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김원(신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강혜원님이 김원 문서를 김원(신라) 문서로 이동했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자료 수집중==
+
{{승탑비문 Top icon}}
또 <small>(보림사 보조선사탑비의)</small> 글씨를 쓴 수무주곤미현령(守武州昆湄縣令) 김원() 역시 당나라 유학생 출신이 분명하다. 유림랑(儒林郞)이란 직함을 첫머리에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곤미현은 지금의 영암군에 포함되어 있는 구림 일대다.<ref>최완수,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253/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ref>
+
{{인물정보상세
 +
|사진=
 +
|사진출처=
 +
|대표명칭=김원(金薳)
 +
|영문명칭=Kim Won
 +
|생년=?
 +
|몰년=?
 +
|국가=신라
 +
|시호=
 +
|호=
 +
|자=
 +
|본관=
 +
|증조부=
 +
|조부=
 +
|부=
 +
|모=
 +
|처=
 +
|자녀=
 +
|유명자손=
 +
|저서(작품)=[[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
|필드수=6
 +
}}
  
김원이 홍각선사탑비문을 지은 때가 헌강왕 12년(886)이라 하였는데 이때 김원의 관직은 유림랑수병부낭중겸숭문각직학사사비어대(儒林郞守兵部郞中兼崇文閣直學士賜緋魚袋)라 하였으니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빈공과에 급제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ref>최완수,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253/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ref>  
+
=='''정의'''==
 +
신라시대의 서예가.
 +
 
 +
=='''내용'''==
 +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ref>최완수,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253/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 2017년 3월 1일 확인.</ref>  문장과 글씨에 능통하여<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20 선림원지홍각선사비(禪林院址弘覺禪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년 3월 23일 확인.</ref>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보물 제158호)]]의 글씨를 쓰고,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보물 제446호]]의 비문을 지었다.
 +
 
 +
신라시대의 승려 [[체징|체징(體澄, 804-880)]]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의 비문은 [[김영|김영(金穎)]]이 짓고 김원(金薳)과 [[김언경]]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쓴 특이한 예이다. 비문의 첫머리 부분부터 7행의 '선(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해서체(楷書體)]]로 썼고, 그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행서체(行書體)]]로 썼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018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ref>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310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ref>
 +
 
 +
이 비문의 탁본은 중국 청나라에도 소개되었으며,<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018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ref>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74197&cid=51397&categoryId=51397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ref>"[http://www.e-minwon.go.kr:8072/lfmn/CpmsmastR___01.do?p1=1123601580000&RADIO_NO=0 보물 제158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 2017년 03월 23일 확인.</ref>)이라고 평한 바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310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ref>
 +
 
 +
또한 이 탑비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최고(最古)의 예로서 의의가 크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018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ref>
  
 
=='''관련항목'''==
 
=='''관련항목'''==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width="30%"|node!!width="40%"|relation!!width="30%"|node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는 -가 비문을 썼다 || 김원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김원, [[김언경]]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883년
 
|-
 
|-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 는 -가 비문을 지었다 || 김원
+
|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 김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886년
 
|}
 
|}
  
=='''주석'''==
+
=='''참고문헌'''==
 +
*정현숙, 「신라하대 보림사 금석문의 서체와 그 서풍」, 『목간과 문자』 제15호, 한국목간학회, 2015, 149-173쪽.
 +
*최완수,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253/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
 +
 
 +
=='''각주'''==
 
<references/>
 
<references/>
 +
 +
[[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
[[분류:인물]]
 +
[[분류:신라]]

2017년 3월 23일 (목) 14:28 판


틀:인물정보상세

정의

신라시대의 서예가.

내용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1] 문장과 글씨에 능통하여[2]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보물 제158호)의 글씨를 쓰고,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보물 제446호의 비문을 지었다.

신라시대의 승려 체징(體澄, 804-880)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의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김원(金薳)과 김언경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쓴 특이한 예이다. 비문의 첫머리 부분부터 7행의 '선(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체(楷書體)로 썼고, 그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체(行書體)로 썼다.[3]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4]

이 비문의 탁본은 중국 청나라에도 소개되었으며,[5]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6])이라고 평한 바 있다.[7]

또한 이 탑비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최고(最古)의 예로서 의의가 크다.[8]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김원, 김언경 A는 B가 비문을 썼다 883년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김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886년

참고문헌

각주

  1.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 2017년 3월 1일 확인.
  2. "선림원지홍각선사비(禪林院址弘覺禪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년 3월 23일 확인.
  3.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
  4.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
  5.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
  6. "보물 제158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 2017년 03월 23일 확인.
  7.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
  8. "김원(金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0일 확인.