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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사건정보 |대표명칭 = 진주성싸움 |이칭별칭 = 진주전투, 진주대첩 |시대 = 조선 |성격 = 군사/전투 |날짜 = 1592년 10월5일~10월10일 |관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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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시대 = 조선
 
|성격 = 군사/전투
 
|성격 = 군사/전투
|날짜 = 1592년 10월5일~10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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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592년 10월5일~10월10일(1차), 1593년6월20일~6월29일(2차)
|관련장소 = 경남 진주시 본성동(진주성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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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장소 = 경남 진주시(진주성 일원)
 
|관련인물·단체 = 김시민, 김성일, 성수경, 이광악, 곽재우, 최경회, 정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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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 강대운-진주성싸움(김시민)-1975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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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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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진주(晉州)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 1차 진주성싸움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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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는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로 고려시대부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승승장구하며 평양까지 진격한 왜군은 군량미 보급을 위하여 곡창지대인 호남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바닷길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가로 막힌 왜군은 육로상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을 차지하기 위해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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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진주성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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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10월5일부터 10월 10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절벽으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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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였으나, 전투를 지휘한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마에 총상을 입어 그해 11월 22일에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정유경, 김준민 등의 의병군들은 외곽에서 적군을 위협하는 협공작전을 펼쳣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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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진주성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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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왜군은 1593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등이 진주성을 재차 공격하였다. 당시 명나라와 화의를 진행중이던 왜군은 경상도와 호남지역을 장악하여 후방의 안정적인 보급과 확실한 교두보로 만든 후 강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차지하는 전략적인 중요성이 증대되어 반드시 진주성을 공략해야만 했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 9만 3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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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 휘하의 2400명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과 이계련(李繼璉), 태인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순천 의병장 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포진하였다. 진주성에 집결하여 수성을 맡은 병사는 약 6000~7000명의 병력과 약 6만 명의 일반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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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상주에서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고 진주성 전체의 지휘는 의병장 김천일이 맡게 되어 지휘체제에 혼선이 있었다. 더욱이 진주성 안의 관군,의병,주민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잘 훈련된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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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산발적으로 공격하던 왜군은 번번히 패퇴하였다. 황진과 이종인, 김천일, 김준민, 장윤 등이 분전하여 왜군의 파상공격을 거듭하여 막아내었지만,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고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어 호남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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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1차 진주성싸움(1592년10월5일~10월10일)에서 군관민을 지휘하여 3800명의 군사로 2만여명의 왜군을 물리쳤으나, 후퇴하는 적의 탄환에 이마를 맞아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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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1차 진주성싸움(1592년10월5일~10월10일)에서 3800명의 군사와 2만명의 백성이 2만여명의 왜군을 물리쳤으나, 다음해 1593년 2차 진주성싸움에서는 성이 함락되고 10만여명의 왜군에 맞서 싸운 군관민 6만여명이 학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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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참고==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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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분류:조선]][[분류: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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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6일 (월) 18:58 판

진주성싸움()
[[file:|270px|thumb|center|]]
대표명칭 진주성싸움
시대 조선
날짜 1592년 10월5일~10월10일(1차), 1593년6월20일~6월29일(2차)
관련장소 경남 진주시(진주성 일원)



개요

임진왜란 때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진주(晉州)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 1차 진주성싸움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운다.

조선시대 진주는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로 고려시대부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승승장구하며 평양까지 진격한 왜군은 군량미 보급을 위하여 곡창지대인 호남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바닷길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가로 막힌 왜군은 육로상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을 차지하기 위해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을 벌이게 된다.

  • 제1차 진주성 싸움

1592년(선조 25) 10월5일부터 10월 10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절벽으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였으나, 전투를 지휘한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마에 총상을 입어 그해 11월 22일에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정유경, 김준민 등의 의병군들은 외곽에서 적군을 위협하는 협공작전을 펼쳣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1]

  • 2차 진주성 싸움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왜군은 1593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등이 진주성을 재차 공격하였다. 당시 명나라와 화의를 진행중이던 왜군은 경상도와 호남지역을 장악하여 후방의 안정적인 보급과 확실한 교두보로 만든 후 강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차지하는 전략적인 중요성이 증대되어 반드시 진주성을 공략해야만 했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 9만 3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 휘하의 2400명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과 이계련(李繼璉), 태인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순천 의병장 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포진하였다. 진주성에 집결하여 수성을 맡은 병사는 약 6000~7000명의 병력과 약 6만 명의 일반민들이 있었다. [2]

그러나,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상주에서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고 진주성 전체의 지휘는 의병장 김천일이 맡게 되어 지휘체제에 혼선이 있었다. 더욱이 진주성 안의 관군,의병,주민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잘 훈련된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3]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산발적으로 공격하던 왜군은 번번히 패퇴하였다. 황진과 이종인, 김천일, 김준민, 장윤 등이 분전하여 왜군의 파상공격을 거듭하여 막아내었지만,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고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어 호남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4]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1차 진주성싸움(1592년10월5일~10월10일)에서 3800명의 군사와 2만명의 백성이 2만여명의 왜군을 물리쳤으나, 다음해 1593년 2차 진주성싸움에서는 성이 함락되고 10만여명의 왜군에 맞서 싸운 군관민 6만여명이 학살당하였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진주성 ~에서 발발하였다 진주성싸움


참고

  1.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대첩'
  2.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대첩'
  3.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2차 진주성전투'
  4.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대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