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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건축 전환기의 여성 건축가
 
한국 현대건축 전환기의 여성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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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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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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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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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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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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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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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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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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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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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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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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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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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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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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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강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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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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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서씨]]

2024년 1월 14일 (일) 07:14 기준 최신판

서혜림(하버드대 건축학과 교수)


가족

  • 아버지: 서원석(성원제강그룹이사장)
    • 언니: 서혜경(세계적 피아니스트.경희대교수)
    • 오빠: 서상준(성원제강그룹 회장)
    • 오빠: 서해봉(성원교역 대표)
    • 본인: 서혜림(하버드대 건축학과 교수)
    • 여동생: 서혜주(경원대교수)


한국 현대건축 전환기의 여성 건축가

한국 사회의 급속한 성장이 이뤄진 1990년대는 건축계에도 전환의 시기였다. 김수근, 김중업 타계 이후 건축가의 세대교체가 모색됐다. 해외 설계 시장 개방 등 새로운 위기를 함께 극복하려는 소모임들도 조직됐다. 이들 모임의 활동이 비록 오래가진 않았지만 그 운동의 결과 젊은 건축가들의 제도권 유입과 건축 교육의 변화가 진행됐다. 기성 건축학교 대안으로 1995년 설립된 서울건축학교(SA)와 한국 최초로 건축학 석사학위(March, Master of Architecture)를 수여하며 같은 해 개원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이 건축 교육의 새 흐름을 상징했다. 이 학교들은 선진화된 해외 교육 시스템을 연구하고 우리 상황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디자인 중심의 설계 교육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기성 건축가뿐만 아니라 막 유학하고 돌아온 이른바 유학 1세대 건축가들의 참여가 활발해졌다. 해외여행 자유화(1989년) 시행 전 다년간 해외 경험을 쌓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건축계에 신선한 자극과 에너지를 전달했다. 그 중심에 건축가 서혜림이 있었다.

서혜림은 당시 젊은 건축가들 사이에서도 낯선 존재였다. 대체로 한국에서 건축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난 이들과 달리 그는 중등 교육부터 미국에서 시작했다. 컬럼비아대학,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Graduate School of Design), 쿠퍼유니온에서 미국 건축학교의 다양한 학풍을 섭렵했다. 1994년 한국에 돌아와 힘마건축을 열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서울에 오자마자 에디터로 참여했던 ‘공간’ 1994년 11월호 ‘미국의 젊은 건축 교육자들(Young American Educator in Architecture)’ 특집은 새로운 지식이 필요했던 한국 건축계와 또 다른 세계의 지성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건축 이론과 실무 경험을 두루 겸비한 그는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서울건축학교와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이 체계를 갖추는 데 기여했다. 이렇듯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던 한국 건축계는 1997년 외환위기라는 복병을 만났으나 지리적, 세대별 접속을 이루며 긴장감 넘치는 활력도 보여줬다. 그때 건축계에 다양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손꼽힐 정도로 적은 여성 건축가 중에서 서혜림은 늘 여성 건축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호출됐다.

가르치는 일과 설계 작업을 병행하던 서혜림에게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 것은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이다. 2000년 개원해 서울특별시건축상 은상과 한국건축가협회상 본상을 받았으나 현상설계 과정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어린이집’이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미술관과 달리 건물 상징성이 작아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1991년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화 제도가 시행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어린이집 건축물은 없던 때였다. 서혜림의 건축 전까지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도 서울시청 별실에 마련되어 있었다. 30대 후반의 서혜림은 양육자 입장에서 어린이집 건축에 도전해보고 싶어했다. 그간 숙고가 드물었던 보육시설에 관한 생각을 풀어볼 기회이기도 했다.

서울 정동 일대는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이 지어질 때만 해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어린이집 옆, 대법원 건물이었던 서울시립미술관이 개조 공사를 진행했다. 정동길도 지금처럼 보행자 중심이 아니라 차량 중심 도로였다. 이런 곳에 서혜림은 아연 강판, 콘크리트 등 다양한 재료로 개별 공간을 겹치고 외부로 뻗어내는, 묵직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외관을 갖춘 건물을 지었다. 단정하거나 경쾌해야 할 어린이집에 맞지 않다는 비판도 나왔다.

지금은 그 말이 무색하게 도시의 시간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차분히 거리와 조응한다. 겉에서 볼 때 모든 공간의 생김새가 다른 만큼 실내 공간도 비정형이다. 아이들은 이 공간에서 다양한 탐색을 할 수 있다. 아이와 교사가 눈을 맞추는 공간, 퍼즐처럼 다양하게 조합되는 연결 공간에다 거리 사람들과 대화를 요청하는 나무 외관의 문자 패턴까지 어린이를 위한 열린 공간을 꿈꾼 건축가의 소망이 담긴 건축이다.

