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관련항목) |
잔글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 |
||
| 36번째 줄: | 36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개요=== | ===개요=== | ||
| − |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가구(可久)이고, 호는 연촌(烟村), 존양(存養)이다.<ref>김용만, "[ | + |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가구(可久)이고, 호는 연촌(烟村), 존양(存養)이다.<ref>김용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50 최덕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ref>김용만, "[ | + |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ref>김용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50 최덕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업적=== | ===업적=== | ||
1405년([[조선 태종|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환구단|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ref>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274&cid=43671&categoryId=43671 최덕지]",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1405년([[조선 태종|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환구단|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ref>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274&cid=43671&categoryId=43671 최덕지]",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ref>김용만, "[ | + |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ref>김용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50 최덕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450년([[조선 문종|문종]] 1)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으나 이듬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였고, 고향에 돌아가자 조정의 선비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그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ref>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274&cid=43671&categoryId=43671 최덕지]",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1450년([[조선 문종|문종]] 1)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으나 이듬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였고, 고향에 돌아가자 조정의 선비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그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ref>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274&cid=43671&categoryId=43671 최덕지]",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 그는 [[조선 세종|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삶을 마쳤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f>김용만, "[ | + | 그는 [[조선 세종|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삶을 마쳤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f>김용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50 최덕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
| 53번째 줄: | 53번째 줄: |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
| −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 | +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s://dh.aks.ac.kr/Encyves/Graph/E004/E004.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 </html> | ||
===관계정보=== | ===관계정보=== | ||
| 91번째 줄: | 91번째 줄: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김용만, "[ | + | * 김용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50 최덕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274&cid=43671&categoryId=43671 최덕지]",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274&cid=43671&categoryId=43671 최덕지]",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분류:역사인물초상화]][[분류:역사인물]][[분류:인물]] | [[분류:역사인물초상화]][[분류:역사인물]][[분류:인물]] | ||
2025년 1월 12일 (일) 19:10 기준 최신판
| 최덕지(崔德之) | |
| 대표명칭 | 최덕지 |
|---|---|
| 한자표기 | 崔德之 |
| 생몰년 | 1384년-1455년 |
| 본관 | 전주(全州) |
| 시호 | 문숙(文肅) |
| 호 | 연촌(烟村), 존양(存養) |
| 자 | 가구(可久) |
| 시대 | 조선시대 |
| 국적 | 조선 |
| 대표직함 |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
| 부 | 최담(崔霮)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내용
개요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가구(可久)이고, 호는 연촌(烟村), 존양(存養)이다.[1]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2]
업적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3]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4]
1450년(문종 1)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으나 이듬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였고, 고향에 돌아가자 조정의 선비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그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5]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삶을 마쳤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전주 최씨 | 최덕지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 최을인 | 최담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 최담 | 최덕지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 전주 최씨 | 최을인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 전주 최씨 | 최담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 최덕지 초상 | 최덕지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시간정보
| 시간정보 | 내용 |
|---|---|
| 1384년 | 최덕지가 태어났다 |
| 1405년 | 사관(史官)이 되었다 |
| 1409년 | 오제제문을 준비하지 못하여 투옥되었다 |
| 1450년 | 예문관직제학이 되었다 |
| 1455년 | 최덕지가 생을 마감하였다. |
주석
- ↑ 김용만, "최덕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용만, "최덕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최덕지",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용만, "최덕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최덕지",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용만, "최덕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