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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聖住寺)는 신라 말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로, 한때는 2,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전국 최고의 절로 손꼽히던 곳이다.<ref>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110&cid=42865&categoryId=42865 성주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ref>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이 전국 [[구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聖住山門)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 특히 성주산문은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낭혜]]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성주사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말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A3%BC%EC%82%AC%EC%A7%80 성주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수정일:2016년 7월 26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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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는 신라 동종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 종은 상원사 범종, 에밀레종과 함께 통일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물이다. 월정사에 옮겨 보관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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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3일 강원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양양 진전사지와 더불어 한국 선종(禪宗)의 개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폐사지로 꼽힌다. 선림원은 804년(애장왕 5) 무렵 순응(順應)이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순응은 802년 해인사를 세운 승려로, 이로써 선림원이 신라 불교 최대 종파였던 화엄종에서 세운 사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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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은 이후 9세기 중엽 홍각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는데, 홍각은 선종 승려로 선림원이 이때 선종 사찰로 전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화엄종 승려들이 대거 선종으로 이적한 사실을 입증해준다. 1985년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900년 전후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부도비와 석등, 삼층석탑 등은 1965년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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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가람배치는 삼층석탑 뒤에 앞면 3칸, 옆면 4칸에 맞배지붕의 금당건물이 있었으며, 주춧돌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편 언덕의 석등 북쪽에서도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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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찰의 가람배치는 3층석탑 뒤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금당건물이 배치되었는데 주춧돌이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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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 언덕 위에는 석등이 놓여 있고 석등 북쪽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옆에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 보물 제446호)가 남아 있어서 조사당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넓은 광장에는 승방 등 많은 건물지들이 확인되는데 이곳 입구에 중문(中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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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8110&cid=42865&categoryId=42865 성주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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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A3%BC%EC%82%AC%EC%A7%80 성주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수정일:2016년 7월 26일.</ref>  
  
 
===역사===
 
===역사===

2017년 4월 12일 (수) 15:45 판


양양 선림원지
(襄陽 禪林院址)
대표명칭 양양 선림원지
한자 襄陽 禪林院址
주소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 424
문화재 지정번호 강원기념물 제53호
문화재 지정일 1982년 11월 3일
관리자 양양군
건립시기 통일신라
창건자 홍각
경내문화재 양양 선림원지 승탑,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 양양 선림원지 석등



정의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1]


개요

1948년에는 신라 동종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 종은 상원사 범종, 에밀레종과 함께 통일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물이다. 월정사에 옮겨 보관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청

1982년 11월 3일 강원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양양 진전사지와 더불어 한국 선종(禪宗)의 개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폐사지로 꼽힌다. 선림원은 804년(애장왕 5) 무렵 순응(順應)이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순응은 802년 해인사를 세운 승려로, 이로써 선림원이 신라 불교 최대 종파였던 화엄종에서 세운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선림원은 이후 9세기 중엽 홍각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는데, 홍각은 선종 승려로 선림원이 이때 선종 사찰로 전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화엄종 승려들이 대거 선종으로 이적한 사실을 입증해준다. 1985년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900년 전후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부도비와 석등, 삼층석탑 등은 1965년에 복원한 것이다.

가람배치

절의 가람배치는 삼층석탑 뒤에 앞면 3칸, 옆면 4칸에 맞배지붕의 금당건물이 있었으며, 주춧돌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편 언덕의 석등 북쪽에서도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두산백과

이 사찰의 가람배치는 3층석탑 뒤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금당건물이 배치되었는데 주춧돌이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다.

서편 언덕 위에는 석등이 놓여 있고 석등 북쪽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옆에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 보물 제446호)가 남아 있어서 조사당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넓은 광장에는 승방 등 많은 건물지들이 확인되는데 이곳 입구에 중문(中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백

[2]

[3]

역사

성주사(聖住寺)는 백제 때 오합사(烏合寺)로 불리다가 승려 낭혜가 오합사로 오면서 절이 크게 중창되었고 그에 따라 통일신라 문선왕 때에 성주사로 개칭된 것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에 따르면 오합사는 성주사의 전신인데 백제 법왕이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왕실에서 매우 중히 여긴 절이었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오합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불우한 이야기를 간직한 절이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서 불우(佛宇)를 돌며 울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도 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큰 붉은말이 있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고 쓰어 있다. 이미 1960년대에도 간간이 나오는 백제 기와조각들 때문에 오합사로 추정되어 왔으며 본격적인 발굴에서는 백제 시대 기와조각들이 더욱 많이 출토되었다.[4]

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낭혜를 기념하며 쓴 비가 바로 낭혜화상부도비(郞慧和尙浮屠碑)이다. 신라시대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 부도비에는 최치원이 지은 5,000여 자의 글씨가 몸체에 새겨져 있다.[5]

명칭유래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이 절에 있었기에 그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을 붙였으며 산도 마을도 그에 따라 이름이 바꼈다.[6]

동영상

  • 박오덕, "[우리동네 TV 보령 성주사지]", YouTube, 게시일: 2016년 10월 5일. 2017년 4월 12일 확인.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599년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845년 낭혜가 오합사의 주지가 되어 크게 중창하였다.
신라 문성왕 때 오합사에서 성주사로 개명되었다.
888년 낭혜가 성주사에서 입적하였다.
임진왜란기 보령 성주사 건물이 크게 소실되었다.
1984년 사적 제 307호로 지정되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 석등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 석계단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낭혜 A는 B를 위한 비이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최인연 A는 B가 비문을 썼다
낭혜 보령 성주사지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보령 성주사지 구산선문 A는 B에 포함된다
성주산문 구산선문 A는 B에 포함된다
성주산문 선종 A는 B에 포함된다

주석

  1. "[양양 원림원지]", 문명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2012년 12월 12일.
  2. 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성주사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3. "성주사지", 『위키백과』online, 최종수정일:2016년 7월 26일.
  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5. 최정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2010. 온라인 참조: "성주사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6.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성주사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