지금보다 부족했던 당시 어린이 안전 인식을 고려하면 아이들 출입 공간과 학부모나 외부인의 출입을 분리하는 동선 구성은 획기적이다. 건물 정면은 아이들의 출입 공간, 측면은 외부인의 입장·대기 공간이다. 소란스러운 외부와 면한 정면과는 달리 놀이터와 정원을 둔 후면은 독립적이다. 그 열린 공간을 건물이 ㄱ자로 감싼다. 아이들은 복잡한 도시 상황에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직장인을 포함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심 어린이집을 고려한 기획이다. 안전에 대한 지지와 독립적 공간을 확보받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리에서 고립·배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일원으로 함께 성장한다.

한편으로 이 건축은 한국 영·유아 시설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다. 현상설계 당선 후 구상부터 실현까지 수많은 협의와 조정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선 원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건물에 많은 수정이 이루어진 이유에는 당시 부재한 돌봄·교육 시설 건축 행위에 대한 제도적 기반, 선례가 되는 영·유아 보육시설의 사례 부족 등 여러 사회적·시대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층과 층을 직접 연결하는 창과 같은 역동적인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의 구상은 공간 운영과 관리 문제, 예산 삭감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일부 실현되지 못했다. 감시 사각지대에 놓인 보수적인 선택이 건축을 주춤하게 했다.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사용자 의도에 따라 실내 공간도 많이 개조된 듯 보인다. 이런 개조 과정을 두고 “건축이 사용자들의 더 나은 삶의 형식을 이끌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 상황에 따라 달랐다. 건축을 여러 이해 관계자의 입장에서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고 서혜림은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건축은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과정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일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모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이의 불완전함을 배우는 것이다.

건축은 다시 건물과 사람을 이어주며 또 다른 연대의 씨앗을 품는다. 이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며 공동의 배움을 일군 힘마건축의 일원들은 박기수(현 매스스터디스 공동대표), 김정임(현 서로아키텍츠 대표), 문훈(현 문훈발전소 대표) 등이다. 이들은 현재 한국 건축계를 이끄는 주요 인물로 활동 중이다. 2017년부터 3년간 서울시 교육청이 주관하는 학교 공간 디자인 혁신 사업을 총괄한 김정임이 이끌었던 ‘꿈담프로젝트(꿈을 담은 교실 프로젝트)’에서 20여년 사이 달라진 돌봄·교육 공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지원, 건축가의 작업 접근성을 확인한다. 어린이를 위한 공공공간의 사회적 인식이 불발된 이상으로만 남지 않고 물리적 실천을 겨냥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꿈담프로젝트’ 같은 최근의 성취에서 서혜림이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에 담으려 한 소망이 가시화되어가는 걸 본다. 다양한 돌봄 공간, 모두가 누리는 질 좋은 교육 공간을 향해 우리 사회가 전진한다고 믿게 된다.

힘마건축에 대한 세간의 비평은 주로 강렬한 형태를 두고 나온다. 서혜림은 그 형태가 공간의 다양한 열림과 내외부 연결을 추구하는 건축가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 이후 진행한 현대고등학교 별관(현정관) 설계도 교육 공간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열림과 연결을 중시하는 그의 건축관을 반영한다.

건축가 문훈과 공동 작업한 이 건물은 학교와 도시의 경계를 뭉개지 않고서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시설에다 열린 외부 공간을 제공하려 한 고민의 해법이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고등학교 건물 옥상정원의 녹지와 학생들이 자유롭게 접속하여 도시의 새로운 지대를 만드는 이 작업은 서울시청직장어린이집에 담으려 한 생동의 가치와 연결된다.

이후 파주출판단지 등에서 크고 작은 작업을 진행한 서혜림은 2000년대 중반 미국으로 돌아가 작업을 이어갔다. 10년 넘는 한국 공백기 끝에 작년 서울에 ‘힘마모바일아키텍처’를 개소했다. 힘마건축에서 힘마모바일아키텍처에 이르는 그 여정에는 어떤 마음의 변화가 담겼을까.

서혜림은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건축의 근본적인 행위에 의문을 품는다. 자연의 상황 혹은 도시가 처한 그때마다의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절하고 반응하는 유목하는 건축을 꿈꾼다.

이때 건축은 그가 배우고 실천해온 건물 형식만은 아니다. 사물이나 사용자 경험 디자인(User Experience Design) 등으로 번역한 건축이 될 수도 있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고 실험을 진행해가는 그의 건축은 여전히 젊고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하다.

