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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는 1376년(고려 우왕 2) [[나옹]]이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0&cid=42840&categoryId=42842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4일.</ref> [[나옹]]이 머무르던 당시 200여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9689 여주 신륵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4월 14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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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신륵사는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세종]]의 능인 [[여주 영릉|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으며 전각과 당우들을 새롭게 꾸몄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887 신륵사]", 김위석,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일</ref>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이후 현종 12년(1671) 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0&cid=42840&categoryId=42842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4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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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4일 (금) 09:26 판


여주 신륵사
(驪州 神勒寺)
대표명칭 여주 신륵사
한자 驪州 神勒寺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문화재 지정일 1974년 12월 28일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경내문화재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여주 신륵사 조사당,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1]


개요

역사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전해져내려오는 창건 설화가 있다.

Quote-left.png 어느날 원효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그 말을 듣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는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Quote-right.png
출처: 신륵사의 역사, 신륵사 홈페이지


신륵사는 1376년(고려 우왕 2) 나옹이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2] 나옹이 머무르던 당시 200여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3]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신륵사는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으며 전각과 당우들을 새롭게 꾸몄다. [4]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이후 현종 12년(1671) 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5]


쌍계사는 722년(성덕왕 21)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셔 삼신산(三神山, 금강산·한라산·지리산을 일컬음) 눈 쌓인 계곡 위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840년(문성왕 2) 혜소가 건물을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887년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었으며, 1632년(인조 10) 벽암에 의해 중건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지리

화개에서 쌍계사로 가는 약 5km의 도로변에는 벚꽃나무들이 늘어서 벚꽃터널을 이룬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화개 면장을 지낸 김진호 씨가 쌍계사 가는 소롯길을 넓히면서 벚꽃 묘목을 일본에서 구입해다가 심은 데서부터 비롯됐다.[7] 화개라는 지명도 원래는 쌍계사로 오르는 길목에 벚꽃이 만발하여 붙여졌다고 한다.[8] 지금은 이 벚꽃길이 쌍계사와 더불어 화개를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쌍계사 매표소 바로 앞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절의 좌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이 만나 합쳐진 것이다. 절이름을 두 물이 만난다는 뜻인 '쌍계(雙溪)'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9]

특징

쌍계싸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차시배지에는 '차시배지 기념비'가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828년(흥덕왕 3)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후 혜소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한다. 쌍계사는 도의와 동시대에 활약한 혜소가 육조혜능선사의 남종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에 연원이다. 그러므로 쌍계사는 선(禪), 다(茶), 음(音)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10]


동영상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367년 나옹이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840년 혜소가 쌍계사(옥천사)의 건물을 중창하였다.
887년 쌍계사의 명칭이 옥천사에서 쌍계사로 바뀌었다.
임진왜란기 쌍계사 건물이 크게 소실되었다.
1632년 쌍계사가 벽암에 의해 중건되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하동 쌍계사 A는 B에 있다
하동 쌍계사 승탑 하동 쌍계사 A는 B에 있다
하동 쌍계사 동종 하동 쌍계사 A는 B에 있다
하동 쌍계사 괘불도 하동 쌍계사 A는 B에 있다
하동 쌍계사 감로왕도 하동 쌍계사 A는 B에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혜소 A는 B를 위한 비이다
혜소 하동 쌍계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삼법 하동 쌍계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벽암 하동 쌍계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의상 삼법 A는 B의 스승이다
남종 하동 쌍계사 A는 B와 관련있다
범패 하동 쌍계사 A는 B와 관련있다

참고문헌

황원갑,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주석

  1. "신륵사", 김위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일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회암사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4일.
  3. "여주 신륵사", 『두산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4월 14일
  4. "신륵사", 김위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일
  5.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회암사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4일.
  6.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쌍계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0일.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쌍계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0일.
  8. 황원갑,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149쪽
  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쌍계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0일.
  10. "쌍계사 소개", 쌍계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