 현재는 건물은 없고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9]


특징

흥왕사의 금탑

1078년(문종 32)에 조성된 금탑은 금 144근, 은 427근으로 만들어졌다.[10] 이 금탑은 그 후 약 200년 동안은 잘 보존되어 왔으나, 충렬왕(忠烈王) 때에 이르러 사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원나라 왕실의 딸로 고려에 시집온 제국공주가 금탑을 보고 탐내어 이를 강탈해 궁으로 가져온 것이다. 『고려사』열전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있다.

Quote-left.png

공주(公主)가 흥왕사(興王寺) 금탑(金塔)을 가져다가 내궁(內宮)에 들여놓았는데 금탑을 꾸민 장엄(裝嚴)을 홀랄대(忽剌歹, 쿠라다이)와 삼가(三哥, 셍게) 등이 많이 훔쳐갔다. 공주가 장차 금탑을 허물어 〈마음대로〉 쓰고자 하니 왕이 그만두게 하였지만 듣지 않았고 다만 눈물을 흘리며 울 뿐이었다. 뒤에 왕이 공주와 더불어 흥왕사에 갔는데 승려들이 금탑을 돌려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공주가 허락하지 않았다.

Quote-right.png
출처: 『고려사』열전 권89 권제2 후비[11]


그런데 금탑은 다음해에 뜻하지 않은 사태와 신하들의 기지로 다시 절로 돌아오게 된다.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제국공주는 일관(日官)이었던 오윤부에게 치료법을 물어보았다. 오윤부는 금탑을 흥왕사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공주가 금탑을 돌려주자 충렬왕의 병이 씻은듯이 나은 것이다.[12]

흥왕사와 교장敎藏[13]

흥왕사는 초대 주지인 의천에 의해 교장(敎藏)의 간행사업이 이루어지고 실현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 교장은 의천이 경. 율. 논 등의 삼장(三藏) 즉 대장경에 대해 연구하여 해석한 장소(章疏)를 수집하고 그 목록을 만들고 간행한 것이다.[14] 의천은 평소 송에서 수학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1085년(선종 2)에 몰래 송에 건너가 경서 1천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다시 요ㆍ송 등에서 경전을 널리 수집하여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각국의 불서 4천 여권을 정리하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교장이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다.

흥왕사의 변


《고려사》에는 1055년에 문종이 절을 창건할 뜻을 밝히는 제고문이 나와있다.

창건 이후 고려 문종은 자신의 아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을 이 절의 1대 주지로 삼았다.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067년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칠곡 선봉사 A는 B에 있다

참고문헌

주석

  1. "흥왕사", 정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
  2. 이를 통해 당시 고려의 문물 발달이나 국가의 부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제현의 《익재난고》에서는 나라의 부유함과 높은 문화수준을 묘사하며 이 시기를 태평성대라 적고 있기도 하다. 진홍섭,『묵재한화』, 대원사, 2011. 12, 온라인 참조: "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24일.
  3.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까마구둥지』online,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
  4. "흥왕사", 정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
  5. "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
  6. "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
  7. "흥왕사", 정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3월 25일
  8. 흥암사의 현재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문이라고 한다."제 3화 흥왕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25일.
  9.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까마구둥지』online,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
  10. 『고려사』 권 9 <세가> '문종 37년 6월 정묘호'에 따르면, "궁궐보다 더 사치스럽고, 사찰의 담장은 왕성과 비등하리만큼 높고, 또 황금으로 탑을 쌓아 모든 시설이 이와 맞게되었다."고 전한다고 한다."한국의 사라진 대사찰(4) - 고려 흥왕사 & 안화사", 『까마구둥지』online, 이글루스 블로그. 최종수정일: 2011년 4월 16일
  11. "원성공주가 흥왕사의 금탑을 내궁에 옮기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2. "흥왕사", 『나무위키』online
  13. 이전에는 '속장경'이라 불리기도 했다.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가 일본식 오기(誤記)인 '속장경'을 '교장'으로 명칭을 바로잡고 국사교과서에 반영하였다."‘속장경→교장’ 새 국사교과서 반영, 서울신문, 2005년 1월 12일
  14. "교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