거칠게 말해 1990년대부터 일련의 한국 건축을 견인해온 윤리성, 공공성과 같은 가치와 그것을 반영했던 비움의 공간 혹은 보이드(Void)는 서혜림의 작업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단정하고 규범적인 공간보다 틈과 구석으로 확장되는 불안정한 공간, 기 혹은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불온한 공간을 지향했던 그의 건축은 사색하는 정적인 공간에 손을 들어줬던 과거의 비평 혹은 비평의 관습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어린이 공간에 담으려 했으나, 그때는 잘 실현되지 못한 연결의 방식을 이제 이 사회는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서울에서 재출발하는 서혜림 건축가의 사무실 이름에 붙은 ‘모바일’은 안주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들, 땅으로부터 자유로운 건축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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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이천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정 2품.부총리) 세손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尙書左僕射).부총리)

5세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

6세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

7세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8세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9세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10세 서능(서릉)(徐稜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

11세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

12세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

13세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14세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15세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16세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

17세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

18세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

19세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

20세 서화(徐華 성균 생원(成均生員). 학자)

서굉(徐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정 3품. 차관)

서관(徐寬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堂上) . 국장)

21세 서흥조(徐興祖 성균 진사(成均進士))

22세 서경창(徐景昌 청평파(淸平公派))

서찬창(徐贊昌 성균 생원(成均生員))

23세 서숭로(徐崇老 병조참의(兵曹參議).국장)

24세 서의손(徐義孫 성균 생원(成均生員).진참공파)

서의신(徐義臣 진일제공(眞一齋公))

25세 서윤좌(徐允佐. 정일제공)

26세 서덕양(徐德讓 신암공파(愼菴公派))

서덕인(徐德認 판관공파(判官公派)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
        • 증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
          • 할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
            • 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
              • 형: 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 본인: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
              • 동생: 서박(徐樸 봉례공)
              • 동생: 서적(徐迪남양군)
              • 동생: 서직(徐稷 연성군)
  • 작은고고고조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종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서씨일가연합회 [[2]]


가족

  •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정 2품.부총리)
    •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국무총리)
      •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국무총리)
        •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尙書左僕射).부총리)
          •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
            •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
              •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 서능(서릉)(徐稜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
                      •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
                        •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
                          •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
                                  •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
                                    •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
                                      •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
                                        • 서화(徐華 성균 생원(成均生員). 학자)
                                        • 서굉(徐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정 3품. 차관)
                                        • 서관(徐寬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堂上) . 국장)
                                          • 서흥조(徐興祖 성균 진사(成均進士))
                                            • 서경창(徐景昌 청평파(淸平公派))
                                            • 서찬창(徐贊昌 성균 생원(成均生員))
                                              • 서숭로(徐崇老 병조참의(兵曹參議).국장)
                                                • 서의손(徐義孫 성균 생원(成均生員).진참공파)
                                                • 서의신(徐義臣 진일제공(眞一齋公))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의 문신으로 벼슬이 문하시중(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관직)에 이르렀던 서능(徐稜 ?~?)이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의 터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모암마을의 용소(龍沼) 위쪽에 터가 있는데 현재 축대 일부만 남은 상태이다. 1919년 후손 서용호가 이 자리에 ‘절효 서선생 초당 유허비(節孝徐先生草堂遺墟碑)’를 세웠다.

서능은 고려시대의 이름난 효자이기도 하다.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기록된 10여 명 중 한 명이며,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에도 그의 효행 행적이 실려 있다. 또한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남겨 후세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

장성 서능 정려비 (長城 徐稜 旌閭碑)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서능 선생의 효심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스무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어머니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의원이 청개구리가 있어야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때가 한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어 고심하던 중에 난데없이 청개구리가 약탕기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약과 함께 짜서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종이 후에 이 사실을 듣고 표창을 하면서, 그의 효심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정려각 안에 놓여 있는 이 비는 사암 박순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 글씨를 써 놓았다.

전라도(장성) 용전사(龍田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1587년(선조 20년) 서릉(徐稜)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모암서원이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76년 서릉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이건하면서 용전사로 변경되었다.

서릉은 본관이 이천서씨(利川徐氏)로 절효공파((節孝公派) 중시조.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 국무총리)까지 올랐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모 든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성덕리 226번지 용암마을에 위치한다.

재각 용전재(龍田齋)

모암서원(慕巖書院)

1587년에 서삼면 모암리에 세워진 모암서원(慕巖書院)은 절효공 서능(徐稜)을 모신 사당(祠堂)과 양편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앞에 큰 강당이 있어 고을의 선비들이 절효공의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벽에 걸어 높고 그 아래서 글을 읽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현재는 빈터에 모암서원유허비(慕巖書院遺虛碑)와 칠현비(七賢碑)만 남아있다

화남사(華南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있는 현대에 서릉(徐稜)·서식(徐湜)·서숭로(徐崇老)·서영우(徐永佑)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우.

월산사(月山祠) -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향토문화유산 제1호.

전남 무안군 몽탄면 한재길 42-4.

월산사(月山祠)는 1752년 영조(英祖 2년) 이천서씨(利川徐氏)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현재 대치마을 뒷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徐稜)을 주향으로 창건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徐湜), 사암의 현손이며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 때 낙향하여 연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숭로(徐崇老, 1422~?)를 배향하였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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